소설리스트

낙하산이 천재매니저였다고-165화 (165/170)

< 어쩌면 고단수일지도? >

빌보드 핫100 차트에 86위로 진입.

보통의 가수들이라면 설레발을 치며 당장 미국으로 달려가려고 안달복달 못했겠지만, 송하연은 아니었다.

음악방송 대기실에 앉아 있는 그녀의 얼굴은 침착하기만 했다.

박한울이 말했던 대로, 그리고 자신이 생각한 대로, 국내 팬들을 먼저 챙기는 게 가장 중요했으니까.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었다.

대기실 안을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자기 대신 흥분하고 있는 로드 매니저, 그리고 인사를 하러 와서 빌보드 진입을 축하한다 말하는 후배 가수들까지.

하연은 작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래도 기분은 좋네.’

빌보드 차트에 오른 건 그만큼 그동안 자신이 잘해왔다는 증거이며, 이번 앨범 역시 좋았다는 걸 말해주니까.

그리고 이 바닥은 인기가 전부 아닌가.

하연은 고개를 저어 들뜨려는 기분을 털어버리고, 다시 가사와 멜로디를 되뇌었다.

일단은 이번 무대를 잘해야 했다.

현장에 온 팬들이 기대하고 있을 테고, 여기에 오지 못한 다른 팬들도 이 음방 무대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송하연 씨, 준비해주세요.”

“네!”

이제 무대에 올라갈 시간이다.

하연은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로드 매니저와 댄서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우며 걸음을 옮겼다.

새벽의 고요한 음악방송 공개홀.

그러나 무대로 향하는 지금, 이곳의 텁텁한 공기는 왠지 팽팽하게 당겨져 있는 듯했다.

하연은 모습을 드러내기 전, 먼저 목소리를 내어 자신이 왔음을 알렸다.

“아아. 마이크 테스트 하나 둘.”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공개홀의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자, 무대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팬들의 입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아!”

“우와아아!”

행복감이 파도처럼 밀려들어왔다.

참을 수 없던 하연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무대 위에 올라섰다.

“안녕하세요! 오래 기다리셨죠?”

“아뇨!”

“언니! 너무 예뻐요!”

“빌보드 축하해!”

팬들과 짧게 인사를 나눈 뒤 시작된 리허설 무대.

하연은 반주를 들으며, 또렷하게 보이는 팬들의 얼굴을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봤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 그 속엔 자신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커다란 애정이 담겨 있었고.

잔뜩 올라간 입꼬리는 행복과 희열, 흥분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 황홀한 광경을 눈에 담아내고 있던 하연은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들끓는 것이 느껴졌다.

‘좋다···.’

하연은 팬들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무대 하나하나에 더욱더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국내에 그리 오래 있지 못하기도 할 테니까.

***

채희가 주연으로 출연하는 드라마,

<주점 칙칙폭폭>

첫방송을 맞아, 나는 채희의 집으로 향했다.

회식을 할 만도 한데, 내일 아침 일찍부터 또 촬영이 있어서 회식은 드라마가 끝난 뒤에 몰아서 하기로 했다.

난 너무나도 익숙한 문 앞에 서서, 도어락 비밀번호를 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 안에는 내가 미처 예상치 못했던 손님이 한 명 자리하고 있었다.

“왔어요?”

“···시라송이 씨?”

내 호칭에 그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때, 정채희가 방긋 웃는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선배님도 불렀어요! 괜찮죠?”

“응. 상관없지 뭐.”

심민정과 박송이가 출연하는 영화 ‘폭설’은 진작에 촬영이 다 끝난 상태다.

이제 박송이도 당분간은 시간이 넘치는 백수라는 말.

난 소파에 앉으며 박송이에게 물었다.

“근데 이번엔 말이 없네요?”

“뭐가요.”

“차기작 골라달라거나 할 줄 알았는데.”

“···잠깐 쉬게요.”

하긴 ‘우리들의 세상에 빛은 없다.’의 촬영이 끝나자마자 영화에 들어갔으니 이제 쉴 만도 하다.

그 전에도 채희와 함께 몇 작품을 함께 하며 강행군을 달려오기도 했고.

‘얘도 이번 드라마 끝나면 잠깐 쉬게 해야겠다.’

난 채희를 흘끗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미 탑스타의 위치는 공고하게 다져놓은 상태니, 얼마간은 쉬어도 상관없었다.

그래봤자 다른 스타 배우들처럼 연 단위로 쉬지도 않겠지만.

“민정이는요? 걔는 안 쉬어요?”

심민정에 대해 묻는 박송이.

난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한두 달 정도는 푹 쉬고 싶대요. 그래서 대본도 안 고르고 있어요. 고르면 곧바로 연습 시작하고 마음 편히 쉬지도 못할 테니까.”

나와 박송이는 기다란 소파의 양쪽 끝에 앉아 있었는데.

