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하산이 천재매니저였다고-33화 (33/170)

< 성장 >

공식적인 연습 시간이 모두 끝나고도 몇 시간 뒤.

대부분의 연습생들이 개인연습까지 마치고 돌아갔을 때에도, 유현지는 연습실에 남아 연습을 이어갔다.

실력이 늘고 있는 게 확연하게 느껴져서.

그 느낌이 너무 중독적이라 연습을 멈출 수 없었다.

또한 오늘 늦게라도 매니저님이 올 거라고 말씀하시기도 했고.

“하아. 하아.”

체력이 완전히 고갈났을 때가 되어서야 유현지는 연습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어차피 만날 사람이 있어서 집에 안 갈 거긴 하지만, 설령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지금 당장은 집에 돌아갈 힘도 없었다.

‘오늘이 데뷔하는 날이었지?’

불과 몇 달 전까지 자신이 몸 담았던 YU엔터의 신인 걸그룹 ‘샴페인 노바’의 데뷔.

꿈을 접었을 때도, 막상 그날이 오면 뭔가 착잡할 것 같다고 막연히 생각했었는데.

이상하게도, 꿈을 다시 키우고 있는 지금이 오히려 더 마음 편하게 응원하며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유튜브에 들어가서 ‘샴페인 노바’를 검색해보니 그녀들의 뮤직 비디오가 올라와 있었다.

제목은 ‘Brighten’.

현지는 바로 뮤비를 틀었고, 뮤비를 보는 내내 입가에 미소를 띨 수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봐온 익숙한 얼굴들이 마침내 꿈을 이룬 것을 보니 기분이 좋아서.

비록 연습생 시절엔 서로 견제하고 치열하게 경쟁했었으나, 데뷔조에서 탈락했을 때는 그런 자신을 꼭 껴안아주던 그녀들.

현지는 그녀들에게 각각 잘 봤다는 응원의 톡을 보냈다.

물론 답장이 바로 오지 않을 수도 있고, 아예 오지 않을 수도 있다.

바쁘거나 아니면 회사에서 관리하고 있을 테니.

유현지는 그녀들에게 답장이 오지 않는다고 해도 서운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런 것보다 훨씬 더 기다려졌던 사람이 이제 막 도착하기도 했으니까.

“죄송해요, 제가 너무 늦었죠?”

주차장에서 여기까지 빠르게 달려왔는지 숨을 거칠게 쉬며 말하는 매니저.

유현지는 진동이 울리는 핸드폰을 보지도 않고 주머니에 넣으며 대답했다.

“아뇨, 안 늦으셨어요.”

***

이미 섭외된 장소에서 트러블이 발생하는 건 이 업계에서는 매우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문제는 그게 유현지와 약속이 잡힌 오늘이었다는 것.

나는 그녀에게 처음 말했던 시간보다 한참을 더 늦은 지금에서야 이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물론, 늦어질 거라는 것도 미리 말했었고, 많이 늦어질 거라 예상됐을 땐 그냥 다음에 보여달라 했었지만.

그녀는 계속 기다리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내가 연습실에 들어왔을 때 처음으로 나를 맞이한 건, 그녀의 땀과 숨결로 후끈하게 뎁혀진 공기.

그리고 바로 화장기 하나 없이 깨끗한 유현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연습을 대체 얼마나 한 거야?’

분명 오래 기다려야 했을 텐데.

그녀는 방금 전까지도 연습을 한 것 같았다.

뎁혀진 공기가 그러했고, 연습복이나 얼굴에서도 아직 땀이 마르지 않았다.

“아뇨, 안 늦으셨어요.”

그녀는 내게 말하며 바닥에 앉은 몸을 일으켰다.

미리 말했다곤 해도 많이 늦었는데.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다는 듯, 깨끗하고 맑은 얼굴로 순박하게 미소 지었다.

“저 근데 지금은 조금 지쳐서 잠깐만 쉬었다가 보여드려도 괜찮을까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하죠. 이렇게 바닥에 앉지 말고 아예 소파에 누우셔서 눈 좀 붙이셔도 돼요.”

“아니에요. 일하고 오시느라 많이 힘드셨을 텐데 시간 끌어서 죄송해요.”

“아뇨, 제가 죄송하죠. 기다려주셔서 감사해요.”

우리는 서로 미안해하고 감사해하고 있었다.

채희나 다른 사람이 보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나도 이런 내가 잘 적응이 되지 않는다.

내 자신도 이렇게 예의 바르고 남을 먼저 생각하는 모습이 어색해서 괜시리 옆구리가 근질거릴 정도였다.

‘그런데 뭐 어쩌겠어.’

유현지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데.

이런 사람한테 어떻게 장난으로라도 함부로 대하겠냐고.

나는 날개 없는 천사와 함께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그녀에게는 참 묘한 힘이 있었다.

