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하산이 천재매니저였다고-11화 (11/170)

< 우리의 필모그래피 >

남자 주연배우를 맡은 아이돌 ‘인혁’.

보이그룹 ‘슈터’의 비주얼 멤버로서, 연기 쪽으로 발판을 넓히고자 웹드라마를 선택했다.

물론 그 선택은 회사에서 내린 것으로, 차근차근 올라왔다는 이미지를 얻기 위함.

연기를 시작하는 아이돌을 바라보는 대중들의 기준은 신인배우를 바라보는 기준보다 높으니까.

다행히 인혁은 연기를 아주 못하는 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잘하는 건 또 아니었다.

그럭저럭 시청자들의 눈에 거슬리지는 않을 정도.

그러나 인혁은 이번 작품에 있어서 그렇게 부담을 가지진 않았다.

아무래도 웹드라마니까.

아무리 대중들이 아이돌의 연기를 까다로운 눈으로 본다 한들, 웹드라마에서까지 그렇게 높은 수준의 연기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조금이라도 더 잘해보고 싶은 마음에 노력은 열심히 했을지언정, 마음이 무겁거나 불편한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안일했던 생각은 대본 리딩 현장에서 무참하게 박살이 났다.

아주 와장창!

인혁의 생각을 바꾼 건 다름아닌 또 한 명의 주연배우.

앞으로 자신과 함께 찍어야 할 씬이 가장 많은 배우.

리딩 현장을 후끈하게 달아오르도록 만든 당사자.

바로 정채희였다.

그녀의 흡입력 있는 연기가 현장에 있던 모두를 빨아들여버렸고, 인혁 또한 마음에 있는 불씨가 당겨졌다.

그 뒤로 안일했던 마음을 고쳐먹고 하드 트레이닝을 했지만.

며칠 만에 실력이 그리 확 바뀔 리는 없다.

“형, 이거 괜히 했나 봐요. 아직 준비도 다 안 됐는데.”

“야, 그 정도면 괜찮아. 다른 애들 연기하는 것도 봤잖아. 너랑 별로 차이 안 나.”

“···그런데 한 명이 넘사벽이잖아요. 저랑 둘이 같이 붙는 씬도 엄청 많고요.”

인혁은 현장에 가까워질수록 초조해졌다.

아무래도 성급했다는 생각을 도무지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인혁의 매니저는 천천히 가기는커녕, 운전을 잘한다는 걸 뽐내기라도 하듯, 막힘없이 쭉쭉 길을 나아갔다.

그렇게 도착한 촬영장.

인혁은 심호흡을 하고서는 차에서 내렸다.

작품 촬영의 포문을 여는 첫 씬은 다른 배우들도 아니고, 정채희도 아니고, 바로 자신이었다.

***

“어? 왔다.”

채희가 무대 공포증이 있어 타인의 시선을 몹시 두려워하기 때문에, 우리는 일찍이 촬영장에 도착해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익숙해지라는 뜻에서.

한 명 한 명, 모두와 인사를 나누고도 남았던 시간.

우리 작품의 또 한 명의 주연배우, 인혁이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김인혁입니다!”

“안녕하세요! 김인혁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탑급은 아닐지언정 꽤 인기있는 아이돌.

그런 그가 모두의 우려와는 다르게, 예의바른 모습으로 인사를 다니니 촬영장의 분위기가 좋게 풀어졌다.

아무래도 규모가 작은 웹드라마이기도 하고, 인기 아이돌의 악명을 수도 없이 들어왔을 테니까.

어쩌면 컨트롤이 안 되거나 불편한 상황을 겪어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겠지.

김인혁의 예의바른 모습은, 함께 이 작품을 만들어갈 우리에게도 희소식이었다.

“이제 저쪽도 스텝들한테 다 인사해간다. 우리도 가서 인사하자.”

인혁이 스텝들에게 인사를 마칠 때쯤, 우리도 한실장님을 따라 그에게 다가갔다.

우리를 발견한 인혁.

채희는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오늘 촬영 잘 부탁드립니다!”

채희의 해맑은 미소에 인혁도 마주 웃어 보이며 인사했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나 그 미소는 어쩐지 기운이 없어 보였다.

나는 그의 심정이 눈에 보일 듯해서 웃음이 터질 뻔했다.

‘무섭겠지.’

대중들의 평가보다는 스스로가.

이미 리딩에서 연기로 잡아먹혔던 경험이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더구나 둘이 맞붙는 씬이 어디 한둘이던가?

우리는 인사를 마치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채희에게 말했다.

“채희야, 넌 신인이니까 정말 최선을 다해야 돼. 이제부턴 실전이니까 평소에 연습했던 것보다 훨씬 더 집중해야 한다?”

채희는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걱정 마세요. 진짜 열심히 할게요!”

촬영이 굉장히 기대가 된다.

