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 스키장
* * *
"건배~"
"..."
경쾌한 짠 소리와 함께 은하가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 신정부터 술 마시면 그해는 온종일 술만 마신다는데"
"뭔 상관이야? 어차피 그렇지 않아도 술만 마실 것 같은데"
나는 한심스러운 눈빛으로 은하를 쳐다봤다.
담배를 피고 집에 돌아오니 이런날은 무조건 술을 마셔야 한다며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술을 깐 은하였다.
'아니 그럴 거면 아까 그 일행들이랑 마시지 왜 나랑 마시는 거야?'
"뭐 해? 안 마시고"
"마신다 마셔"
속으로 투덜거리는 사이 어느새 한잔을 싹 비워 버린 은하에 나 역시 맥주를 들이켰다.
분명히 일행들이 은하랑 술을 마시자고 꼬드켰는데 왜 나랑 마시는 건지. 하여간 여러모로 참 속을 알 수가 없었다.
'마실거면 미리 말을 해 놓던가. 그러면 안줏거리라도 만들어 줬을 텐데'
하필이면 장을 본 게 오늘 새벽에 도착할 예정이어서 안주로 만들만한 식재료가 아예 없었다.
때문에 나는 다시 편의점이라도 급하게 가려 했지만 은하의 만류에 가지 못했고 결국 집에서 나돌아다니는 과자를 안줏거리로 술을 마시게 되었다.
"진짜 이걸로 괜찮아?"
"괜찮다니까. 언제부터 안주가 그렇게 중요했다고"
느긋한 얼굴로 은하는 맥주를 따르며 손을 내저었다.
정말 휑한 술자리였지만 은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즐거워 보였다.
'... 별수 없지. 내일 해장국이나 맛깔나게 끓여주는 수밖에'
나 역시 그쯤에서 생각을 접었다.
그렇게 한잔 한잔 우리는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고 1.6L짜리 하나를 더 까는 와중 은하가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너 스키장 같이 안 갈레?"
"스키장?"
"내가 원래 이맘때쯤에 늘 스키장을 갔거든. 그동안은 군대 때문에 못 가가지고 날 잡고 가려고 하는데"
은하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스키장이라니. 스키야 뭐 탈줄은 알지만 너무 느닷없는데?
'설마 단둘이 가는 건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은하에게 물어 봤더니 그건 아니란다.
대신에 내가 한번 본적이 있는 곱창집 누나랑 이번에 전역한 보라 선배가 함께 한다는데.
"... 뭐야? 다른 사람들이랑 가는 게 별로야? 그러면 우리끼리 가고"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내가 그 자리에 껴도 되나 싶어서"
아무리 그래도 여자끼리 가는 여행에 내가 꼽사리를 끼는 것 같은데.
'그리고 보니까 나만 남자잖아. 이곳은 역전 세계이고'
즉 내 기준으로 해석하자면 남자 셋에 여자 하나가 같이 여행을 간다는 건데...
"에이... 거기서 이상한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을 거니까 걱정 하지마. 어차피 방에선 너 혼자 자고 우리는 거실에서 자면 되니까"
"그래도... 너무 민폐 같은데"
"민폐는 무슨. 우린 숙녀들이야 임마. 신사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 숙녀들이라고"
커다란 가슴을 퉁퉁치며 말하는 은하에 나는 조용히 고민했다.
'스키장이라...나도 가 본지는 꽤 된 것 같은데...'
덥썩
"...?"
"같이 가자잉~ 집에 혼자 있으면 재미도 없잖아앙~"
"... 역겹게 무슨 짓이야 이게"
"진서엉아~"
진짜 개지랄이네.술도 쎈 새끼가 맥주 몇 잔 마시고 취한 척을 하는 게.
내 팔을 붙잡고 애교 아닌 애교를 부리는 은하에 나는 험학하게 인상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은하는 계속해서 애교를 부렸다.
그렇지 않아도 취기 때문에 정신이 오락가락하는데 옆에서 이 지랄을 떨고 있었으니 나 역시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아오 알겠으니까 그 역겨운 표정 좀 풀어봐 제발!"
"그럼 같이 가는 거지?"
"그래 시발. 가겠다고!"
결국 못 이기고 스키장에 가겠다고 말한 나였다.
원하는 대답을 얻었는지 은하는 그제야 제자리로 돌아갔고 가득 채워져 있는 맥주를 순식간에 입속으로 털어놓았다.
"크으~ 술맛 한번 좋네"
"대신에 나 스케줄이랑 맞춰서 잡아줘야 한다?"
"그럼. 당연하지! 그런 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넌 몸만 챙겨 와"
싱글벙글 맥주를 따르는 은하의 모습을 보고 왠지 은하에게 당한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딱히 별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나저나 너 스키는 탈 줄 아냐"
"... 응"
"오 그래? 어디에서 타는데?"
"그냥 뭐... 와따리 가따리 해"
은하 만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술을 들이키고 안주로 내어 있는 과자를 씹으면서 말했다.
'어릴 때 스키 진짜 많이 탔었는데...'
과거 수아네 아버지께서 스키를 무진장 좋아하셔서 매년 같이 가족끼리 스키장에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본래 운동 같은 행위들은 어렸을 때부터 익히는 게 좋다고 했나? 어쨌든 마지막으로 스키장을 갔던 날이 수능을 친 다음이었으니 스키만큼은 잘 탈 수 있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네. 이제는 수아 아주머니가 좋아하시는 건가?'
