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하산이 천재매니저였다고-136화 (136/170)

< 힘숨찐 >

김본부장은 자신을 찾아온 고팀장을 차분하게 바라봤다.

이 시기에 찾아온 것을 보면 걸그룹에 관한 이야기일 터.

고팀장은 당당하지도, 그렇다고 착잡하지도 않은, 그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박한울 실장의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간단명료했다.

김본부장은 잠시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생각하다가 물었다.

“어느 정도까지?”

“컨셉 회의에 참석해서 의견을 듣고, 곡들이 모이면 그중에 잘될 수 있는 곡을 골라주거나 편곡의 방향을 듣고 싶습니다.”

팀이 다를 뿐 아니라, 일단 본부가 다르다.

허나, 고팀장은 김본부장을 잘 알았다.

어찌 보면 융통성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는 듯 냉철할 때가 많지만, 때로는 사내 질서나 절차 같은 걸 깡그리 무시하기도 한다.

효율을 중시하며, 그 이상으로 결과를 중시하니까.

역시나, 고팀장의 예상대로 김본부장은 곧바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만약 그가 부정적으로 생각했다면 고민하지도 않고 칼 같이 쳐냈을 터.

그는 단지 의자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 정도의 도움이라면 어렵지 않겠군.’

박한울에게 있어, 이 정도의 도움은 고생이랄 것도 없다.

미리 뭘 준비해달라는 것도 아니다.

컨셉 회의에 몸만 참석하게 하여 의견을 묻고, 나중에 모인 곡들 중에 잘될 만한 것들을 골라달라는 거니까.

그저 시간을 어느 정도 소요하게 할 뿐이었다.

이 얼마나 효율적인가.

가뜩이나 기대를 모으는 그룹이었으니, 박한울의 작은 수고로 인해 나오는 결과물은 커다랄 것이 자명했다.

김본부장은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고팀장을 살폈다.

부끄럽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 태도였다.

이 또한 매니저로서 요구되는 중요한 태도 중에 하나다.

아티스트의 성공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시도해보려는 자세.

자신의 무능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거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김본부장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윤본부장에게는 내가 말해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고팀장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

퍼포먼스 측면에 한해서, 현지의 단독 콘서트 준비는 거의 다 완성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성호 삼촌에게 건네줄 시나리오 역시 몇 개 추려놓은 상태이기도 했다.

아직 ‘이거다!’ 할 만한 건 없어서 계속 살펴보고는 있지만, 추려놓은 것들 중 하나에 출연해도 괜찮을 성싶었다.

‘좀 여유롭네.’

한창 잘나가고 있는 ‘수세미’의 촬영에 열중하고 있는 민정 씨와, 할 일 없이 집에서 뒹굴고 있어 심심해 죽으려고 하는 채희와 연락을 계속 주고받는 나날.

출근의 자유를 받아 사무실에 들르지도 않고 연습실로 직행하고 있을 때, 최팀장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예, 팀장님.”

난 전화를 받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소회의실에서 나는 2팀의 고팀장님을 마주할 수 있었다.

“저한테 도움을 청하고 싶으시다고요?”

“그래.”

“어떤 도움을···?”

외양은 비록 부드럽고 온화하며, 키와 덩치도 작았지만.

팀장들끼리만 비교해봤을 때, 기운이 가장 세보이는 듯한 고팀장님.

그는 비굴하지 않게, 그러나 정중하게 말했다.

컨셉 회의에 참석해달라는 것과, 곡을 듣고 골라달라는 것을.

최팀장님이 내게 전화한 걸로 봐서, 위에선 다 양해를 구한 모양이다.

물론 내가 거절하면 그대로 끝이겠지만.

“부탁해도 될까? 사실 네가 말하는 시너지라는 거, 난 아직도 잘 파악하지 못했거든. 분명 시너지가 느껴지고 지금 멤버 구성에서 빼고 더할 게 없다는 건 아는데, 이 시너지를 어떻게 살리는 게 가장 좋을 지는 잘 모르겠어.”

그건 A&R팀과 협력해서 만들어야 할 테지만, 굳이 이런 말을 덧붙이는 이유는 명확했다.

내가 가장 잘 알 테니까.

처음을 잘 잡아야 앞으로도 더 좋을 거라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음···.’

그동안 회사 밖은 물론 회사 내에서도 알음알음 많은 부탁을 받아왔다.

그러나 이를 전부 다 들어주다간 정작 내 할 일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도 이득을 따졌다. 이건 도와주면 내게도 이득이 있겠구나, 없겠구나, 하는 그런 계산.

송하연을 처음 도와줄 땐, 나중에 내 담당으로 가수가 들어올 때를 대비해 입김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지금 송하연과 더불어 성호 삼촌을 적극적으로 돕는 이유는 개인적인 유대감과 감정을 배제하더라도, 회사의 성장을 위한다는 명목상의 이유도 있었다.

나는 내 시간과 노력을 쏟는 것에 비해 그리 효과가 뚜렷하지 않을 것 같은 부탁들은 들어주지 않았다.