나도 내가 어색할 지경인데, 그게 썩 나쁜 느낌은 아니었고 불편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평화롭고 편안해진다.

정말 이상하지.

이런 의문이 담긴 시선을 받고는,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실 말씀 있으세요?”

“아니에요. 그보다 영상 보니까 실력이 갑자기··· 늘었던데 무슨 깨달음이라도 있었어요?”

1분 30초짜리의 동영상.

그건 보통의 방송댄스를 추는 연습 영상이었고.

영상에서는 내가 그녀에게 지적했던 부분들이, 내가 말했던 장점으로 완전히 뒤덮여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걸 보고는 도무지 내 눈을 믿을 수 없어 여러번이나 돌려봐야만 했다.

내 안목을 내가 의심할 정도로 말이 안 되는 발전속도.

그러니 몸이 근질거리지 않고 배기겠는가.

영상으로 이미 지금의 그녀의 레벨에 대한 걸 확실하게 판단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렇게 이곳으로 달려왔다.

다른 춤을 추는 모습도 보고 싶어서.

그리고 직접 두 눈으로 담고 싶어서.

“깨달음이요?”

유현지는 똘망똘망한 눈으로 되물었다.

“매니저님이 다 알려주셨잖아요. 하나부터 열까지 다요.”

“아니, 그래도···.”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역시 천재라 이건가.

그녀의 재능은 이미 진작에 알아봤음에도 바로 옆에서 변하는 걸 목도하니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진짜··· 너무 고맙네.’

촬영 중간에 봤던 ‘샴페인 노바’의 뮤직 비디오.

비록 그쪽에서 의도한 바는 아니었을지라도 나는 YU엔터에 빚을 진 거나 다름없었다.

아니 어떻게 이런 복덩이를 이렇게 바닥에 내다버릴 수가 있을까.

내게는 그들이 세계 제일의 대인배였다.

나 같이 좋은 걸 다 가지고 싶은 욕심쟁이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그렇게 10분 정도가 더 흐르고.

그녀는 소파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이제 충분히 쉰 것 같은데, 지금 보여드려도 될까요?”

“네. 그런데 혹시···.”

“네?”

“이왕이면 아까 영상으로 보내준 거랑 다른 춤 보여주실 수 있어요?”

내 작은 부탁에, 그녀는 나지막한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네, 알겠어요.”

그녀가 컴퓨터로 곡을 고른 뒤에 연습실 중앙에 섰고.

나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는, 그녀가 고른 음악을 틀었다.

곡은 불과 얼마 전까지 송하연과 차트에서 경쟁을 벌였던 남자 아이돌 그룹의 곡.

여리고 세고, 아무튼 거칠면서도 난이도가 무척이나 높은 곡이었다.

상대적으로 근력이 약한 여자로서는 제대로 소화하기가 쉽지 않은.

음악이 흐르기 시작하며, 나는 영상으로 봤던 그 움직임을 직접 두 눈으로 지켜볼 수 있었다.

숨결까지 느낄 수 있는 생생함.

나는 그녀의 작은 몸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박력에, 목 뒤의 솜털이 곤두섰다.

‘지적했던 부분부터 보려고 했는데.’

어째, 내가 말했던 그녀의 장점이 먼저 눈에 띈다.

그녀가 확실히 장점을 자각하게 됨으로써 이를 더 잘 사용할 수 있게 된 걸까?

모든 움직임이 쫀쫀하게 이어지고, 탄력적이면서도 부드러웠다.

그리고 이때쯤.

내가 지적했던 부분들이 왜 눈에 띄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단점을 지워내면서도, 그 부분에 장점을 덧씌웠거든.

등, 어깨, 골반, 무릎, 발끝.

움직임 하나하나는 유연하면서도 임팩트가 있었고.

탄탄한 복근에서 나오는 힘이 모든 움직임에 영향을 주며 보다 더 매끄럽고 강렬한 느낌을 만들어냈다.

유현지의 단단한 눈빛이 거울이 아닌 나를 향했다.

언제나 순하고, 때로는 맹해 보이기까지 하는 눈빛이었는데, 지금은 그 무엇보다 단단하면서도 그 안에 무언가가 번들거리며 일렁이고 있었다.

‘아이솔레이션, 각, 표정, 눈빛도 그렇고··· 뭐 하나 부족한 게 없네.’

내 입이 살며시 벌어졌다.

그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에 벼락이 마구 떨어져 내린다.

지금 내 눈앞에서는, 당장 데뷔해도 손색이 없는 수준을 넘어, 자기만의 뚜렷한 색깔을 가진 훌륭한 아티스트의 무대가 펼쳐지고 있었다.

솔로 퀸이라는 타이틀이 코앞에 있는 송하연에게는 미안하게 됐지만.

