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하산이 천재매니저였다고-135화 (135/170)

< 소심한 강해정은 도움이 필요하다 >

현지의 연습실에 들어왔는데 도무지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상념이 구체화되지 않아서.

단지 송하연의 이미지만이 아른거릴 뿐이었다.

그렇게 어쩐지 멍한 상태로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어두워진 시야에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현지가 내 앞에 서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피곤하세요?”

“아니, 아니야. 미안, 잠깐 정신이 좀 팔렸네.”

정신 차리자. 일단 일하는 중이기도 하니.

고민이야 나중에 해도 된다.

그리고 해야 할 일이 또 있다.

성호 삼촌의 영화 시나리오를 고르는 일.

이름 있는 감독과 제작사에서 들어온 것부터 보면 되니, 그리 오래 걸릴 것 같지 않긴 했다.

최팀장님이 하나 추천해줄 게 있다고도 하고.

게다가 삼촌이 워낙에 연기 폭이 넓어야지.

뭘 하든 잘 어울릴 테니, 조건도 널널했다.

“피곤하시면 들어가셔도 돼요. 다음에 봐주시면 되죠.”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을 풀지 못하고 있는 그녀에게, 난 태연한 미소를 띠워 보였다.

“정말 괜찮아. 드라마 시즌2 확정된 거랑, 성호 삼촌 시나리오 골라드려야 할 것 같아서 잠깐 생각 좀 했던 거야.”

그녀는 그제서야 부드럽게 표정이 변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

‘하필 그때 들어올 게 뭐야!’

송하연은 최팀장님을 떠올리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알고 보니 별로 급하지도 않은 소식이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까?

머릿속에서 떠오른 가상의 시나리오가 벌써 100개는 넘어가는 것 같았다.

그녀의 찌푸려진 미간은 어느새 반들반들하게 펴져 있었다.

그 분위기가 아직도 피부 위에 붙어 있는 것처럼 생생하다.

정말로 뭔가 일어날 것 같았던 분위기.

표정과 눈빛 모두, 마치 지금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세세하게 떠올랐다.

하연의 입꼬리는 실실 올라갔고,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땐 자신도 무슨 정신이었는지 모르겠다.

“하아···. 그런데 진짜 분명 뭔가 말하려 하긴 했던 것 같은데.”

어쩌면 자기만의 착각일지도 몰랐다.

지금도 혼자 있으니 별별 생각을 다 하는 것일지도 모르고.

그런데 그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

구부정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 머리를 감싸고 있던 몸은, 벼락을 맞은 것처럼 재빠르게 움직였다.

숨이 멈추고, 눈이 크게 뜨여졌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손은 머리를 정리했다.

그런데, 문이 열리고 들어온 건.

“어···? 현지 씨였구나?”

긴장이 탁, 하고 풀어졌다. 그리고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 건지. 역시 지금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런데 유현지는 잠시 대답없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머릿속에 물음표가 띠워지려 할 때.

현지는 방긋 웃으며 물었다.

“콘서트에 대해서 선배님한테 조언 좀 구하고 싶어서요. 혹시 방해한 거면 다음에 다시 여쭤볼게요.”

하연은 고개를 저으며 마주 미소 지었다.

“아니에요. 들어오세요.”

***

시즌2에 대해 채희에게 전달하고, 성호 삼촌과 통화하며 시나리오를 고르는 데 참고할 만한 것들을 듣고 있었다.

“그러니까 단독 주연이든, 공동 주연이든 상관없다는 거네요?”

-그렇지. 그리고 장르도 상관없어. 원래 판타지는 좀 꺼렸는데, 채희 씨 드라마 보니까 괜찮겠더라고.

“음.”

-그래도 감독님이 좀 이름값 있으면 좋지. 연출이라든가 촬영장 돌아가는 게 매끄러울 테니까. 그렇다고 너무 명감독일 필요까지는 없고.

“널널하네요.”

많이 널널했다.

조건이 전혀 까다롭지 않았다.

보통 같으면 이럴 경우 범위가 너무 넓어서 더욱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난 아니다.

“감독님 이름값만 조금 있으면 흥행이랑 작품성을 우선으로 두시겠다는 거 맞죠? 장르 상관없이.”

-그래. 전작들이랑 캐릭터나 내용 면에서 어느 정도 비슷한 게 있어도 괜찮아. 이제 그런 거 신경 쓰면서 할 짬은 아닌 것 같아서.

물론 내용이나 캐릭터에 관해 취향이 있긴 하겠지만 그건 이러한 조건들과는 관련이 없는 문제.

두세 개 정도 골라내면 그 중에는 취향이 있을 것이다.

만약 다 아니라고 하면, 좋은 시나리오가 나올 때까지 더 기다려야지 뭐.

난 그와의 통화를 끊고 테이블 위에 놓인 하나의 시나리오에 손을 뻗었다.

성호 삼촌에게 들어온 작품인데, 최팀장님은 이미 읽어본 모양인지 이것부터 보라고 하셨다.

