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저분한 걸 잘 못 견디는 성격이라서요 >
영화의 홍보를 위해 <더 BAD>의 주요 출연진들은 오늘 일본으로 출발한다.
당연히 나 또한 마찬가지.
2박 3일의 짧은 일정이지만 이미 스케줄은 빡빡하게 잡혀 있었다.
“짐은 다 잘 쌌지?”
채희의 집에 들어오며 물었다.
거실에 떡하니 캐리어 두 개가 놓여 있었으나 안에 뭐가 들었을지 모르니까.
내 물음에 채희는 한껏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번 헌만사 때 일본 갔었잖아요. 이제 저도 아무것도 모르는 신인은 아니거든요?”
그래, 처음 가는 것도 아닌데 어련히 잘 싸놨겠지.
짐을 제대로 싸지 못 했을까 봐, 이곳에 여유 있게 왔기 때문에 아직 출발 시간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난 거실 소파로 가기 전, 방 안에서 머리를 말리고 있는 그녀를 흘끗 봤다.
목에 걸린 목걸이에 시선이 절로 가는 게, 선물해준 입장에선 어쩔 수가 없나 보다.
난 뿌듯한 마음으로 소파에 앉아 TV를 틀었다.
그리고 음악 채널에 맞춰진 TV엔 랩 오디션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난 혹시나 인재가 있나 유심히 살펴봤지만, 역시 인재가 그리 쉽게 찾아지는 게 아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저 심사위원석에 앉아 있는 래퍼들보다 현격히 모자란 재능.
‘그러고 보니, 이번에 하연 씨가 힙합 페스티벌에 초청받았다고 했지?’
국내 최대의 힙합 축제.
힙합 축제라고 하여 꼭 래퍼들만 나오지는 않는다.
락 페스티벌에 락 아티스트만 나오지 않듯이.
송하연이 앨범을 만드는 데 있어 한창 난관에 부딪히고 있었을 때, 나는 타이틀곡의 구성을 수정해주며 랩을 넣어보라 한 적이 있었다.
그 앨범을 발매했을 때, 그녀의 랩을 처음 들어본 팬들이나 대중들이 우스갯소리로 국힙 원탑이라며 떠들고 다녔고.
힙합 팬들도 유쾌하게 받아들이기도 했다.
이번 힙합 페스티벌에 초청된 건, 지금 최고로 잘나가고 있다는 점도 그렇지만, 그때 있던 사소한 접점이 있기 때문이기도 할 터.
‘나도 한 번 따라가볼까?’
바쁘지만 않다면 따라가보고 싶기도 하다.
메이저 음악의 장르를 가리지 않는 컨텐츠 덕후로서의 욕망.
더군다나, 매니저 일을 하며 힙합과 연관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완전히 관객의 입장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방에서 들리는 헤어 드라이기 소리와 TV에서 나오는 래퍼의 랩을 배경 삼아 들으며, 일정을 확인했고.
다행히 그날의 일정은 뺄 수 있을 듯했다.
‘같이 갈 수 있냐고 물어봐야지.’
난 곧장 최팀장님과 송하연에게 톡으로 물어봤고, 바로 OK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머리를 다 말린 그녀가 손에 드라이기를 들고 나오더니, 눈을 굴리며 슬쩍 내 눈치를 봤다.
대체 뭐하려고 그러나 싶어 가만히 보고 있었는데, 캐리어 지퍼를 열어 드라이기를 집어넣는다.
딴에는 자연스럽게 하고 싶었나 본데, 그게 먹힐 리가 있나.
“드라이기는 왜 싸?”
“···저번에 묵었던 호텔 드라이기는 엄청 약했잖아요. 이번에도 그럴 수도 있으니까. 까먹은 게 아니라 원래 지금까지 쓰고 넣으려 했어요.”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의 옆으로 가 앉았다.
“캐리어 열어보자.”
