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하연의 제안 >
촬영이 거듭될수록 배우들은 물론이고 스텝들마저 힘들어하기는커녕, 모두가 펄펄 힘을 내고 있었다.
마치 초심으로 돌아간 것만 같은 느낌.
이는 모두 순수하게 초심 그 자체인 신인 배우들에게서 나온 에너지 덕분이었다.
사실, 이 모든 걸 제 뜻대로 주도한 건 한 명의 매니저였지만.
“오빠, 또 제 초콜릿 몰래 먹었어요?”
“무슨 소리야. 넌 맨날 왜 생사람을 잡냐?”
“그냥 먹었으면 먹었다고 솔직하게 말씀하세요. 제가 못 먹게 하는 것도 아니고.”
“응, 먹었어.”
“이거 봐요! 오빠가 먹은 거 맞잖아요! 드시려면 이거 말고 다른 초콜릿 드시라니까요? 이건 진짜 아끼는 거예요!”
“못 먹게 하는 거 맞네. 치사해서 안 먹는다, 치사해서.”
“어제도 똑같은 말 해놓고서 드신 거잖아요. 이건 제 욕심이 아니라 연기 때문에 먹는 거란 말이에요. 집중이 잘 돼서요. 오빠가 도와주셔야죠.”
촬영이 시작된 지 고작 며칠.
그러나 촬영장엔 벌써부터 명물이 생겼다.
촬영감독은 그 명물을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 감독. 저 둘은 어떻게 된 게 한 시도 안 떨어져? 참 유별나다, 유별나. 이제라도 메이킹 필름 돌리는 거 어때? 작품도 잘 될 것 같은데.”
“에이. 그래도 매니저랑 연예인인데요, 뭐. 대중들은 매니저에 별 관심 없잖아요.”
“그치? 그냥 말해봤어. 그래도 확실히 보는 재미는 있잖아.”
이 피디도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확실히 저 둘이 현장에 있을 때는 촬영장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아니··· 정채희 때문이겠지.’
지금까지 그녀가 보여준 연기는 정말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녀의 연기뿐만 아니라 상대의 연기까지도 컨트롤하는 듯한 느낌.
처음엔 착각인 줄 알았으나, 씬이 거듭될수록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감독인데 알 수밖에.
배우들 역시 마찬가지였고.
‘어디서 이런 복덩이가 굴러들어왔는지 몰라.’
이 피디의 입가에 씨익 미소가 지어졌다.
미팅 장소에서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리고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적어도 이 작품이 끝날 때까지는.
‘다음 작품도 같이 했으면 좋겠는데··· 그건 힘들겠지?’
아마 정채희의 웹드라마 출연은 이게 마지막일 것이다.
이번 작품이 공개되면 그 뒤로 정채희는 무척이나 바빠질 것 같았으니까.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지금 같이 찍는 거에 만족할 수밖에.’
대신, 이번 작품만큼은 혼신의 힘을 기울여볼 생각이었다.
이런 배우와, 이런 분위기, 이런 환경 속에서 작업할 수 있는 건 천운이나 다름없었기에.
다시는 이런 기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다.
비록 웹드라마라지만 이 피디는 모든 힘을 쏟아부어서라도 최고의 웹드라마로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비단 이 피디뿐만이 아니었다.
스텝들은 물론, 배우들 역시 마찬가지.
정채희와 함께 이 작품의 주연을 맡고 있는 인혁은 수시로 정채희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지금처럼.
“채희 씨, 혹시 다음 씬 대사 한 번 맞춰볼 수 있을까요?”
신인 배우가 신인 배우에게, 그것도 연예계 후배에게 하기엔 참 어려운 선택이거늘.
이를 부탁하는 인혁에게서는 부끄러움 한 점 보이지 않았다.
남들이 어떻게 볼 지 모르겠으나, 인혁의 생각은 확고했다.
자기보다 잘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은 전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고.
“네, 선배님!”
***
송하연의 작업실.
부스스한 머리, 눈 밑에 일어난 짙은 다크 서클, 그리고 여기저기 널린 인스턴트 음식의 흔적들까지.
마치 피폐한 주식 폐인을 연상케 하는 현장이었으나, 값비싼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들은 이와 반대로 무척이나 청명하고 밝기만 했다.
며칠 전 깨달음을 얻은 그녀.
그 깨달음을 바탕으로 송하연은 밤 새는 줄 모르고 쉴 새 없이 작업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진짜 멈출 수가 없네.”
막혀 있던 댐이 마침내 터져버린 것처럼, 답안지가 손에 들어온 것처럼.
수정해야 할 부분들이 너무나도 눈에 명확하게 보였다.
조금이라도 아리송하거나 막막하면 모르겠는데, 자꾸 눈에 보이니 작업을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이렇게 간단할 줄이야.”
지금까지 고생한 1년 반의 시간이 무색하게도, 고작 며칠 사이에 괄목할 만한 발전이 일어났다.
앨범이 거의 완성되기 직전.
