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힙합 좋아하시는구나 >
3일 동안 열리는 힙합 페스티벌은 국내 힙합인들에게 있어 일 년 중 가장 큰 행사였다.
이 페스티벌은 아주 유명한 래퍼들만 오는 것이 아니라, 유망주들에게도 무대에 설 기회를 만들어주기도 하는데, 심지어 힙합에 관련이 없는 가수들도 오곤 한다.
그중에서 이번 년도 가장 큰 대어는 단연 송하연.
래퍼 ‘랩독’은 그녀가 이렇게까지 엄청나게 잘 되기 전부터 송하연의 팬이었다는 게 잘 알려져 있었고, 그는 그녀와 같은 날 공연하게 된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피처링 부탁할 곡 없나?'
크루원들로 북적이는 대기실.
그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클라우드에 들어가 심각한 표정으로 비트를 듣고 있었다.
크루에 프로듀서도 따로 있긴 하지만 그는 비트를 혼자서 만들기도 한다.
때문에 클라우드에 비트는 많이 쌓여 있었으나, 딱히 '이거다' 할 만한 곡들은 찾기 힘들었다.
이왕이면 오늘 친해져서 은근슬쩍 음악을 들려주는 게 가장 베스트일 것 같은데.
"하아."
시시덕거리며 장난을 치는 크루원들 사이에 한숨을 내쉬고 있는 사람은 오직 그 한 명뿐이다.
그러니 어떻게 눈에 안 띌 수가 있겠는가.
크루에서 리더격인 피레인은 그런 랩독의 옆에 앉으며 물었다.
“야, 뭐 하냐.”
“아, 형님. 그냥 음악 듣고 있었어요.”
랩독은 한쪽 이어폰을 빼며 대답했다.
그러나 피레인은 이미 랩독의 핸드폰에 클라우드가 켜진 걸 확인했었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 송하연 팬인 거 모르는 사람도 있냐? 피처링 부탁할 곡 있나 보는 거지?”
다른 크루원들도 킥킥 웃으며 한마디씩 덧붙였다.
“그러게 평소에 좀 부지런하게 작업하지. 허구헌 날 게임이나 하고 말이야.”
"오빠, 그렇게 팬이면 진작 좀 보내라니까요. 이렇게 떠서 더 힘들어졌잖아요. 그래도 전이면 희망이라도 있었는데."
"송하연님은 여태까지 힙합에 피처링한 거 하나도 없잖아요. 여태까지 시도했던 분들도 다 까였고. 근데 처음이 랩독 형이다? 전 가망 없다고 봅니다."
"해주면 진짜 대박이긴 한데... 그만큼 가능성이 낮지."
랩독은 입술을 비틀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희망을 품는 게 죄는 아니잖아?"
말마따나, 그녀는 아직 힙합에 피처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시도했던 모든 이들이 다 까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이 기회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친해지면 혹시 또 모르니까.
문제라면 지금 당장 마땅한 비트가 없다는 것.
하지만 이어서 나온 프로듀서 '식서브 다이스'의 말에 랩독의 눈이 번쩍였다.
“작업한 거 중에 괜찮은 거 없으면 내가 줄까? 송하연 씨랑 어울릴 만한 거 하나 있는데.”
"네!"
냉큼 대답하며 곧장 곡을 들어보는 랩독.
리듬을 타면서 유심히 음악을 듣던 그의 입꼬리는 곧 씨익 말려 올라갔다.
같이 피처링을 하지 않게 되더라도 좋다.
그는 단순히 송하연의 팬으로서도, 이 음악에 그녀의 목소리가 얹히는 것을 들어보고 싶었다.
"진짜 딱이네요, 이거."
***
마침내 페스티벌이 시작됐고, 나와 송하연은 대기실에서 나와서 관객들이 올 수 없는 무대 옆으로 향했다.
비록 관객석에서 그들과 함께 즐길 수는 없었지만, 여기서도 분위기를 즐기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첫 번째,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무대가 끝나고.
나는 송하연에게 속내와는 다른 말을 내뱉었다.
“죄송해요. 계속 이러고 있으면 힘드실 텐데, 그냥 안으로 들어갈까요?”
그녀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힘들면 저 혼자서라도 대기실에 갈 테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그냥 있고 싶어서 있는 거예요.”
그녀는 힙합을 싫어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즐겨 듣지도 않는 걸로 알고 있다.
그래도 이렇게 계속 자리를 지키는 이유는 역시 그냥 힙합을 찾아서 혼자 듣는 거랑 이런 뜨거운 현장에 있는 거랑 느껴지는 게 다르기 때문이리라.
“실장님은 기분 어때요? 보니까 좋아요?”
그녀가 나를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질문했다.
내 기분이 어떠냐고?
나는 이 일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방구석 컨텐츠 덕후였다.
