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 스키장(2)
* * *
"야 일어나! 아침 일찍 출발해야 된다며"
"으으... 졸려..."
"그러길래 일찍 좀 자라니까 뭔 하루에 3시간만 자도 충분하다며 지랄을 한 건지... 쯧!"
"..."
아직 해조차 뜨지 않은 새벽. 오늘은 스키장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나는 강제로 은하를 깨운 뒤 아침을 차리러 갔다.
잠시 뒤 비몽사몽 한 표정으로 은하가 식탁에 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 넌 안 먹냐...?"
"이미 다 먹었어 새꺄. 다 먹으면 반찬 좀 냉장고에 집어넣고 난 아까 다 씻었으니까 몸만 빠르게 씻어라?"
"우물... 머리 간지러워 죽겠는데..."
은하가 자신의 머리를 만지며 중얼거렸지만 시간 관계상 어쩔 수가 없었다.
길고 탐스러운 노란색 머리카락은 말리는 데만 최소 30분이 걸렸기 때문이다.
여름이었으면 몰라 밖에 온도가 영하로 내려가는 겨울날씨에 자연건조를 할 수도 없으니 차라리 숙소에 도착해서 감는 것이 최선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아암... 짐은 뭐 다 챙겼지?"
"지금 확인하고 있으니까 빨리 먹기나 해"
하품을 길게 하는 은하를 뒤로하고 어제 은하와 함께 싸두었던 짐을 꼼꼼하게 확인했다.
'좋아. 뭐 빠뜨린 건 딱히 없는 것 같고...'
사실 말이 짐이지 옷과 세면도구 외엔 딱히 챙길게 없었다.
음식이나 조리기구 같은 건 다른 사람들이 챙겨 오기로 했고 나머지는 어중간한 이상 다 숙소에 있으니 이 정도면 된 것 같았다.
은하가 씻는 사이 나는 미리 건네받은 차키와 짐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어으... 새벽이라 그런가? 추워 뒤지겠네"
바들바들 떨면서 트렁크에 짐을 실었다.
시간을 쪼개서 기왕 나온김에 담배도 한 개비 물었고 새벽에 분주하게 움직이는 차량들을 보며 숨을 깊게 내뱉었다.
어두웠던 하늘에 조금씩 주황색의 빛깔이 맴돌면서 슬슬 해도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틱틱
"... 하나 더 필 수 있는데"
나온 지 5분 정도 됐나? 담배를 하나 더 필 여유는 충분했지만 날씨가 너무 쌀쌀하다 보니 욕구가 사라져 버렸다.
주머니 속에서 곽을 만지작거리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찬 바람에 인상을 잔뜩 찌푸렸고 그렇게 나는 오피스텔로 돌아갔다.
"어 왔어? 짐을 잘 실었고?"
씻으러 화장실에 들어갈 때 내가 나갔는데 벌써 다 씻었는지 은하가 옷을 바꿔 입은 체로 소파에서 양말을 신고 있었다.
"응. 좀 걸릴 줄 알았는데 생각 외로 존나 빨리 씻었네?"
"늦었잖아. 그리고 머리도 안감았는데 뭐 얼마나 시간이 걸리겠어?"
은하가 고양이처럼 늘어지게 하품하며 말했다.
보니까 대충 물만 묻히고 나온 모양인 것 같은데 뭐 가서 제대로 씻으면 되니까 딱히 상관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나갈 준비를 모두 마치고 우리는 오피스텔을 나와 앞에 주차된 차에 올라탔다.
차에 올라타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저 멀리 새하얀 산이 듬성듬성 보이기 시작했다.
탁
"어우 춥다 추워~"
"수고했어. 몇 시간 동안 꼼짝없이 운전만 했네. 나도 면허 좀 딸걸 그랬나?"
"어휴 됐다 됐어. 빨리 들어가서 밥이나 먹자"
몸이 뻐근 했는지 은하가 어깨를 쭈욱 피며 말했다.
그런 은하의 모습에 나는 어깨를 두드려주었고 우리는 짐을 챙기고 우리가 묵게 될 숙소로 들어갔다.
달칵
"어 왔냐? 기다리느라 지쳐서 죽을 뻔했네. 진성 후배님도 안녕?"
"... 안녕하세요"
문을 열고 들어서니 먼저 와 계셨던 보라 선배가 우리를 맞이해 주셨다.
나는 짐을 풀면서 천천히 숙소를 돌아봤다.
세련된 부엌부터 시작해가지고 소파와 티비, 그리고 바깥에 있는 조그마한 테라스까지. 숙소의 질이 되게 고급졌다.
'뭔 테라스에도 불이 켜지냐? 그냥 호텔아니야 이거?'
"배고프지? 곧 있으면 주현이도 도착하니까 그때까지 좀만 기다리자"
테라스에서 비쳐지는 눈산을 바라보다 보라 선배의 말에 고개를 돌려 선배를 바라봤다.
아마도 주현이라는 이름이 곱창집 누나의 이름인가 보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은하는 아까 제대로 씻지 못했던 것이 영 미더웠는지 세면도구를 가지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덕분에 졸지에 보라 선배와 단둘이 마주하게 되었다.
처음엔 단 둘이 있다는 것이 부담스러웠지만 선배가은하의 과거에 대해 보따리를 풀기 시작하며 점점 보라 선배와 친해지게 되었다.
"... 해서 은하가 울면서 달려왔는데..."
덜컥
보라 선배에게 은하의 어린 시절을 듣던 중 다시 한번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 주현이 왔나 보네. 성주현! 왜 이렇게 늦게왔냐?"
"... 좀 막혔어. 잔말 말고 이것 좀 받아봐"
곱창집 누나, 아니 주현씨가 뭔가가 잔뜩 담긴 박스를 보라 선배에게 건네며 말했다.