아무렴 지금 내게 있어선 전혀 쓰잘때기 없는 정보였다.
"... 초보이면 내가 가르쳐 주려고 했는데..."
"허이구 초보가 아니라서 미안하게 됐수다"
"미안하면 한잔 하던지~"
이 미친 술고래 새끼. 나중에 어떤 남자가 이 새끼랑 결혼할지 모르겠지만 아마 이년이 남편분의 속을 엄청 후빌 것이다.
흥겨운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죽어라 술을 들이키다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리고 이튿날, 아니 늦은 점심때에 겨우 일어나 힘겹게 배달 음식을 먹었다.
***
"... 조금 쉬었다 할까?"
"으아... 네"
내 말에 소연이가 죽어 가는 목소리로 그대로엎어졌다.
깨끗하다못해 그냥 텅 비어 버린 머리였지만 그래도 바보는 아니었는지 그럭저럭 수업에 따라오는 소연이였다.
"... 쌤. 왜 우리는 공부를 해야 할까요. 공부만이 인생에 전부가 아닌데..."
'얼씨구. 누가 들으면 온종일 공부만 하는 사람인 줄 알겠네'
많이 힘들었나 본지 소연이는 책상에 엎어진 체로 투덜거렸다.
"그냥 제가 하고 싶은 일하면서 살고 싶은데 왜 세상은 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을 가혹하게 대하는 걸까요..."
"그럼 소연이 너는 어떤 일하고 싶은데?"
그런 소연이의 모습이 귀여워 아무 생각 없이 물었는데 이게 웬걸. 갑자기 눈빛을 반짝거리면서 소연이가 은밀한 미소를 내게 보여줬다.
"... 이거 비밀인데 저 사실 스트리머예요...!"
"스트리머?"
"네! 이래 봬도 방송을 키면 막 200명씩 본다니까요?!"
그러면서 신이 났는지 휴대폰으로 자기 채널을 보여 주며 자랑을 했는데 뭘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그냥 미소로 넘겨 버린 나였다.
"아빠 엄마는... 몰라요. 부모님은 제가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가기를 바라시는데 전 대학에 가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단 말이예요"
"그럼 부모님께 말씀을 드리지..."
"... 아빠 성격상 제 말은 듣지도 않고 무조건 반대하실 게 분명해요. 물론 아빠의 마음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닌지라 일단은 공부하고는 있는데..."
나는 조용히 소연이의 말을 들었다.
스트리머로서 삶을 살아가고 싶다는 소연이의 심정과 부모님이 실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는 소망까지.
남몰래 감추어왔던 소연이의 속마음을 들으며 소연이가 얼마나 생각이 많은 아이인지를 알 수가 있었다.
"쌤. 진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 꿈을 접고 그냥 아빠 말대로 대학에 들어가야 될까요?"
"... 글쎄"
"쌤은 꿈이 뭐였어요? 대학엔 왜 들어갔고요?"
간절한 목소리로 해답을 알려달라는 듯 소연이는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나는 소연이에게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집에 도착한 나였지만 내 머릿속에선 소연이의 물음이 떠나지가 않았다.
'꿈이라...'
"서은하"
"응? 왜?"
"넌 꿈이 뭐냐?"
"... 갑자기?"
소파에서 티비를 보는 은하에게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은하는 이게 웬 개소린가 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다 다시 시선을 티비로 돌렸고 툭 하고 내 말에 대답했다.
"돈 많은 백수"
"..."
"아무 일도 안 하고 가만히만 있어도 몇십억씩 들어오는 그런 백수랄까?"
은하의 말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지보다 한참 어린아이는 자신에 꿈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데'
물론 돈 많은 백수야말로 모든 이들이 꾸는 꿈이겠지만 소연이의 고민을 듣다 이런 대답을 들으니 맥이 빠지리야 빠질 수밖에 없었다
"... 에휴. 기대한 내가 병신이지"
"아니 시발 돈 많은 백수만큼 좋은 꿈이 어디에 있다고. 그럼 넌 꿈이 뭔데"
그런 내 모습에 발끈한 은하가 역으로 내게 물었다.
"돈 많은 백수랑 결혼에서 꿀이나 빠는 인생"
"..."
"그게 그거겠지만 뭐 운 좋으면 그런 여자를 만나겠지"
장난식으로 말한 은하에 나 역시 장난식으로 대답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지 은하가 되게 진중한 얼굴로 날 보기 시작했다.
"진짜로 그거면 되는 거야?"
"... 뭔 말을 그렇게 해. 당연히 장난식으로 말한 거지"
"그럼 장난 없이 진지하게 돈 많은 백수 여자가 너에게 관심을 보이면 넌 어쩔 거야?"
진지하다 못해 당장에라도 타버릴 것 같은 눈빛이 나를 쪼아왔다.
"... 꺼져. 돈도 돈이지만 난 돈 많다고 성격 드러운 사람은 싫어해"
벌떡
그 말을 끝으로 소파에서 일어나 은하를 돌아봤다.
"먼저 씻을 테니까 그런 줄 알아라"
"응? 어 그래"
나는 갈아입을 옷가지를 들고 빠르게 화장실로 들어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