“그럴까요? 이미 프로답게 완벽하게 쌌는데 또 혹시 모르는 거니까?”
그래, 어련하시겠어.
나는 결국 그 안에서 1/3 정도를 빼내고 다시 1/3 정도를 다른 걸로 채워 넣어야만 했다.
“빨리 가자. 늦겠다.”
여유로웠던 시간은 어느새 촉박하게 다가와 있었다.
***
일본에서 정채희는 광고를 찍은 맥주 브랜드의 매출 순위를 압도적 1위로 만들기도 했고.
청바지 매진 대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한국에서 1000만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 돌아왔다.
한국에서의 인기는 일본에서도 영향이 가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때의 인기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건지.
인천공항에서 마주했던 커다란 인파보다, 우리는 일본에서 더욱 커다란 인파를 마주해야만 했다.
“채희! 정채희!”
“와아아아!”
“꺄악! 언니! 채희 언니!”
우리는 가까스로 차에 몸을 실었는데.
잔뜩 촉각을 곤두세웠던 나와 달리, 팬들의 거대한 환호에 그저 흥분되기만 하는 모양이다.
양쪽 볼에 홍조가 돌고 있고, 입가엔 미소가 걸려 있다.
난 늘어지는 한숨을 후우, 내뱉으며 말했다.
“다른 분들도 이제 천천히 도착한다고 하는데, 내일 점심 스케줄 때까지는 만날 일 없을 거야. 그러니까 오늘은 어디 가서 뭐 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방에 가만히 박혀서 푹 쉬기나 하자.”
“저 놀자고 안 했는데요?”
“그러니까 방에서 쉬기나 하자고.”
“저 놀자고 안 했다니까요?”
기운도 좋다.
난 대충 손을 휘젓고는 현지의 스탭과 숙식이나 스케줄에 대해 다시 얘기했다.
옆에서 할 말이 있다는 듯 입을 뻐끔대고 있는 채희를 못 본 척하고.
그런데, 역시나.
스케줄에 대하 얘기가 거의 다 끝나갈 때쯤.
채희는 불쑥 끼어들며 말했다.
“오늘은 놀자고 안 했는데, 내일은 괜찮지 않아요? 저녁 스케줄도 8시에 끝나니까 딱 좋을 것 같은데, 안 그래요?”
왜 그러는지는 몰라도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말하는 그녀.
머릿속에 ‘고개를 끄덕여라’라는 생각이 들어있다는 게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난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줬다.
천만 영화를 찍었는데 그 정도도 못 하게 하랴.
“그래, 내일 저녁에 나가서 신나게 놀자.”
얼굴을 가린다고 해도 이미 들켰던 경험이 있다만, 그래도 그거 무서워서 아무것도 못 하게 할 수는 없지.
어쩌면 이런 것 또한 경험이 될 수도 있고.
***
인터뷰와 인터뷰와 또다시 인터뷰.
채희와 박송이, 그리고 주요 출연진들은 거의 하루종일 인터뷰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렇게 인터뷰만 하면 지칠 법도 한데, 얼마간 푹 쉰 게 효과가 있었는지 오후 스케줄까지 모두 끝낸 채희는 여전히 활기 넘치기만 했다.
반면, 옆에 있는 박송이는 진이 다 빠진 듯한 얼굴이었지만.
“시라송이 씨는 왜 여기 있어요?”
“···제가 그렇게 부르지 말랬죠, 겉바속촉 씨.”
난 어깨를 으쓱이며 그 옆에 있는 매니저를 바라봤다.
그는 머쓱하게 웃으며 박송이에게 물었던 질문에 대신 답했다.
“채희 씨 오늘 놀기로 했다면서요. 송이한테 같이 가자고 했나 봐요.”
채희는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네, 같이 놀면 좋잖아요.”
글쎄, 별로 좋아 보이는 표정은 아닌 것 같았다.