효율. 모든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나도 김본부장님처럼 이것을 따져왔다.

물론 김본부장님은 남들보다 이를 더 중요시하는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내게 부탁했다가 거절당한 입장에서는 나 또한 김본부장님 못지않게 냉철하다고 보고 있겠지.

아무튼.

지금까지의 기준으로 따졌을 때, 걸그룹은 충분히 도울 만한 가치가 있었다.

보이그룹 ‘드리머’는 홈 엔터의 도움을 받게 하여 A&R의 성장도 이끌어냈고, 장찬수 또한 내가 처음부터 컨셉을 잘 잡아줬지 않나.

걸그룹 역시 마찬가지였다.

“네, 알겠습니다.”

그래서 흔쾌히 승낙했다.

‘시간도 그리 안 뺏길 것 같고.’

단지 저것들뿐이라면 모두 합해봤을 때, 한 3시간 정도 걸리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이는 크나큰 오산이었다.

이 걸그룹에는 내가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게 딱 하나 있었으니까.

***

난 혹여나 서운해 하실까 싶어, 바로 연습실로 내려가는 대신 3팀으로 찾아갔다.

한팀장님을 찾아뵙고 조금이라도 대화를 나누기 위함이었다.

아무래도 ‘드리머’는 좀 덜 적극적으로 돕지 않았나.

YU엔터의 프로듀싱을 받게 하고, 점검을 봐주긴 했으나.

컨셉 회의나 곡 선정에 있어 내가 관여한 부분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걱정은 기우에 그쳤다.

“야, 네가 이렇게 말하면 우리 애들이 잘 안 된 것 같잖아. 지금 한창 잘나가는 중이거든?”

피식 웃으며 말하는 한팀장님.

그의 미소에 내 얼굴에도 미소가 맺혔다.

“알죠. 그리고 앞으로도 더 잘될 거란 것도요. 데뷔곡 활동도 끝났는데 다음 컴백은 언제쯤이에요?”

난 팀장님과 함께 아예 옥상으로 가서 조금 더 대화를 나눴다.

어쩌다 보니 담배를 피러 올라온 윤본부장님과도 합세하게 돼서 더 떠들었고.

마음 같아선 당장 술이라도 먹으러 가고 싶은데, 아직 업무 시간이라 우린 적당한 타이밍에 맞춰 내려갔다.

오랜만에 크게 웃음을 터뜨렸던 게 기분이 좋아, 나는 바로 그녀들에게 가기로 했다.

컨셉 회의 일정은 아직이지만, 그래도 그때 딱 알맞는 의견을 내려면 현재 그녀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까지 올라왔는지는 봐놔야지.

그래야 어느 정도까지 소화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으니까.

그런데 연습실로 향하는 도중, 직원들의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너 그거 들었어? 박한울 실장님이 이번에 걸그룹 애들-“

“이미 옛날옛적에 들었습니다, 선생님.”

“옛적은 무슨, 아직 30분도 안 됐구만.”

난 피식 웃으며 마저 걸음을 옮겼다.

‘소문 진짜 빠르네.’

이 정도면 이미 애들도 알고 있지 않을까?

아니, 알 게 분명했다. 비밀이랄 것도 없고 희소식이니, 매니저가 즉시 전달했겠지.

난 복도를 지나 그녀들이 연습하고 있을 연습실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옹기종기 모여 있던 그녀들의 시선이 내게로 꽂혔다.

쉬는 시간이었나 보다.

내가 참여한다는 소식을 들어서 이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거나.

“실장님!”

그녀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송하니는 내게 다급하게 손짓했다.

“실장님! 대박이에요, 대박!”

방방 뛰며 상기된 얼굴로 말하는 송하니.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난 얼굴이었고, 다른 멤버들 역시 얼굴에 희망과 기쁨, 흥분이 잔뜩 서려 있었다.

강해정만 빼고.

그녀는 어쩐지 수줍은 듯 입꼬리를 씰룩이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음? 뭐지?’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송하니는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 이어폰! 이어폰으로 들려드려야겠다.”

후다닥! 구석에 가서 제 가방을 뒤지더니 이어폰을 들고 강해정의 손에 들려 있는 핸드폰에 꽂았다.

그리고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내게 이어폰을 건네며 말했다.

“한 번 들어보실래요?”

그녀들의 모습에 상황이 너무 투명하게 드러나서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강해정이 작곡이라도 했나 보네.’

적당히 긍정적인 피드백이나 해주고 자신감을 심어줘야겠다.

그녀들이 이 정도까지 좋아하는 걸 보면 그래도 나쁜 실력은 아닐 테니까.

그런 가벼운 생각으로, 나는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그런데 막상 내게 들려주려니 긴장감이 엄습하는 모양이다.

그녀들의 얼굴에서 함박미소가 서서히 잦아들고 있다.

그런데.

도입부, 그러니까 음악이 흘러나온 지 채 30초도 지나기 전이었다.

“···!”

나는 부릅뜬 눈으로 강해정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이런 센스를··· 갖고 있었다고?’