우리끼리 대화하자, 가운데에 앉은 채희가 상체를 앞뒤로 흔들며 노골적으로 대화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난 실소를 흘리며 물었다.

“정신없게 왜 그래? 대화에 껴주리?”

“네! 여기 우리 집이거든요? 이러려고 둘 다 초대한 거 아니고. 오늘은 제가 주인공이에요!”

그래, 뭐. 지금까지 수고가 많았으니 기분 좋아질 말도 좀 해줘야겠다.

얘 말마따나, 오늘의 주인공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그때, 박송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대체 넌 언제 철 들래? 그렇게 애 같이 굴어서 남자 하나 꼬실 수나 있겠어?”

“···.”

입을 꾹 다무는 채희.

나서서 띄워주기에 좋은 타이밍인 것 같았다.

난 박송이에게 채희를 가리키며 말했다.

“시라송이 씨, 솔직히 채희 정도면 가만히 있어도 남자들이 정신 못 차리고 줄 서죠. 예쁘고 귀엽잖아요. 지금도 인기가 얼마나 많은데.”

“···.”

“···.”

그런데, 예상했던 반응과 정반대의 반응이 되돌아왔다.

채희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고, 박송이는 눈살을 한껏 찌푸리고 있었다.

“채희야, 일로 와. 우리 둘이 모니터링하자.”

“···네, 선배님.”

외톨이가 된 느낌이다.

채희가 방금 전에 이런 기분이었구나.

거울 치료 효과가 상당하다.

‘간만이긴 하네.’

셋이 촬영장에 있을 때면 이렇게 투닥거리던 게 일상이었기에, 한편으론 반가운 마음도 들었다.

말로는 서로를 공격하면서도, 서로 즐기고 있다는 게 느껴진달까?

“시작한다.”

그렇게 얼마 안 있어, 드라마가 시작했고.

우리는 조용히 감상하기보단, 쉴 새 없이 대화를 나누며 감상하기를 택했다.

“야, 너랑 딱 어울리는 캐릭터다. 이번엔 연기 쉬웠겠네?”

“네? 딱히 특별하게 쉽게 느껴지진 않았는데요?”

“···아, 너한텐 다 비슷하게 쉬웠겠구나.”

“아뇨? 액션스쿨 다니는 거랑 식단 관리하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어휴···. 됐다. 말을 말자. 말해봤자 나만 처량해지지.”

난 그녀들의 대화를 들으며 조용히 키득거렸다.

이렇게 가볍게 대화를 하며 보기에도 적합한 게, 이 드라마는 시청자에게 그리 큰 집중을 요하지 않았다.

내용이 피로도를 요구하지 않는 것을 넘어,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하는 사람마저 마음 편하게 볼 수 있게 해주는 드라마였다.

큰 굴곡은 없지만 저절로 마음이 따뜻해지며 잔잔하게 미소를 짓게 만들어주는 드라마.

난 TV를 바라보던 시선을 옮겨, 옆에 앉은 채희에게 말했다.

“시청자분들도 우리처럼 봤으면 좋겠다.”

“우리처럼요?”

난 심드렁하게 TV를 보는 박송이와, 고개를 갸웃하는 채희를 번갈아 보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

당연히 드라마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지금 이곳에는 따스한 바람이 머무는 것만 같았다.

“응, 우리처럼.”

***

‘주점 칙칙폭폭’의 첫방송 시청률은 23%를 기록했다.

비정상적일 정도로 높은 시청률에 제작진들은 모두 경악했으나.

난 어느 정도 그 이유가 짐작이 갔다.

예상했던 것보다 높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더라고.

저번에도 그랬듯이.

[믿고 보는 정채희! 이번 드라마는 힐링물이다.]

[정채희를 그대로 담아낸 것만 같은 캐릭터에 대중들 열광하다.]

[힘들고 지친 국민들을 위로해주는 드라마. 박한울의 Pick은 이번에도 틀리지 않았다.]

기사 타이틀이 대중들의 반응을 말해주고 있었다.

-진짜 정채희 배우 안 했으면 저랬을지도 모르겠다ㅋㅋㅋ 근데 사장이 아니라 알바생으로. 이건 현실반영해야지ㅋㅋ

-나··· 저 가게에서 일하고 싶어. 안 도망치고 평생 뼈 묻을 자신 있는데ㅠㅠㅠ

-이거 며칠 동안 기다리던 거긴 한데 막상 퇴근하고 집 들어오니까 너무 힘들어서 도저히 볼 정신이 아닌 거임. 그래도 일단 기다리던 거라 슬쩍 보고 다음에 제대로 보려고 했는데··· 그 자리에서 다 봄ㅋㅋ 오히려 드라마 보고 나니까 힘든 게 좀 풀리더라? 신기해.

-박한울 픽은 무조건 사수해야지~ 힘들게 뭐가 재밌을지 뒤져볼 필요 없어서 편함ㅋ

최팀장님도, 나도, 사무실에서 이러한 반응들을 확인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최팀장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박실장! 한울아! 왔어!”