뭔가 재밌는 일이 일어날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요, 오빠. 저도 최선을 다할 테니까 오빠도 절대 제 옆에서 떨어지면 안 돼요? 특히 촬영 중엔 화장실도 참아야 돼요. 꼭 제 시야 안에 있어야 돼요.”

“급하면 어떡해?”

“참았다가 씬 끝나고 가시면 되잖아요.”

“진짜 진짜 급하면? 금방이라도 나올 것 같으면?”

“···.”

채희가 커다란 눈으로 나를 노려본다.

진짜 하나도 안 무서운데.

우리가 이렇게 옆에 꼭 붙어서 가볍게 투닥거리고 있을 때.

갑자기 트럭 한 대가 촬영장에 들어왔다.

촬영 장비가 실린 트럭이 아니라, 미디어에서 자주 보이던 그것.

“커피차?”

스텝들의 이목이 그 트럭을 향해 쏠렸다.

촬영장에 온 커피차, 그리고 커피차가 열리며 보이는 익숙한 얼굴의 프린팅.

역시나, 인혁의 매니저의 얼굴에는 의기양양한 미소가 띠워져 있었다.

그는 큰 목소리로 외쳤다.

“수고하십니다! 모두 커피 드시고 하세요!”

이미 말이 돼있었는지 피디는 제일 먼저 줄을 서서 커피와 간식을 받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도 즉석에서 내리는 원두커피.

‘돈 좀 많이 들었겠는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게 아이돌이구나.”

“우와! 진짜 커피차네요? 저 처음 봐요! 되게 신기하다. 우리도 빨리 줄 서요. 꼭 한 번 먹어보고 싶었어요!”

얘는 언제쯤이면 저런 걸 받아볼 수 있으려나.

배우는 아이돌보다 팬들의 조공을 받기 좀 힘들겠지만, 그래도 얘라면 금방이지 않을까 싶다.

비주얼로 한 번, 연기로 한 번, 실제 인성과 성격으로 한 번.

팬들을 끌어모이기에 아주 최적의 조건들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내가 받아올 테니까 넌 그냥 여기 있어.”

“아! 안 돼요. 저도 같이 가요.”

“···야, 이러다 화장실도 따라오겠다?”

“오바하지 마시고요. 저 그 정도는 아니거든요?”

졸졸 따라오는 채희와 함께, 우리는 나란히 줄을 섰다.

채희가 주연배우이기는 해도 이제 막 데뷔하는 신인배우로서 새치기를 할 수는 없지.

***

마침내 촬영이 시작되고, 나는 커피를 홀짝거리며 촬영을 지켜봤다.

지금 인혁이 첫 씬을 연기하고 있었다.

부드럽게 촬영을 시작하기 위해 첫 씬으로는 연기하기에 쉬운 장면이 잡혀 있었고.

인혁도 그 정도는 꽤 괜찮게 연기해내고 있었다.

여전히 감탄이 나올 정도는 아니었지만.

“선배님 연기 잘하신다.”

“네가 훨씬 더 잘해.”

겸손도 정도가 있지.

아까부터 인혁이 여기를 힐끔거리는 건, 채희의 외모가 무진장 빛나기 때문이 아니었다.

저 눈은 이성으로서의 관심을 품은 눈이 아니라 눈치를 보고 있는 눈이거든.

아무튼 쉬운 씬답게 무사히 오케이를 받아내고, 이젠 채희와 함께 맞붙는 씬을 찍게 됐다.

나와 한실장님은 채희를 슬쩍 바라봤다.

안 떨고 잘할 수 있겠지?

채희는 나를 바라보며 무시무시한 발언을 내뱉었다.

“오빠, 촬영장에 일찍 오길 잘한 것 같아요. 저 별로 안 떨려요.”

“···그럼 다행이네. 혹시 NG 난다고 해도 떨지 말고 당황하지도 마. 나 계속 여기에 있을 테니까.”

“진짜 그래야 돼요. 화장실도 참을 거죠?”

“참을게. 그냥 바지에 조금씩 싸서 말리지, 뭐.”

채희의 얼굴이 구깃구깃 일그러졌다.

이미지가 더러워져도 무슨 상관이랴.

나는 채희가 긴장만 하지 않고 제 실력을 모두 뽐낼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자신이 있었다.

이것도 혹시 모를 긴장을 낮추기 위해 던진 말이라는 거지.

그런데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채희가 의미심장하게 나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생각해보니까 진짜로 그냥 싸서 말리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냄새는 걱정하지 마세요! 원래 사람들 다 나는 법이잖아요.”

한실장님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금 얘는 누가 보더라도 진심으로 하는 말임을 알 수 있었으니까.

‘부작용이 심하긴 하네.’

뭐, 지금은 비록 이럴지라도 경험이 쌓이다 보면 알아서 없어질 공포증이다.