이제 남은 것은 타이틀 곡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그 완성을 딱 하나의 문제가 가로막고 있었다.
“이것도 잘 보이기는 하는데··· 타이틀 치고는 뭔가 부족한 것 같기도 해.”
송하연은 매끄러운 턱을 어루만지며 미간을 좁혔다.
“으음···. 으음···.”
배부른 소리일 수도 있겠으나, 수록곡들마저 너무 타이틀감이 된 나머지 이런 고민이 생겨난 것 같다.
아니면, 여전히 자신의 실력이 부족하거나.
‘아무래도 모르겠는데.’
어쨌든 마침내 완성을 코앞에 두고 있으니, 이젠 좀 푹 쉬었다가 다시 생각해봐도 될 것 같다.
그동안에도 잠을 자고 밥을 먹고 몸을 씻기는 했는데, 밥 먹을 때도 씻을 때도 심지어는 꿈에서도 음악을 하고 있었으니 진정한 의미에서의 휴식은 아니었다.
‘이제 조급해할 필요는 없어.’
송하연은 결정했다.
하루 정도는 정말 푹 쉬었다가 베스트 컨디션에서 다시 한번 작업을 해보기로.
그런데 그때.
꼴 보기 싫은 인물 1순위, 자신의 담당 매니저가 작업실에 들어왔다.
“하연아, 작업은 잘 되고 있어? 하하. 작업하고 있는데 방해해서 미안. 그런데 오늘도 본부장님께서 부르셔서 같이 가봐야 할 것 같아. 얼른 준비하고 나와. 지금 가도 괜찮지?”
“지금?”
“갑작스러울 수도 있는데, 회사 입장에서는 이미 충분히 기다린 거라···. 하아. 어떡하면 좋아, 정말로···.”
저 가식적인 가면을 보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하연은 마침내 입 안의 가시 같았던 저 매니저를 빼낼 수 있게 됐다는 것에 홀가분하고 개운한 기분마저 느껴졌다.
“알았어. 바로 준비할게.”
환한 미소를 띠운 하연은 지금까지 만든 음악들을 모두 클라우드에 업데이트하고, 태블릿을 켜서 바로 다운받았다.
‘그럼 새로운 매니저는 누가 되는 거지?’
이왕이면 이런 매니저였으면 좋겠다.
자신을 진심으로 응원해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여차하면 자신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말을 건네줄 수 있는 사람.
지금 당장 떠오르는 건 한 사람이었다.
“이제 가죠.”
준비를 끝내고 따로 마련된 작업실에서 나온 송하연과 매니저.
마지막이 될 동행은 회사로, 그리고 본부장실 앞에 도착할 때까지였다.
그 안으로 들어가는 건 송하연 혼자.
그녀는 문을 열자마자 깐깐하고 까다로워 보이는 인상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이 방의 주인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그렇듯, 정갈하며 단정한 본부장실.
김본부장의 성격이 고스란히 반영된 듯, 배치와 분류 또한 깔끔하기 그지없었다.
“어서 와.”
소파를 가리키며 무미건조하게 말하는 김본부장.
하연은 그 딱딱한 어조가 익숙한 듯 별다른 내색을 비추지 않으며, 곧장 태블릿을 꺼냈다.
“본론부터 말하는 거 좋아하시죠? 일단 이거부터 한 번 듣고 얘기할까요?”
여유작작한 그녀의 미소에, 김본부장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하연은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오늘 부르신 거, 앨범 때문에 부르신 거 아니었어요?”
“···.”
“그러니까 들어보고 얘기하자고요.”
“···좋아.”
일부의 경우를 제외하면, 김본부장의 의사결정은 언제나 공명정대했으며 대단히 합리적이었다.
또한 원리원칙에 철저하지만 회사를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원리원칙을 져버릴 수 있기도 하고.
그런 김본부장에게 있어, 이 음악을 듣고 내린 결정은 지극히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공동 작곡이나 편곡 요청은 취소하도록 하지.”
“···이미 준비하셨었나 봐요?”
“네 설득만 남겨두고 있었어.”
말만 설득이지 실제로는 온갖 눈치를 주며 구슬렸겠지만, 하연은 굳이 이러한 말을 꺼내 트러블을 만들어내지 않았다.
자신이 그동안 잘못 생각해왔던 것도 사실이거니와, 부탁할 게 하나 남기도 했으니까.
“이제 타이틀만 남았어요. 조금만 기다려줄 수 있죠?”
“그 정도는 얼마든지.”
“그리고요, 본부장님.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부탁?”
고개를 끄덕인 송하연은 그때 들었던 뒷담화를 말해주었다.
그동안 왜 말하지 않았던 건지도.
역시, 김본부장은 김본부장이었다.
그는 듣는 즉시 합리적인 의견이라 판단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안 그래도 그 친구 얘기가 들려오던 차였어. 그리고 만약 네 말이 거짓이라 해도, 네가 그렇게까지 원하면 바꿔주지 못 할 것도 없지. 새로운 매니저는 1팀장이랑 충분히 얘기해서 붙여줄게.”
