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하산이 천재매니저였다고-28화 (28/170)

< 매니저님 저 계약했어요 >

4회의 그 씬이 있고 나서, 촬영장엔 더욱더 활기가 돌았다.

이미 작품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던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보다 더 열심히 하기 시작한 것.

그리고 이는 나와 채희 역시 마찬가지였다.

5회부터 비중이 늘어나 주연에 버금가는 분량을 차지하게 됐으니 더욱 바빠졌다.

우리는 그야말로 촬영과 연습으로만 꽉꽉 채워진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가 6회의 촬영까지 마쳤을 때.

송하연이 출연한 <레전드를 노래하라>가 방영되었다.

“반응 빠르네.”

역시 대중들한테 인기 있는 프로그램.

방송이 끝나자마자 기사와 SNS, 커뮤니티가 북적거리고 있었다.

대부분의 화제를 차지한 건 다름아닌 송하연의 무대.

잠시 주춤거리며 차트에서의 순위가 약간 내려앉고 있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쭈욱 치고 올라가고 있었다.

“잘하면 오늘 1위 찍을 수도 있겠는데?”

언젠가부터 그녀를 따라다니기 시작한 ‘차세대 솔로 퀸’이라는 수식어.

이는 곧, 아직 솔로 퀸이 되지 못했다는 뜻이었는데.

송하연이 아직 음원 차트 1위를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대중적인 음악을 냈지만 송하연이라는 가수가 대중들의 선택을 받지는 못했었으니까.

그런데 오늘 보여준 이 무대는 방송을 본 대중들로 하여금, 선택을 강요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었다.

그렇게 마침내, 두 시간이 더 흘렀을 때.

1. 송하연 – Bring Me

그녀의 생애 처음으로, 음원차트 1위라는 업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레전드를 노래하라’에서 역대급 무대를 보여준 송하연! 첫 차트 1위!]

[차세대 솔로 퀸 송하연, 이제 진정한 솔로 퀸 되나?]

[송하연 차트 1위에 팬들 “당연한 것!”, 자부심 넘쳐!]

“기분 묘하네.”

내가 그녀를 담당하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이번 앨범에 내가 개입한 부분은 그리 작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헤매고 있는 그녀에게 길을 찾아주었고, 타이틀 곡 역시 내 입김이 듬뿍 들어갔으니까.

나 아니었으면 랩도 없었지.

“···음.”

나는 차트를 묘한 기분으로 바라보다가 그녀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지금쯤이면 아마 뛸 듯이 기뻐하고 있겠지?

그런데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내 핸드폰이 지이잉- 진동을 울렸다.

“여보세요.”

-매니저님! 저 1등했어요!

숨길 수 없는 환희가 핸드폰을 타고 내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내 입가에도 절로 미소가 맺혔다.

“축하드립니다. 무대하는 것도 정말 잘 봤어요.”

-저 매니저님한테 너무 감사하고 있는 거 아시죠? 제가 선물해드리고 싶은데 갖고 싶은 거 있으세요?

“네? 아뇨, 선물은 괜찮습니다. 제가 뭐 별로 한 것도 없는데요.”

나는 마음에도 없는 겸양의 말을 내뱉었고, 그녀는 부득불 선물을 준다고 하며 내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었다.

“그럼 어쩔 수 없죠. 아무거나 괜찮으니까 값 안 나가는 걸로 주세요.”

그렇게 전화를 끊고 한 시간 뒤.

차트 순위는 아쉽게도 2위로 떨어지고 말았다.

보이그룹의 대형 팬덤이 힘을 엄청나게 쥐어짜냈거든.

‘다음 앨범은 오랫동안 1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때는 아마 지금보다 그녀에게 더욱 잘 어울리는 앨범을 낼 수 있겠지.

작업 초기부터 나한테 도움을 요청한다면 말이다.

***

다음날 바로.

나는 송하연을 회사에서 만날 수 있었다.

한 시간 동안 1위를 하고 바로 2위로 내려갔었지만 송하연의 기분은 무척이나 좋아 보였다.

어제부터 그녀의 톡 프로필 사진엔 1위를 한 캡쳐 화면이 올라와 있었고.

이렇게 싱글벙글 웃음이 마르지를 않지 않은가.

“도움 많이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저 이제 1위 가수 됐어요!”