이 일을 하면서부터 많은 무대를 봤고, 많은 현장을 가봤으나, 힙합 공연은 이번이 처음.
내 얼굴 위로 흥분하고 있다는 게 고스란히 띠워져 있다는 게 스스로도 느껴지는데, 그녀라고 보지 못 할까.
아마 이를 알기 때문에 저렇게 내 표정을 즐겁다는 듯 관찰하고 있는 것일 거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너무 좋네요. 아마 당분간은 또 힙합만 주구장창 들을 것 같아요.”
“힙합을 이렇게 좋아하시는 줄은 몰랐어요.”
무대 위로 올라오는 래퍼에게 시선을 옮기며 어깨를 으쓱였다.
“되게 좋아해요.”
힙합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메이저 장르 전부.
‘락 페스티벌도 한 번 가볼까?’
거기도 이렇게 열정적인 분위기면 한 번 시간 내서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비트가 흘러나오며 관객들이 환호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귓가에 희미한 음성이 들린 것 같았다.
“그렇구나···. 힙합 좋아하시는구나.”
슬쩍 옆을 바라보니, 그녀의 시선은 이미 무대 위에 놓여져 있었다.
***
차례차례 순서가 지나갔다.
래퍼들과 가수들이 달군 무대는 점차 열기를 더해갔고, 드디어 송하연의 차례가 다가왔다.
아쉽게도 휴식과 메이크업 수정 때문에 송하연의 차례 직전 두 개의 무대는 보지 못 했지만, 본무대에 오르기 전에는 그래도 조금은 쉬는 게 맞다.
오랫동안 가만히 서있는 것만 해도 체력이 빠지니까.
무대에 올라갈 준비를 모두 마친 뒤, 무대에 올라가라는 스태프의 사인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송하연은 무언가를 바라는 듯이 빤히 내 얼굴을 바라봤다.
나는 이게 무슨 신호인지 잘 알고 있었다.
채희도 그렇고, 현지도 그렇고, 심지어는 심민정 또한 그랬으니까.
'기운 나는 말을 해달라는 거겠지.'
아티스트 공통인가?
다른 매니저들은 안 그러는 것 같은데, 나만 유독 이러는 것 같다.
아무튼, 나는 그녀가 바라는 대로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말했다.
“이제 메인 이벤트네요? 아마 관객들도 하연 씨 무대를 제일 기대하고 있었을 거예요.”
“힙합 페스티벌인데요?”
피식 웃으며 묻는 그녀에게, 나는 무슨 문제 있냐는 듯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송하연인데. 지금 국내에서 제일 핫한 가수잖아요.”
그녀는 풉,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웃음 짓는 눈으로 나를 흘겨봤다.
“평소에 다른 분들한테도 다 이렇게 하세요?”
“뭘요?”
“아녜요. 아무튼 한 번 더 부러워지네요.”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스태프 쪽에서 사인이 나왔고, 그녀는 내게 손을 흔들며 바로 무대 위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얼굴이 스크린에 비치자, 격렬하게 함성을 내지르는 관객들.
그녀는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표정과 발걸음으로 무대 중앙에 서서 관객들을 바라봤다.
반주가 흐르기 시작하며 더욱 커지는 환호성에, 그녀의 입가엔 여유로운 미소가 띠워졌다.
여긴 분명 힙합 페스티벌일진데, 그녀는 오늘의 주인공은 자신이라는 것처럼.
그리고 오늘의 이 무대가 자기를 위해 마련된 것이라 말하는 것처럼 무대를 자신의 색깔로 단번에 물들였고.
관객들은 방금 전까지 힙합에 열광했던 게 무색하게도, 어느덧 그녀의 콘서트장 관객들과 한 치도 다를 바 없는 반응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느날 문득 계산해보니 우리 사이 거리는 이 정도. 한 100센치.
이번 미니 앨범의 타이틀곡, ‘100cm’.
역시 대한민국을 휩쓴 노래답게, 관객들의 입에서 떼창이 흘러나왔다.
-어느새 이렇게 가까이 왔지? 난 모르겠어. 내가 왔는지 네가 왔는지 그건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
어깨를 들썩이는 제스쳐 한 번에 팔을 마구 흔들며 호응한다.
그녀의 무대를 보니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역시 송하연이다.
관객들이 열광하는 건 단지 노래가 좋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저 여유 있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 때문일 수도 있다.
힙합 용어로 말하자면 스웨그(Swag), 그리고 끊임없이 노력해서 발전하는 뜻으로도 사용되는 허슬(Hustle).
누가 봐도 반할 만하다.
저런 태도가 요즘 대정들이 가장 좋아하는 트렌드이기도 하고.
‘카리스마 있네. 이러니까 사람들이 뻑이 가지.’
오늘 처음 본 힙합 무대와는 다르게 그녀의 무대는 이미 여러 번 봤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 그녀의 무대가 가장 좋게 느껴졌다.