“네? 뭐가요?”

그는 활짝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현지 뮤비!”

현지의 뮤직 비디오가 약속했던 일자보다 이틀 일찍 완성됐다는 희소식.

보통 같으면 불안하고 의심할 만하지만, 지금까지 송하연과 현지의 뮤비를 담당하던 곳이라 기대감만이 가득 찰 뿐이었다.

***

난 최팀장님과 함께 곧바로 뮤직 비디오를 확인한 뒤.

태블릿을 들고 연습실로 내려갔다.

구슬땀을 흘리며 안무를 연습하고 있을 현지에게로.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안무는 이미 다 숙지해서 본격적인 연습을 하고 있는지,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고 있었다.

거울을 통해, 미소 짓고 있는 나를 발견한 현지와 댄서들.

그들은 나를 힐끗 바라보면서도 댄스를 멈추지 않았고, 나도 그들의 뒤에 서서 잠자코 곡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완벽하네.’

날고 긴다는 아이돌도 전문 댄서들한텐 상대가 안 된다고들 하는데.

현지만은 예외였다.

아니, 현지를 딱 잘라 아이돌이라고 말하기도 좀 그런가?

아주 잠깐이지만 댄스팀에 몸을 담아, 당시 송하연의 무대에 같이 오르기도 했으니까.

아무튼 최고 수준의 실력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예전에는 보완할 점도 보였는데···.’

그녀와 계약하기 전후로, 난 내 안목을 활용해 그녀에게 많은 조언을 해주었다.

장점과 단점을 말해주며, 당장 단점을 보완하기보단 장점을 더욱 살리라는 말도 했었지.

그런데 지금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단점이 보이지 않았다.

보컬처럼, 댄스 역시도 그녀만의 고유한 개성과 색깔이 뚜렷하게 완성되어 있으니.

“하아. 하아. 오빠.”

흐뭇하게 구경하고 있자, 곧 음악이 끝났고.

현지는 이마로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내게 다가왔다.

“연습은 잘 되고 있나 보네?”

“네. 열심히 하고 있어요.”

난 고개를 끄덕이며 희소식을 전달했다.

“뮤직 비디오 나왔는데 지금 볼래, 아니면 연습 마저 하고 볼래?”

“벌써 나왔어요?”

“응. 잘 뽑혔더라.”

“지금 볼래요.”

당연하게도 뮤직 비디오엔 댄서들 역시 참여했기에, 그들도 내게 시선을 모으며 귀를 쫑긋 기울이고 있었다.

현지의 대답에, 나는 댄서들을 향해 물었다.

“잠깐 쉬고 같이 볼까요?”

댄서들 역시 현지와 함께 무대를 만들어가는 주인공.

내 물음에 연습실은 금세 시끌벅적해졌다.

“네! 좋아요!”

“이번에도 잘 나왔겠지?”

“와! 잠깐! 나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

“실장님! 괜찮게 나왔어요?”

현지와 단둘이 조용한 분위기에서 보는 것도 물론 좋았지만, 가끔은 이렇게 시끌시끌한 것도 나쁘지 않았다.

잠시 모두가 땀을 식힌 뒤, 나와 현지는 소파에 등을 기대며 바닥에 앉았고.

우리 주위로 댄서들이 다닥다닥 붙었다.

‘···땀냄새가 좀 나기는 하는데.’

더욱 완벽한 무대를 위해 열심히 연습한 흔적이니, 내가 익숙해져야지.

난 곧바로 태블릿을 들고 뮤직 비디오를 틀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나는 다 같이 함께 본다는 선택을 크게 후회했다.

“꺄아아아! 귀여워!”

“아! 저때 지이인짜 힘들었는데 잘 나오긴 되게 잘 나왔다!”

“꺄아아아아! 표정 뭐야!”

꺅꺅 소리치는 바람에 귀가 터질 뻔했지 뭐야.

아무튼 다들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뮤비가 끝나자 댄서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했고.

주위에 아무도 없이 우리 둘만 남고 나서야, 나는 현지에게 엄살을 부릴 수 있었다.

“어우, 귀 아파.”

“하하. 괜찮으세요?”

난 고개를 설러설레 젓고선, 그녀에게 물었다.

“현지야, 너는 마음에 들어?”

이미 표정에서 대답이 나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어봤다.

그런데.

현지는 예의 그 순진무구한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뮤비요, 아니면 오빠요?”

역시, 가끔은 이렇게 주위가 시끌시끌한 것도 나쁘지 않았다.

우리 목소리가 저들에게 닿지 않으니까.

“···둘 다 듣고 싶어졌어.”

“뮤비는 마음에 들고, 오빠는 너무 좋아해요.”

현지가 나를 바꿔놓고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시점에 훅 들어오는 여자가 이상형이 되어버리고 말았어.

‘어쩌면, 고단수일지도?’

< 어쩌면 고단수일지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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