내게 사인 CD 전집과 그녀의 사진이 그려진 핸드폰 케이스, 그리고 갖가지 굿즈가 모두 담긴 작은 박스를 건네며 말했다.

이런 선물을 바란 건 아니었는데··· 어쨌건 내가 그녀의 팬인 것도 맞으니 그냥 기분 좋게 받기로 했다.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아직도 화제가 전혀 안 죽었던데요?”

1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뒤에 서있는 최실장님의 표정은 영 떨떠름해 보였다.

다른 팀 소속인 나에게 선물을 주고 있는 걸 봐서 그런가 보다.

송하연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와 엄청나게 다르기도 하고.

“감사해요. 그리고 어제 방송 때문에 저 스케줄 엄청 들어왔어요. 지금도 잠깐 시간 내서 온 거라 바로 가봐야 돼요.”

내 손에 들린 작은 박스의 무게가 좀 더 무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이것 때문에 바쁜 와중에 짬을 내서 온 거라고 하니, 내 속에서 가치가 더 높아진 덕이다.

역시 성공한 사람이라 그런지 선물을 할 줄 안다니까?

택배로 보냈으면 쩝, 입맛을 다시고 말았을 텐데.

나는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선물 정말 잘 받겠습니다.”

그녀와 몇 마디 좋은 얘기들을 더 주고받고 인사까지 했는데, 퍼뜩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있어 그녀를 불렀다.

“아, 하연 씨.”

“네?”

“그럼 이번 앨범 활동은 언제까지 하시는 건가요? 음방이라든가 행사라든가.”

“활동이요? 제의는 많이 들어오기는 했는데, 이젠 광고나 화보, 예능 위주로 하려고요. 음방은 이번주까지만 하고요.”

음방은 이번주까지.

나는 머릿속에 그 정보를 단단히 새겨두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이번주만 지나면, 유현지와 계약을 할 수 있게 됐다.

“알겠어요. 이번주 음방 무대도 잘 볼게요.”

“네!”

나는 박스를 들고 퇴근길에 올랐다.

이 박스는 채희가 볼 수 없게 집에 고이 모셔두어야겠다.

핸드폰 케이스도 그렇고 당장 내가 쓸 수는 없겠지만, 아무튼 가수 본인에게 이런 선물을 받아서 기분만큼은 굉장히 산뜻했다.

***

일주일이 굉장히 더디게 지나갔다.

거의 매일마다 촬영 일정이 있었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이 빠르게 느껴져야 정상이거늘, 유현지의 계약을 기다리고 있기도 하여 굉장히 더디게 느껴지는 듯했다.

아무튼 오늘은 드디어 유현지가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날.

나는 채희의 스케줄 시간 전에 미리 집 밖으로 나가, 회사에서 조금 떨어진 카페에서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카페에 들어온 그녀가 내가 기다리고 있던 테이블 앞으로 와서 인사했다.

허리를 다소곳하게 숙이며 인사하는 그녀의 모습은 평소 내가 봐온 모습과는 아주 많이 달랐다.

그녀와 마주칠 때면 언제나 댄스 연습을 하러 왔던 때였기 때문에, 항상 트레이닝복 아니면 딱 달라붙는 옷들이었는데.

지금은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고선 청순미를 뽐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자리에 앉으세요.”

나는 그녀의 미소를 보며 마주 인사했다.

옷차림과는 다르게, 미소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너무 순하고 순해서 마주한 사람의 마음까지 편안하게 만드는 미소.

“현지 씨는 어떤 음료 좋아하세요?”

“따뜻한 녹차라떼 좋아해요.”

왠지 모르게 음료의 선호 역시 그녀의 이미지와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느낌이다.

채희는 맥주, 유현지는 따뜻한 녹차라떼.

그리고 송하연은 아이스 아메리카노였지, 아마?

작업실이나 연습실에서 봤을 때 그녀는 평소에 카페인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는 듯했다.

아무튼.

나는 내 음료인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그녀의 음료인 따뜻한 녹차라떼를 주문해서 받아왔다.

사실 회사에서 만나는 게 가장 좋을 테지만, 회사와 좀 떨어진 이 카페까지 온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신입 로드 매니저인 내가 그녀의 계약 장소에 있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좀 이상하게 보일 테니까.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계약하시면 현지 씨 매니저는 제가 담당하게 될 거예요. 그건 괜찮으세요?”

“네, 좋아요.”