“네, 알겠어요. 그런데··· 혹시 된다면요. 그쪽에서도 괜찮다고 하면, 3팀에서 데려올 수 있을까요?”
“3팀?”
이어지는 하연의 말은, 김본부장으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네. 이번에 웹드라마 들어간 정채희 배우 매니저요. 이름은 잘 기억 안 나는데,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것 같긴 했어요. 못 보던 얼굴이라.”
“···!”
“그분한테 한 번 여쭤봐주세요. 강제하지는 말고요. 그냥 제가 같이 하고 싶어 하는데 혹시 의향이 있느냐는 정도로만.”
정채희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으나, 그래서 부탁이다.
의향을 물어봐달라는 이유도 그 때문이고.
‘나랑 하는 게 좋다고 하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신은 있었다.
그 귀여운 후배보다는 자신의 위상이 훨씬 더 높을뿐더러, 자신은 이미 증명된 인재니까.
게다가.
‘내 팬이잖아.’
하연의 머릿속엔 여러 가지 해피 엔딩의 시나리오가 짜여 있었다.
매니저를 뺏어오면 정채희로서는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을 테니까.
‘달래주긴 해야겠지. 충분히 기분 풀 수 있게.’
정채희 역시 자신의 팬.
하연에게 소중한 사람인 것은 틀림없었다.
“괜찮죠, 이 정도는?”
“···그래.”
김본부장의 표정은 그답지 않게 오묘하게 생각이 많아 보였다.
***
오늘의 촬영을 마치고 채희를 집에 데려다준 뒤.
나도 퇴근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예, 윤팀장님. 전화 받았습니다.”
-어···. 채희는 데려다줬어?
“예, 데려다주고 저도 퇴근 준비 중입니다.”
-음. 일단 회사로 다시 와볼래?
퇴근을 앞두고 있었지만, 윤팀장님의 목소리에서 심상치 않은 느낌이 폴폴 풍겨왔다.
‘지금 중요한 시긴데 뭔 일 있는 거 아냐?’
퇴근은 뒷전.
나는 오만 가지 생각을 하며 회사로 달려갔다.
하지만, 바짝 긴장했던 게 무색하게도 윤팀장님의 말을 듣고선 긴장이 탁, 풀릴 수밖에 없었다.
외려 헛웃음이 나올 정도.
“하하. 아뇨. 괜찮아요.”
“···그렇게 가볍게 말할 건 아냐. 진지하게 생각해봐. 그래도 지금 채희한테 네가 필요하니까 최소한의 유예기간은 걸어놨어. 다음 작품 들어가기 전까지.”
난 심각한 표정의 윤팀장님의 눈빛을 똑바로 받으며 또박또박 말했다.
“괜찮아요. 계속 채희랑 하고 싶어요.”
“···정말? 충분히 고민한 거 맞지? 확실하지?”
“네.”
윤팀장님의 얼굴이 점점 밝아진다.
이런 대답을 원했으면서 왜 설득하려 한 거야.
“확실히 인지한 거 맞지? 송하연이 직접 매니저 해달라고 부탁한 거다, 이거? 출세길은 열렸단 거야.”
미안하지만 출세길은 이쪽이 훨씬 더 크게 열려 있다.
송하연도 재능 넘치는 인재긴 한데··· 채희는 이 바닥에서 최고가 될 천재의 재목이거든.
뭐··· 개인적으로 정이 좀 가는 것도 맞고.
“네, 확실히 내용 인지하고 결정한 겁니다.”
마침내 윤팀장님의 얼굴에 완전히 화색이 돌았다.
입꼬리도 슬쩍슬쩍 올라가고.
“하아. 다행이네. 나도 너 우리 팀에서 제대로 키우고 싶었는데, 본부장님이 말씀하신 거라 반발하기가 좀 그랬거든. 다른 분도 아니고 본부장님께서 네 의견만 물어보라는데, 내가 거기다 대고 어떻게 안 된다고 말하냐. 너도 내 입장 이해하지? 응?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라? 나도 평범한 직장인이야. 거기다··· 사실, 대표님보다 본부장님이 실세거든.”
이제 완전히 한 팀이 됐다는 듯 이런 얘기도 실실 웃으면서 털어놓고 계신다.
짧은 기간 동안 두텁게 쌓인 신뢰 때문이겠지.
그런데··· 내가 대표 아들이라는 걸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에이. 섭섭하게 생각 안 하죠, 당연히. 정말 괜찮아요.”
아무래도 최대한 숨기는 편이 좋겠다.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평범한 직장인이니까.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지금처럼 내게 편하게 대하지는 못 하실 거다.
‘그러면 안 되지.’
나는 지금이 너무 마음에 든다.
우리 윤팀장님도, 한실장님도.
그리고 내가 맡은 연예인도.
지금 당장은 내게 변화가 필요 없었다.
나중에 채희가 자리잡았을 때, 새로운 연예인을 함께 맡게 되는 거라면 몰라도.
< 송하연의 제안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