놀랄 노 자였다.

헛웃음이 크게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일단 대화는 나중에.

난 다시 고개를 털어내며 음악에 집중했다.

아직 테크닉은 상당히 부족하지만 센스가 굉장히 돋보였다.

창작물을 하도 보다 보니, 난 좋은 창작물에 대해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게 되었다.

감각이나 영감, 혹은 재능이라 불리우는 그것을 가졌으나 경험이나 기술이 부족한 것.

그리고 감각을 가지진 못했으나 경험적인 기술을 가진 것.

마지막으로 둘 다 가진 것.

예전의 송하연과 같은 경우엔 재능이 살짝 부족했으나 경험과 기술, 노력과 집착으로 좋은 작품을 내는 케이스였다.

이번 앨범의 경우엔 내가 있어서 그런지, 그녀가 영감에만 집중해서 대박이 난 케이스였지.

그리고 지금 강해정이 작곡한 것은 전형적인 케이스였다.

감각이 무척 뛰어나지만 경험과 기술, 확신이 부족한 것.

‘이러면 간단하지.’

편곡을 거치면 아주 훌륭한 작품으로 된다.

이왕이면 그녀와 함께 작업하는 게 더 좋아 보였다.

옳은 방향을 깨닫게 하여 자기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4분여가 지나 음악을 모두 들은 뒤.

“어때요!? 어때요?! 좋아요?”

내 표정을 보고는 좋게 들었다는 걸 확신했는지, 송하니는 밝은 얼굴로 물었다.

난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강해정과 눈을 마주했다.

“이거 해정이 네가 만들었어?”

“···네.”

“혼자? 아니, 그러니까··· 언제부터 작곡 시작했어?”

대답은 송하니가 대신했다.

그녀는 자랑스럽다는 듯 뿌듯함이 만연한 얼굴로 말했다.

“혼자 인터넷 보고 배웠대요! 그리고 얼마 되지도 않았대요. 그치? 이번 1월 초부터 만들었다 그랬지?”

고개를 끄덕이는 강해정.

나도 모르게 마음의 소리가 입밖으로 새어 나왔다.

“···미치겠네.”

조금 더, 조금 더 많은 얘기를 듣고 싶었다.

이런 재능이 있으면서 작곡은 그동안 왜 안 했었는지, 어쩌다가 시작한 건지 등등.

그런데 이 말부터 먼저 튀어나왔다.

“혹시 다른 사람들한테 들려줬는데 반려당한 거 아니지?”

이번에도 먼저 나서려는 송하니의 입을 틀어막고, 강해정과 같은 막내 라인인 성윤지가 말했다.

잘 정리해서 조리 있게.

근데 어떻게 성윤지가 제일 언니 같냐.

난 그녀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러니까 겁먹어서 말 못하고 있었던 거네? 데뷔에 집중 못하고 있다고 혼날까 봐. 그런데 막상 내가 컨셉 회의에 낀다는 소식 듣고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것 같으니까, 다른 사람들한테 공개하기 전에 먼저 멤버들한테 말한 거다?”

“네, 방금 전에요.”

“저희도 방금 전에 처음 듣고 공중제비 돌았어요!”

머릿속이 굉장히 말끔해졌다.

이러한 경우, 이제 순서는 정해져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일단 너희는 다 이 곡이 마음에 든다는 거지?”

“네!”

“마음에 들어요.”

“완전요!”

아티스트의 의견을 묻고.

“그럼 먼저 너희 실력이 어느 정도 됐나 바로 볼 수 있을까?”

“···지금 바로요?”

“네, 네! 할 수 있어요.”

“···네.”

아티스트의 실력과, 멤버들 간의 호흡이 어느 정도로 맞는지를 파악하면 끝.

그 뒤론 이제 그냥 작업을 시작하면 된다.

나는 긴장된 낯빛으로 무대에 대한 평가를 기다리고 있는 그녀들에게 씨익, 웃으며 말했다.

“컨셉은 정해진 것 같다. 데뷔 곡도 그렇고.”

난 강해정을 슬쩍 바라봤다.

기분이 좋은 모양인지, 입술을 꾹 깨무는데 이미 얼굴 전체가 웃고 있어서 웃음을 참는 것처럼 보이지가 않는다.

이제 당분간 그녀와 함께 작업실에 박혀서 편곡을 해야겠다.

기한은 컨셉 회의 날이 되기 전까지.

‘그런데··· 생각해볼수록 어이가 없네.’

힘숨찐도 아니고, 이런 재능을 여태껏 몰랐다니. 심지어 본인도 모르고 있었다지 않은가.

이런 곡을 만들었으면서.

역시 세상엔 천재들이 너무 많았다.

우리 회사에 몰린 것 같아서 한없이 기쁠 따름이지만.

‘잘만 키우면 정말 크게 일 낼지도 모르겠어.’

내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멤버들은 모두 서로를 얼싸안고 기쁨의 환호성을 터뜨렸다.

연습실이 무너질 것처럼 아주 아주 커다랗게.

< 힘숨찐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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