“원래 연습생들한테는 매니저가 안 붙어서 당분간은 공식적인 매니저가 아니겠지만 그래도 현지 씨는 저를 매니저라고 생각하시고 뭐든 편하게 말씀해주시면 되세요.”

“네, 알겠어요.”

“제가 연습실에 수시로 들려서 장점이랑 보완해야 할 부분 같은 건 계속 말씀드릴게요.”

“네.”

그녀는 내가 말하는 족족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처음에 신인개발팀에서 계약을 실패한 걸로 봐서는, 거절을 못하는 성격은 아닐 테고.

그냥 내가 믿음이 가는 모양이다.

다행히.

이것도 송하연 덕분이겠지? 내가 도와준 앨범의 성적이 잘 나오고 있고, 그녀가 내게 대하는 태도가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와는 많이 다른 걸 봤을 테니까.

내게는 잘 된 일이다.

그녀가 내 말을 신뢰하고 따라줄수록 그녀의 재능이 개화하는 시기는 더욱 빨라질 수 있으니.

나는 그녀와 그리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많은 얘기를 나누고 마지막으로 말했다.

“약속 지켜주셔서 고마워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현지 씨.”

“저도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정식 계약은 이제 회사에 가서 해야 하지만, 그녀와 나는 이 자리에서 이미 계약을 마친 것과 다름없었다.

회사에서의 계약 조건도 최상으로 해달라고 했으니 문제가 될 것도 없을 테고.

‘그럼 이제 더 바빠지겠네.’

나는 앞으로 더욱 바빠질 스케줄을 떠올리며 마음이 흡족해졌다.

‘참 운도 좋지.’

슈퍼스타가 되는 길을 밟아가고 있는 배우와, 슈퍼스타가 될 게 분명한 가수.

이 둘을 내 곁에 둘 수 있게 되어 얼마나 든든한 지 모르겠다.

***

유현지는 방금 전, 회사의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국내에서 제일 잘나간다는 YU엔터테인먼트에 있었다가, 2티어 기획사인 HJ엔터테인먼트로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마음은 오히려 더욱 희망에 차올랐다.

누구 덕분에.

‘재능이랑 실력이 모자라서요.’라고 했던 말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YU엔터가 눈이 삐었어요. 그쪽 재능 넘쳐요. 엄청나게.’

확신에 찬 눈빛으로 말하며 진심이 철철 넘치도록 묻어난 목소리.

그때 연습실에서 해준 말은 아직도 유현지의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나도 재능이 있구나.

그것도 많이.

심지어 댄서로 활동하면서도 그는 직캠을 보며 칭찬하는 말들을 계속해서 전해줬다.

없던 자신감이 생기고, 그에 따라 포기했다고 생각했던 꿈 또한 서서히 다시 그 크기를 부풀렸다.

만에 하나, 그가 틀리고 YU엔터의 결정이 맞았을 수도 있지만.

소문으로 판단해보나, 송하연의 성적과 태도, 그리고 이번 앨범으로 판단해보나.

가능성은 모두 자신의 매니저의 손을 들어주고 있었다.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모두 저울이 한쪽으로 기운 상황.

유현지에겐, 행운도 이런 행운이 없었다.

‘이번엔 정말 잘해내고 싶어.’

유현지는 신인개발팀 직원에게 앞으로의 연습 커리큘럼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속으로 의지를 다졌다.

걱정이 아닌 희망, 초조함이 아닌 확신.

자신의 재능을 알아봐주고, 자신을 그 누구보다 믿고 있는 그의 말대로만 따르면, 왠지 이번엔 아무런 문제 없이 데뷔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매니저님 저 계약했어요. 내일부터 바로 연습 들어가요. 열심히 할게요.]

유현지가 보낸 톡에, 답장은 칼 같이 바로 도착했다.

세 개나 연속으로.

[네! 현지 씨는 할 수 있어요! 자주 보러 갈게요^^]

[파이팅! 본인의 재능을 믿으시고 저를 믿으세요!]

[그럼 데뷔까지 얼마 안 걸릴 거예요. 정말 재능 있으시거든요ㅎㅎ]

현지는 그 답장들을 보며 배시시 미소 지었다.

앞으로가 너무 기대되어 참을 수 없었다.

‘그냥 오늘부터 연습하고 싶다고 말할걸.’

연습복이랑 운동화를 챙겨오지 않은 게 후회되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연습하고 싶은데.

< 매니저님 저 계약했어요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