거의 억지로 끌려 나온 것 같은 얼굴.
채희는 눈매를 좁히며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아니면 뭐··· 저랑 단둘이 하는 데이트를 기대하고 있었다거나···.”
난 곧장 박송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환영해요. 같이 재밌게 놀아요, 송이 씨.”
그녀는 내 악수 요청을 모른 척했고, 나는 손의 방향을 옮겨 그녀의 매니저와 악수했다.
아무튼 우리는 외출의 채비를 갖추며 호텔을 나섰다.
모자와 마스크, 그리고 평소와는 다른 헤어 스타일.
선글라스까지 끼고 나오면 오히려 시선을 집중시킬 수 있으니, 이게 그나마 최선이었다.
옷도 후줄근하게 입고 나오면 좋은데, 애초에 후줄근한 옷을 들고 오지도 않았으니 어림없는 소리.
우리는 가장 유동인구가 많은 번화가로 나왔고, 식당이 밀집된 거리를 거닐었다.
한창을 채희에게 시달리던 박송이는 채희가 가게들을 보느라 정신이 없을 때, 슬쩍 내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쟤 다음 작품은 뭐 하기로 했어요?”
그녀를 쳐다보니, 뭐 못 할 질문이라도 했냐는 듯이 날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요, 이번에도 같이 하시려고요?”
“이왕이면요. 그쪽 안목도 이제 믿을 만하고, 쟤랑 연기하는 것도 재밌기도 하고.”
이렇게 당당한 태도로 솔직하게 다 털어놓으면 할 말 없지.
나 또한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직 계획 없어요. 지금은 쉬는 중이라서. 그리고 채희한테 어울리는 작품 찾았다고 해도, 그 작품에 송이 씨한테 어울리는 역할이 없을 수도 있어요.”
“누가 무조건 꼭 같이 해야겠대요? 그냥 고려해보겠다는 거지.”
대화를 나누던 우리 사이로 채희가 쑥 들어왔다.
그러면서 앞에 있는 가게를 가리켰다.
“저거 어때요? 튀김우동!”
가게를 흘깃 봤는데, 안에 사람들이 많다.
애초에 사람이 없는 가게로 가려면 이런 번화가에 오지도 않았을 테지만, 그래도 저긴 너무 많은데?
“···동물원 속의 동물 되겠네, 또.”
푹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박송이.
나 역시 다시 긴장을 잔뜩 짊어먹기는 좀 피곤했기에 다른 대안을 내놓았다.
“그럼 지금은 대충 간식만 먹고 돌아갈 때 저거 포장해서 가자.”
“아, 그러네요? 그게 좋겠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동안 밖을 돌아다녔고, 다시 호텔로 돌아갈 때는 양손이 모두 무거워져 있었다.
음식만 포장한 게 아니라, 옷도 사고 기념품도 사고 여러 가지를 샀거든.
“저희 오늘 첩보 영화 찍은 것 같지 않아요? 진짜로 저 이런 거 찍으면 잘할 것 같은데. 액션도 막 팍팍! 이러면서. 그쵸?”
다 같이 방에 들어온 뒤, 채희가 날을 세운 손으로 허공을 휘적거리며 말했고.
이어지는 박송이의 말은 내 속마음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다.
“너 첩보 영화 찍으면 그거 망해. 완전히 폭삭.”
물론 어떤 시나리오냐에 따라, 또 어떻게 훈련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단 지금은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긴 했다.
‘얘가 액션은 무슨···.’
아무리 생각해봐도 헛웃음만 나오지 않는가.
***
일본에서 바로 중국으로, 중국에서 바로 다른 나라로.
이런 식으로 움직이는 빡빡한 스케줄은 아니었다.
영화를 개봉하는 나라들을 전부 다 돌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우리는 일본 스케줄을 마치고 다시 귀국했고.
힙합 페스티벌에 참여하는 송하연의 스케줄에 맞춰 아침 일찍 그녀를 데리러 올 수 있었다.