어떻게 된 게 봐도 봐도 질리지가 않아.
***
비로소 그녀의 무대가 끝이 났지만 우리는 바로 돌아가지 않았다.
마지막 무대가 끝날 때까지 무대 옆에서 같이 보기로 했기 때문에.
그러나, 그런 우리의 곁으로 어느새 많은 아티스트들이 몰려들어 있었다.
“무대 잘 봤어요. 진짜 팬이에요!”
“노래 정말 잘하시네요. 하하! 무대 완전 찢어놓이시던데요?”
“잘 들었습니다. 평소에도 잘 듣고 있어요.”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그런 그들과 함께 말을 섞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호의적인 태도들.
친해지고 싶어하는 게 투명하게 엿보였다.
아마 저들 중에 피처링을 바라는 사람들도 있겠지?
아니, 모두 다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쳐다봤다.
송하연이 잘나가는 모습을 보니 절로 어깨가 으쓱거린다.
내 담당 가수는 아니지만 어쩐지 내 가수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유대가 쌓였으니까.
그러고 있는 와중에 마침 오늘 공연의 마지막 차례가 끝났다.
랩독과 피레인이 속한 크루, ‘새비지’.
앵콜 무대까지 완전히 찢어놓은 그들이 상기된 얼굴로 무대에서 내려오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어쩐지 조금 엉거주춤하는 랩독과, 웃음을 터뜨리며 랩독의 어깨를 툭툭 치는 크루원들.
‘랩독이 송하연 팬이었지?’
송하연도 그 사실을 아는지, 랩독에게 먼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무대 잘 봤어요.”
“아, 네···. 저도 잘 봤습니다.”
크루원이건 아니건, 랩독과 친한 래퍼들은 전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야, 너 말이나 할 수 있겠냐?”
“아이고. 가사는 아주 그냥 세계 제일의 카사노바처럼 쓰더니, 완전 쑥맥이네 이거. 너 여친은 어떻게 사귀었냐?”
“형, 되게 괴로워 보여요. 팬이라면서요.”
“이거 오빠 여자친구분이 보시면 진짜 난리 나겠네.”
랩독은 그런 주변의 반응에 미간을 확 찌푸리며 노려보았지만, 통할 리가 만무했다.
얼마나 안 무섭게 보였으면 심지어 송하연마저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깊은 한숨을 내쉬던 랩독은 자신도 웃긴지 픽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 다른 의도는 아니고 제가 정말 팬이라서요. 어··· 음색도 좋고 감성도 딱 제 스타일이고 하거든요.”
단순히 칭찬을 건네려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는 이 자리에서 바로 제안을 건네기도 조금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대신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희 뒤풀이 하는데 혹시 같이 가실래요?”
다른 이들도 그녀가 뒤풀이에 참석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건지 모두 그녀의 입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녀는 나를 슬쩍 바라보곤 고개를 저었다.
“죄송해요. 제안은 감사한데 선약이 있어서요.”
선약은 없는 걸로 아는데, 그냥 피곤한 모양이다.
아니면 오늘 그녀의 스케줄을 맡은 나를 배려해주는 거거나.
아무리 뒤풀이라지만 그녀를 혼자 보낼 수는 없잖아?
나는 그녀가 뒤풀이에 간다고 하면 끝날 때까지 기다려서 그녀를 집까지 무사히 데려다줬을 것이다.
“아.”
그 거절에 눈에 띄게 실망하는 랩독.
그러나, 그녀의 이어지는 말에 그의 얼굴은 환하게 펴졌다.
“혹시 피처링 원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에 주변에 있던 모두가 깜짝 놀라며 슬슬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혹시 모르니까’에서 ‘나한테도 해줘!’라는 태도로 바뀐 것 같았다.
그녀는 다른 이들이 입을 떼기도 전에, 먼저 내게 물었다.
“실장님, 저 이렇게 피처링 결정해도 괜찮겠죠?”
홱! 나를 돌아보는 래퍼들.
랩독을 비롯한 몇몇의 래퍼들이 나를 알아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저분 아는데··· 하연님 담당 매니저님은 아니지 않아요?”
하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래도 같은 팀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제가 많이 도움받고 의지하는 분이셔서요.”
말은 고마운데, 이런 건 보통 그녀가 혼자 다 결정하지 않나?
최팀장님도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참견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는데.
아니, 그녀의 의사결정을 반대하는 것 자체를 무척이나 조심하시지.
아무튼 나는 래퍼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면서도 궁금한 것에 대해 물었다.
“그런데 하연 씨, 원래 힙합에 피처링 안 하지 않으셨어요?”
시선이 더더욱 따가워지든 말든.
나는 그녀만을 바라봤고, 그녀는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저도 힙합에 관심이 생겼거든요. 최근에.”
< 힙합 좋아하시는구나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