나 역시 보라 선배를 도와 주현씨가 가져온 짐을 날래다 어마어마한 술양의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니 뭔 하루 종일 술만 마실 생각인가? 이게 다 몇 병이야?'
일하시는 곱창집에서 구해 온건지 소주가 담긴 푸른색의 플라스틱 짝을 통째로 가져오셨다.
"... 이거 다 마실수 있으세요...?"
"응? 원래 모이면 다들 이 정도 쯤은 마시지 않나?"
보라 선배의 말에 나는 어이가 없다는 눈빛으로 선배를 바라봤다.
'아니 어떤 미친 사람들이, 그것도 4명이서 소주 30병을 마신다는 거야?'
계산해 보니까 한 사람당 대충 7병을 마신다는 건데 7병이 뉘 집 개새끼도 아니고 이건 과한걸 넘어도 한참 넘은 거잖아?
재잘재잘 거리는 보라 선배와 묵묵히 짐을 정리하는 주현씨를 보며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이들 만큼 술에 진심인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짐정리를 모두 마치자마자 주현씨가 부엌에서 솜씨를 발휘했다.
혹시나 내가 도울 건 없나싶어 부엌으로 가 봤지만 도움 따윈 필요 없다는 정중한 말과 함께 부엌에서 쫓겨났다.
부엌에서 쫓겨나고 거실로 돌아와 보니 머리를 말리고 있는 은하에게 보라 선배가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뭔가를 물어보고 있었다.
"아니 진짜 둘이 사귀는 거 아니야?"
"아니라니까"
"이게 말이 안 되잖아. 한 집에 같이 동거까지 하면서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 그것도 이십 대의 젊은 여남들이?"
"나랑 진성이는 그런 사이 아니라니까? 왜 자꾸 추궁을 하지?"
"으흐음? 그래...?"
발끈해 하는 은하의 말에 보라 선배는 야리꾸리한 표정으로 이번엔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럼 진성 후배님은 어떻게 생각해? 아무런 썸도 없는 여남이 한 집에서 동거가 가능하다고 생각해?"
"... 그럴 수도 있죠"
"헤에...? 혹시 두 사람 모두 혹시 뭐 성 기능에 고장이라도 있던가 그런..."
"아오 제발 좀 언니...!"
듣다 못한 은하가 보라 선배의 말을 잘랐지만 선배의 추궁은 끊어질 기세가 보이지 않았다.
탁
"밥 먹어"
"와! 주현이가 해주는 밥. 진짜 되게 오랜만에 먹는다"
아슬아슬한 청문회는 결국 주현씨가 만든 식사가 나오면서 겨우 끝이 나게 되었다.
"... 야 너 괜찮냐?"
"... 내가 미쳤지. 저 새끼랑 같이 놀러 가는게 아니었는데..."
한순간에 팍 늙어 버린 은하가 힘겹게 젓가락을 놀렸다.
왠지 모르게 그 모습이 귀여워 나는 식사가 끝날 때까지 은하를 힐끔힐끔 쳐다 봤다.
***
밥을 먹고 적당히 소화까지 시킨 다음에 본격적으로 스키를 타러 밖으로 나왔다.
"진성 후배님은 보드를 타신다고요?"
"네... 저 원래 보드 밖에 안타가지고..."
"이야~ 보드 타는 남자야말로 끝판왕 중에 끝판왕인데. 너도 알고 있었냐 은하야?"
"뭔 상관이야. 빨리 장비나 대여 받고 타기나 하자"
아직도 혼이 나갔는지 은하가 신경질적으로 보라 선배에게 말했다.
어쨌든 그렇게 나와 주현씨는 보드를 은하와 보라 선배는 스키장비를 대여 받은 뒤 우리는 곤도라를 타고 산 위로 올라갔다.
촤아악
촤악
일단 몸풀기로 중급자 코스에서 보드를 탔는데 역시 공백 기간이 있었지만 무의식적인 기억은 있는지 어색함 없이 보드를 탈 수 있었다.
'오랜만에 타니까 재밌네'
내 성별 때문인지 시선들이 내 쪽으로 몰렸지만 보드에 완전히 몰입하게 된 내겐 관심 밖에 일이었다.
촤아악
어느새 종점에 도착을 한 나는 다시 곤도라를 타러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상급자 코스에서 보드를 타볼 생각으로 고개를 올려 윗쪽을 바라봤는데.
"응?"
'상급자 코스에서 누가 내려오네?'
저 멀리 상급자 코스에서 누군가가 스키를 타기 시작했다.
빠르지만 화려한 솜씨로 스키의 주인은 눈산을 휘저으며 내려왔다.
다시 한번 사람들의 시선들이 저 사람에게 쏠리기 시작했고 나 역시 깔끔한 스키 기술에 감탄하며 저 사람을 바라봤다.
'잘 타네. 역시 상급자 코스에서 타야지 스키좀 탔다고 할 수 있는 거지'
삐끗
우당탕탕
"... 어라?"
그렇게 잘만 내려오면 만점이었을 텐데. 마지막에 너무 긴장을 풀었는지 그만 발이 돌아가면서 스키의 주인은 요란하게 산에서 굴러떨어졌다.
그래도 뭐 거의 다 와가지고 떨어진 거라 큰 부상은 없어 보였다.
뭐 내 알빠도 아니고 해서 그만 시선을 돌리고 다시 곤도라를 타려 발걸음을 옮겼다.
"아이고 시발... 죽겠네..."
'... 응?'
그런데 아까 굴러 떨어진 쪽에서 어디서 들어본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하는 생각으로 좀 더 자세히 쓰러진 사람을 바라보다 쓰러진 사람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욕짓거리와 함께 나는다급히 그쪽으로 달려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