‘이렇게 공식적으로 스케줄 같이 하는 건 처음이네.’
‘K-Concert 도쿄’에선 유현지와 스케줄이 겹치는 부분이 있어 함께 다니기도 하고, 그녀의 콘서트나 음방도 몇 번 같이 하기도 했는데.
이렇게 현지 없이 그녀의 스케줄을 하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나는 주차장에서 내리기 전에, 잘 도착했다고 알리기 위해 최팀장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송하연의 노래가 컬러링으로 울리고 있을 뿐, 전화를 받지 않는다.
“바쁘신가?”
원래 실장이 이렇게 자잘한 걸 보고할 직급이 아니긴 한데, 그래도 송하연을 픽업하는 건 처음이라서 말씀드리려는 거였다.
뭐, 안 받아도 딱히 상관은 없었기에 나는 톡으로 대신하기로 했다.
-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 일찍 와서 여유 시간은 충분할 것 같아요.
그렇게 톡을 보내고 그녀가 알려준 집으로 올라가서 벨을 눌렀다.
그런데, 벨이 울리는 소리만이 들릴 뿐, 문이 열리지 않는다.
다시 한번 누를까 말까 고민하고 있던 찰나.
도어락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문이 벌컥 열렸다.
“안녕하세요, 하연 씨. 근데... 제가 너무 일찍 왔나요?”
안에서 뭘 하고 있었는지 얼굴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그녀는 내 물음에 땀을 닦으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아뇨, 플랭크 중이었는데 딱 끝날 때 오셨어요. 들어오세요.”
현관에 들어서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가는데.
집이 광채가 날 정도로 깔끔하고, 은은하고 산뜻한 라벤더 향이 코 끝에 맴돌았다.
“예능에서 보긴 했는데 평소에도 되게 깔끔하게 사시나 봐요.”
“네. 지저분한 걸 잘 못 견디는 성격이라서요. 조금 유난스러운 편이긴 해요.”
내게 거실 소파에 앉으라고 한 그녀가 물었다.
“음료 드릴까요? 홍차, 커피, 알로에 주스, 오렌지 주스 있는데.”
“알로에 먹을게요.”
씩, 웃은 그녀가 부엌으로 가더니, 주스와 함께 크리스탈 컵을 갖고 왔다.
“모자라면 더 드시고 심심하면 편하게 TV라도 보세요. 전 샤워 좀 해야 할 것 같아요.”
“네, 알겠어요.”
어차피 여유 시간도 많으니, 보챌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나보다 스케줄에 더 민감할 테니, 나갈 준비도 제 시간에 끝내겠지.
그렇게 그녀가 샤워를 하러 들어갔을 때.
마침 핸드폰에 진동이 울리며 최팀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예, 팀장님.”
-집에 도착했어?
“네. 들어왔습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팀장님이 이어서 말했다.
-···아무 말도 안 했지?
“네? 무슨 말이요?”
-하연이 집이 솔직히 좀··· 더럽긴 하잖아. 여기저기 막 어질러져 있고. 그거 지적 안 했으면 됐어. 장난식으로라도 뭐라고 하지 마. 전에 한 번 장난으로 웃으면서 뭐라고 했다가··· 하루종일 끔찍했거든. 그리고 알아서 잘하겠지만 다른 데 가서 집이 이렇다 저렇다 말하지 말고. 로드 매니저들도 입단속 철저하게 시키고 있으니까. 알았지?
내 눈에는 깔끔함을 넘어 광채가 나는 집만 보이고 있었고.
코에는 라벤더 향이 머물고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허구헌 날 갔었던 작업실은 항상 조금 어질러져 있었고 깔끔한 편이 아니긴 했는데.
그게 꼭 작업에 집중하느라 그런 건 아니었나 보다.
< 지저분한 걸 잘 못 견디는 성격이라서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