‘감독님 이름값은 뭐, 더할 나위 없지.’

소회의실 유리를 통해, 복도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발견하곤 잠시 멈춰 바라보는데.

이런 일이 한두 번 있는 것도 아니니, 신경을 끄고 첫 장을 펼치려 했다.

그런데 그때, 핸드폰에 진동이 울렸다.

삼촌이 미처 전달하지 못한 말이 있는 건가, 싶어 확인해봤는데.

삼촌에게 온 메시지가 아니라, 현지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오빠 저희 투어 때 해외도 같이 다니는 거 맞죠?]

난 잠시 대본에서 손을 떼고 핸드폰으로 양손을 올렸다.

[대부분은 그럴 것 같아. 별 일 없는 이상.]

나도 해외 투어를 돌아다닌 적이 없어서 이번 기회에 많이 알아놔야 했다.

[알겠어요. 궁금해서 여쭤봤어요.]

전에 말했던 것 같긴 하다만, 다시 확인차 물어본 것 같다.

난 핸드폰을 다시 내려놓고 대본을 펼쳤다.

그렇게 한 장, 한 장 넘겨보다가, 얼마 되지 않아서 파악할 수 있었다.

‘···보류.’

딱히 엄청 좋지도, 그렇다고 딱히 나쁘지도 않은 수준의 시나리오다.

대박작은 안 될 것 같고, 그럭저럭 흥행작 정도는 될 것 같다.

결국엔 작품을 고르는 데 더 시간을 들여야 할 모양이다.

역시, 쉽게 쉽게 가는 법이 없지.

난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시나리오 하나만 더 보고 퇴근해야겠다.

***

분명 어젯밤에 이 시나리오는 별로라고 최팀장님께 말씀드렸을 뿐인데.

출근했더니, 한 무더기의 시나리오 산이 나를 반겼다.

“···이건 뭐죠?”

내가 얼떨떨하게 묻자, 최팀장님이 헛기침을 했다.

자기가 보기에도 어처구니가 없었나 보다.

“이제··· 이성호 선배님 시나리오 고른다고 말 좀 돌렸거든. 이게··· 이렇게 바로 결과가 나오더라고. 참, 탑스타의 위력이 새삼 대단하지?”

억지로 올린 입꼬리가 살짝 떨린다.

내 담당 연예인도 아닌데, 이렇게 일더미를 맡기니 눈치가 보이긴 했나 보다.

내가 말없이 쳐다보자, 최팀장님은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 선에서 알아서 하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 되네. 그래도 확실한 안목이 우리 팀에 있는데, 성호 선배님한테 불확실한 걸 줄 순 없잖아. 대신 당분간 일은 다 빼줄게. 현지 공연 준비 봐주는 거랑 대본 고르는 것만 해. 출퇴근도 마음대로 하고. 나머지는 다 나한테 맡겨.”

오케이. 딜이다.

어차피 해야 할 거 출퇴근의 자유와 자잘한 일에서의 자유를 받아냈다.

난 짐짓 태연한 척 어깨를 으쓱이고는 시나리오들을 양손에 받쳐 들었다.

그리곤 옆에서 질린 표정과 경이롭다는 표정을 섞어서 짓고 있는 로드 매니저에게 말했다.

“같이 좀 들어줄래? 연습실까지 옮기게.”

“네, 네!”

두 가지 일을 하게 된 거, 그냥 연습실에서 볼련다.

여기 있다간 다른 일을 떠맡게 될지도 모르니까.

난 로드 매니저와 두 번을 왔다갔다 한 뒤에야 연습실에 편안히 자리잡을 수 있었다.

“휴우.”

“오빠, 편하게 보세요. 저 연습하는 거 신경 쓰지 마시구요.”

현지는 좋다는 듯 미소 지으며 말했다.

원래는 내가 신경 쓰지 말라며 양해를 구해야 할 텐데, 우리 현지 천사 같은 인성 어디 안 가지.

되려 자신이 내게 연습하는 거 신경 쓰지 말고 편안하게 보라고 한다.

난 피식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마워. 그래도 필요한 일 있으면 바로 말해. 그러려고 여기서 읽는 거거든.”

“네.”

난 그렇게 연습실에 울려 퍼지는 음악과, 연습하는 소리들을 배경 삼아 소파 한쪽에 자리잡았다.

그리고 산처럼 쌓인 시나리오들 중에 하나를 집어 읽기 시작했다.

‘음. 이건 좀 난해하네···.’

처음 시놉시스를 읽고, 대본을 몇 장 넘기자마자 파악이 끝났다.

‘이건 넘기고.’

다른 걸 빼서 읽었는데, 이건 평작이다.

처음 최팀장님이 줬던 것보다 살짝 아래 수준.

나쁘진 않지만 이걸 할 것도 아니니, 보류할 필요도 없지.

‘탈락.’

이렇게 몇 개의 시나리오를 넘기다가 살짝 눈이 피로해질 때쯤, 시선을 옮겼다.