솔로 퀸은 얼마 안 가 유현지가 차지할 것이 자명해 보였다.

유현지가 데뷔만 한다면.

그리고.

내가 노래만 좀 더 만져준다면.

“하아. 하아.”

이 춤이 난이도가 높기로 유명하다 보니, 그녀도 힘이 드는 모양이다.

한 번 추고서는 숨을 크게 헐떡거리고 있다.

그럴 만도 하지.

난이도는 둘째 치고 그렇게 눈이 홀릴 만한 춤사위를 선보였으니까.

그녀는 숨을 몰아쉬면서도 시선은 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입으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내가 어떻게 봤는지를 묻고 있는 거였다.

나는 저 단단한 눈빛을 똑바로 마주하며 말했다.

“이런 퍼포먼스를 혼자 본다는 게··· 너무 아쉬우면서도 영광스러울 정도였어요. 정말 좋았습니다.”

“고쳐야 할 부분이 있을까요?”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전혀. 단 한 군데도 없습니다.”

내 확고한 어조를 듣고, 그녀의 얼굴이 비로소 부드럽게 풀렸다.

단단한 눈빛은 다시 순하게 바뀌었고, 입가에는 순박하고 순수한 미소가 걸렸다.

“댄스는 이 정도로 차고 넘치니까, 이제 다음엔 노래로 넘어가요.”

“네.”

오늘은 말고.

오늘은 이걸로 충분했다.

상당히 지쳤을 텐데 오늘 바로 노래까지 시키면 그건 너무 무리하게 만드는 거지.

게다가 컨디션도 안 좋아서 제대로 나오지도 않을 거고.

잠시 숨을 고른 뒤, 우린 함께 연습실을 나왔다.

달이 뜬 밤에 서늘한 공기가 우리의 뜨거웠던 몸을 시원하게 식혀주었다.

“집까지 바래다줄게요.”

“감사합니다.”

우리는 차에 올라타서 그녀의 집 쪽으로 향했고.

가는 동안 우리는 이것저것 사소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영화는 뭘 재밌게 봤는지, 음식은 뭘 좋아하는지, 예능은 또 뭘 좋아하는지 등등.

“바래다주셔서 감사합니다. 매니저님도 잘 들어가셔서 안녕히 주무세요.”

차에서 내린 그녀가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고 집으로 들어갔을 때.

나는 우리가 좀 더 가까워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

드디어 오늘 마지막 촬영의 날이 밝았다.

종방연은 마지막회가 방송된 다음에 하기로 했으니, 스텝들이나 배우들 모두 마지막으로 열정을 불사지르며 몸을 아끼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채희만이 좀 다른 모습이다.

아쉽기라도 한 걸까? 표정이 사뭇 비장하기까지 하다.

마지막 촬영인 만큼, 나와 한실장님, 그리고 윤팀장님까지 모두 함께 왔는데.

분위기가 좋은 촬영장에서 이곳만 동떨어진 듯 우중충하기 짝이 없었다.

“야, 대체 뭐가 문젠데 그래?”

이렇게 대놓고 물어도, 채희는 그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아낄 뿐이었다.

이러니 내 속이 오죽 답답할까.

얘가 뭐 때문에 속을 끓이고 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으니,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혀를 짧게 찰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채희가 연기하는 오늘의 첫 번째 씬이 시작될 때.

우리는 채희가 어째서 그렇게 비장한 얼굴로 무게를 잡고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대본을 내려놓고 간이 의자에서 일어서며,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설마 이제 와서 주문이라도 외우나 싶었는데, 그녀의 입에서 나온 건 예의 그 주문이 아니었다.

나오리라고는 전혀 예상치도 못했으며, 듣자마자 내 가슴을 졸이게 만드는 말.

“오빠, 저 촬영할 때 동안 잠깐 차에 들어가 있으실래요?”

“···!”

“···!”

“···!”

우리가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을 때.

채희는 각오 어린 표정으로, 그러나 흔들리는 눈빛으로 말을 덧붙였다.

“대신 제가 부르면 바로 나와주셔야 돼요. 알겠죠?”

목소리까지 살짝 떨리고 있었다.

‘이런 상태로 무슨 연기를 하겠다고···.’

하지만 불안하다고 해서 거절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오려 하고 있으니.

나도 적극적으로 협조해줘야 마땅하지 않겠나.

나는 그녀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안 불러도 너무 위태위태하면 바로 나올 테니까, 떨지 말고 똑바로 해. 알았지? 여기 있는 사람들은 네가 무슨 연기를 해도 다 좋아해줄 사람들이니까 절대 겁먹지 말고.”

“네,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한 번 해볼게요. 열심히. 최선을 다할 거예요.”

나는 뒤돌아서 무거운 발걸음을 떼었다.

그녀는 나를 볼 수 없지만, 나는 그녀가 보이는 곳으로.

< 성장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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