굳이 무리해서 빠르게 고칠 필요는 없으니, 약간의 부작용은 얼마간 감수해도 괜찮을 것 같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았어. 그니까 잘해.”

“네!”

기념비적인 채희의 첫 촬영.

그녀는 눈을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내며 카메라 앞에 섰다.

***

인혁의 얼굴이 긴장으로 물들었다.

침을 꼴깍 삼키며 목울대가 크게 출렁인다.

“···저, 저, 저기요.”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무심하게 걸어가는 유나현.

아니, 정채희.

인혁이 맡은 남주인공 역할, ‘정현성’이 등굣길에 ‘유나현’에게 한눈에 반해 헌팅을 시도하며, 남주와 여주가 안면을 트게 된다.

이 씬에서 채희의 연기력은 크게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예쁘고도 무심한 모습을 보여주면 그만.

연기력이 필요한 건 외려 인혁이었다.

허나, 지금 채희의 분위기는 압도적이다.

정말로 사람이 바뀐 것처럼 눈빛, 자세 등의 모든 것들이 아주 섬세하고 디테일하게 ‘유나현’을 만들어내고 있다.

‘열심히 하라고 한 게 효과가 있나 보네.’

이미 촬영장에 도착할 때부터 쫄아버린 인혁을 보고, 채희에게 연기를 더 열심히 하라고 요구한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긴장과 떨림.

이 씬에서 인혁이 표현해야 할 감정은 이러한 것들.

비록 씬이 요구하는 것은 쑥맥이 이성을 대할 때의 긴장감이긴 하나, 이 또한 떨림으로 비춰질 수 있을 테니까.

게다가 인혁이 그렇게 섬세하게 연기하는 스타일인 것도 아니고.

‘채희만 빛이 나면 효과가 반감하지.’

이 작품을 채희 혼자 독식할 수도 있지만, 그건 작은 파이를 욕심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하다고도 볼 수 있는 1화, 인기 아이돌 팬덤으로 인한 화제성, 성공할 작품이라는 사실, 누구 하나 하자는 없으나 그리 뛰어나지 않은 출연진들까지.

이 네 가지의 요소로 미루어 볼 때, 채희가 이번 작품에서 가장 많은 걸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주변을 컨트롤해서 파이 자체를 더욱 키워버리는 것.

그리고 이는 내게 아주 간단하고도 쉬운 일이었다.

‘채희를 조종하면 되니까.’

지금처럼 힘을 빼야 할 씬에 힘을 넣으라고 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저, 저··· 제 말 안 들리세요? 저.. 이거 이어폰 좀···. 저기요···?”

저 리얼한 연기를 보라.

채희의 정면을 막아선 채 오도가도 못하는 눈과 손, 목소리의 떨림이 어디 자기 실력이겠는가.

‘다 채희 덕분이지.’

어떻게 저기서 가만히 서서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존재감을 발산할 수 있는지.

천재는 정말 미스터리하기만 할 따름이다.

‘나중엔 아주 등장 씬만으로도 영화 최고 명장면도 만들어내겠어?’

나는 피식 웃으며 연기를 지켜봤다.

“죄송해요. 남자친구 있어요.”

“아···.”

“그래도 번호 물어봐줘서 고마워요. 그럼 이만 가볼게요.”

“아··· 네···! 네!”

채희와 대사를 주고받으니 인혁의 몸에 군기가 더욱 바짝 들어갔다.

대본이 원하는 대로 말이다.

“커어어엇! 오케이이이!”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매우 훌륭하게 뽑힌 장면 때문이었을까.

감독은 콧김을 후-욱! 내뿜으며 경쾌하게 오케이 사인을 외쳤다.

그리고 오케이가 외쳐지자마자.

채희는 인혁과 스텝들에게 허리를 꾸벅 숙이고는 내게 쏜살같이 달려왔다.

“오빠! 지금은 화장실 가셔도 돼요!”

“안 가.”

“이따가 가지 말고 지금 시간 있을 때 얼른 가세요.”

“안 간다고. 안 마려워. 그보다 이제 다음 씬 말인데.”

“네!”

내가 이렇게 채희를 통해 주변을 조종해봤자, 채희가 함께 나오는 씬에 한해서만 그 효과가 지대하게 나타날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향력은 적지 않을 것이다.

지금 촬영장의 분위기, 그리고 이쪽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인혁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

다시 한번 리딩 현장의 그것이 재현되려 하고 있었으니까.

뜨겁게 타오르는 열정의 불꽃.

나는, 아니 우리는 이 작품을 반드시 성공으로 이끌고 말 것이다.

위대한 대배우의 첫 번째 필모그래피.

위대한 매니저의 첫 번째 필모그래피.

그게 별로여선 안 되잖아?

적어도 웹드라마의 역사를 새로 쓸 정도는 되어야지.

< 우리의 필모그래피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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