앞을 보니, 현지가 댄서들과 함께 안무를 맞추며 땀을 흘리고 있다.

역시 내 선택은 옳았다.

업무 환경이 가히 나쁘지 않아.

‘이 퍼포는 너무 완벽해서 손볼 것도 없겠네.’

그렇게 잠시 한눈을 팔고 시나리오를 보는 걸 반복하다 보니, 쉬는 시간이 되었다.

난 댄서들이 편히 쉴 수 있게 슬쩍 자리를 피해주며 연습실을 나섰다.

그리고 복도에서 그녀를 마주쳤다.

남자 연습생들의 시선을 블랙홀처럼 끌어당기고 있는 연습생, 강해정.

“아, 안녕하세요!”

머리가 바닥에 닿을 듯 허리를 숙인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얘는 외모와는 정반대로 다른 멤버들보다 좀 더 소심한 면이 있는 것 같다.

난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어주며 인사를 받았다.

“이제 슬슬 데뷔에 관련된 말들이 나오고 있는 것 같은데, 준비는 잘 되고 있어요?”

아직 컨셉도 잡지 않았고 데뷔 프로젝트가 제대로 가동되지도 않았으나, 그래도 말이 계속 나오고 있었다.

이제 곧 프로젝트가 시작되겠지.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냅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행이네요. 열심히 하세요.”

그저 안부를 묻는 인사와도 같았기에, 그렇게 말하며 지나치려 했는데.

상의의 옷깃이 살짝 당겨졌다가 풀리는 게 느껴졌다.

“···음?”

“어!? 죄, 죄송합니다.”

그녀가 뒤에서 내 상의를 잡아 끌었다가 아차, 싶어서 놓은 모양이다.

어쩔 줄 몰라하는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왜요? 할 말 있어요?”

“···아뇨. 없어요. 죄송합니다.”

그냥 잡지는 않았을 거 아냐, 라고 묻기에는 표정이 너무 안쓰러워 보였기에.

난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벗어났다.

예상이 되는 것도 있고.

‘뻔하지.’

연습 좀 봐줄 수 있겠냐고 묻는 것일 게 분명했다.

이런 적이 몇 번 있었으니까.

난 그렇게 그녀를 지나친 뒤, 시간을 충분히 때우고는 다시 연습실로 돌아왔다.

쉬는 시간은 끝났고, 이젠 회의를 하고 있다.

그럼 나도 유심히 지켜보면서 낄 수 있을 때만 껴야지.

이렇듯 할 일은 많았으나, 업무의 난이도는 대폭 줄어들었다.

심히 마음에 들었다.

***

늦은 저녁,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온 강해정.

그녀는 씻고 밥을 먹은 뒤, 침대에 늘어져 눕고 싶다는 유혹을 이겨내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짙은 쌍꺼풀, 무표정일 땐 한껏 날카로워 보이는 눈매.

입술에 아무것도 바르지 않았음에도 붉은 기가 감도는 작은 입술, 오똑하게 쭉 뻗은 콧날.

그리고 펑퍼짐한 잠옷으로도 감출 수 없는 폭발적인 몸매.

그룹이 짜여지기 전부터, 주변에서는 데뷔할 게 확실하다는 말을 들어왔고.

지금 역시, 데뷔하면 인기를 쓸어담을 것이란 얘기를 듣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감정 상태는 불안감으로 팽배했다.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는 모두 외모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실력에 대해서는 애매하다는 말만 들어왔으니까.

지금에야 운 좋게 시너지 좋은 멤버들을 만나 어떻게 물 흐르듯 여기까지 왔다고는 해도,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생기지는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성격은 자신이 보기에도 답이 없었다.

끼가 넘쳐나는 다른 스타들과는 달리, 자신은 끼가 없는 걸 넘어 소심하기까지 하니, ‘아이돌을 해도 되는가’에 대한 회의감이 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뭐라도 하긴 해야 되는데···.’

모니터에 띠워진 화면.

거기엔 송하연과 더불어 많은 작곡가들이 사용하는 프로그램과 똑같은 작곡 프로그램이 띠워져 있었다.

그녀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자신이 만든 음악을 들었다.

4분 10초짜리의 음악.

‘···별로 같은데.’

어떻게 들으면 또 그렇게 나쁜 건 아닌 것도 같고.

다른 사람의 평가가 필요한 순간이었으나, 해정은 섣불리 도움을 요청하지 못했다.

데뷔가 거의 확정인 지금, 작곡을 공부하고 있다고 말하면 데뷔부터 신경 쓰라며 혼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춤이나 노래에 대한 연습을 게을리한 것도 아니었지만.

‘처음엔 그냥 잠깐 만져볼 생각이었는데.’

불안함 때문에 시선을 돌리다가, 사용법이나 익혀보자던 게 이렇게 곡 하나를 만들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독학으로 시작해서 여기까지 왔으니, 정말로 이게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쉬이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어떡하지···?”

해정의 머릿속은 무척이나 복잡했다.

< 소심한 강해정은 도움이 필요하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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