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 놀이동산
* * *
"... 그러니까 내가 당황해 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이랬다고?"
"엉"
"... 그럼 나한테 화가 났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뭐 그래도 기분이 살짝 나쁘긴 했는데 화가 날 정도는 아니었어"
"..."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이게 장난이었다니'
다시는 당하고 싶지 않은 장난이었다.
장난을 당했다는데 있어서 오는 화보다는 다행히라는 마음이 더 크게 들었으니 이 정도면 말을 다한 셈이다.
"... 그럼 오늘 아침에 있다는 약속은...?"
"그거 다 거짓말이었지. 그냥 대충 나갔다가 한 시간 뒤에 돌아올 예정이었어"
"... 하아"
"... 혹시 화났어?"
"내가 왜 화가나 등신아. 화는 너가 나야 정상이지"
이런 걸 착하다고 해야 되는 건지 아니면 바보라고 해야 되는 건지...
"..."
나는 심란한 마음으로 은하를 바라봤다.
노란색 긴 머리와 까맣게 태닝한 피부. 처음 그대로 은하의 모습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반면 은하를 대하는 내 마음은 크게 바뀌었다.
더 이상 은하의 노란색 머리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태닝한 피부 또한 양아치 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본래 사람의 마음이란 갈대 같은 면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평생을 뿌리 박던 마음가짐은 쉽게 변하지가 않는다.
하지만 은하라는 바람이, 거대하지도 강하지도 않은 평범한 바람 한 줌에 굳셌던 뿌리가 뽑혀져 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계속 치솟고 있던 호감이 오늘에서 또 한 번 크게 상승이 된 느낌이었다.
"... 너무 그렇게 쳐다 보면 조금 쑥스러운데..."
"... 지랄하네"
"또또 욕하는 거 봐라. 넌 남자애가 뭐 이리 욕을 입에 담고 사는 건지..."
주절주절 떠들어 대는 은하의 목소리의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지어졌다.
"... 뭐야? 그 기분 나쁜 미소는. 뭐 잘못 먹었냐?"
"..."
"... 에잇! 현관문 앞에 있어서 그런가? 더럽게 춥네. 난 아까 못 잔 잠이나 자러 가야겠다"
내가 반응이 없자 은하는 무안했는지 신발을 벗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현관문에 꽤 오랫동안 서 있어서 그런지 급히 방으로 들어가는 은하의 귀가 사과처럼 빨갛게 익어갔다.
그렇게 은하가 방으로 들어가고 나 또한 왠지 모를 후련한 마음으로 방에 들어갔다.
"..."
"..."
고요한 집안에서 아까와 같은 쌀쌀함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더욱 편안해진 느낌이었다.
***
어느덧 12월이 찾아왔다.
날씨는 점점 더 추워져갔고 입만 열면 여자가 무슨 패딩이냐 라고 말한 은하 역시 외출을 할 때 장롱에서 롱패딩을 소중히 꺼내 입고 다녔다.
은하와 함께 지내는 생활도 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졌다.
가사일도 크게 어려운 부분이 없었고 오히려 평소에 먹어보지 못했던 음식들을 만들 기회가 생겼기에 행복지수만 더 높아진 기분이었다.
"에, 에에...!"
"..."
"에취이이이!!!"
이런 평화로운 일상 속에 유일한 흠이 생겼더라면 바로 은하가 감기에 걸렸다는 거라는점?
심하게 기침을 해대는 은하를 나는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 너 진짜 괜찮은 거 맞냐?"
"크흥...! 괜찮다니까..."
"그래도 병원이라도 가보는 게 역시..."
"에이... 뭔 병원이야. 감기는 2주 있으면 알아서 다 낫게 돼있어"
"..."
"... 훌쩍"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감기에 걸렸으면 빨리 치료를 해서 날 생각해야지 왜 버티려고 하는 거야 진짜.
"... 난 살면서 감기 때문에 병원 한번 가 본적 없는 여자야"
"진짜 개지랄이네"
"으엑?! 진짜라니까?"
"..."
"... 감기는 아침 저녁으로 무국만 잘 먹으면 금방 난다니까?"
"아니 씨발 내가 지금 무국만 나흘째 끓이고 있는데 그게 뭔 개소리냐고"
"... 킁!"
진짜 무슨 애새끼도 아니고...
에휴 뭐 어쩌겠는가 지가 안 가겠다고 하는데 내가 억지로 데려갈 수도 없으니 원.
"... 에취이히!!!"
'아오 진짜'
그래도 좀 좆같네. 마스크라도 씌어야 되나? 이러다 괜히 나도 감기 걸리는 거 아니야?
"... 됐고 빨리 나가기나 하자"
"너 진짜 괜찮겠어? 그냥 집에서 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걱정 말라니까?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임마. 이거 "
"아니..."
"아오 뭔 말이 이렇게 많아! 가자고 가!"
은하에 재촉에 할 수 없이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나였다.
오늘은 은하와 데이트가 있는 날이었다.
물론 말이 데이트지 은하왈 어색한 관계를 개선하고자 하는 특별 프로젝트라던가 뭐래나.
뭐 어쨌든 대충 그렇다 치고 나는 어디 영화관이나 그런 곳을 갈 줄 알았는데... 은하는 내게 기왕 가는 거 제대로 보내 보자고 용인에 있는 커다란 놀이동산에 가자고 했다.
이게 뭔 12월달에 놀이동산은 얼어 뒤지라는 소리도 아니고 당연히 나는 반대하려 했지만 너무나도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은하의 눈빛에 결국 승락을 하고 말았다.
그래서 이렇게 아침 일찍 집을 나온 우리였는데...
"잠깐만"
"응?"
갑자기 은하가 나를 멈춰 세웠다.
"... 뭐 가기 전에 한대 피고 가려고?"
"그것도 나쁘지는 않는데... 이게 뭐게?"
"...?"
은하가 미소를 지은 체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고 손을 흔들었다.
나는 멍하니 은하의 손에 쥐어진 무언가를 바라봤다.
앙증맞은 크기에 은색깔의 버튼들로 나누어져 있는 모습. 그리고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그림들.
'설마...?'
"히힛. 이번에 돈 좀 썼지"
띠딕
"...!"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은하의 손짓 한 번으로 앞에 있던 차에 불이 들어왔다.
은하의 손에 들린 것은 다름이 아닌 차키였다.
"너... 차 샀냐?"
"엉. 내가 또 아는 언니한테 중고로 싸게 구입했지"
"..."
'이걸 중고로 샀다고?'
지금이 막바지이긴 하지만 이거 이번 년도에 나온 차 아니야? 그런데 어떻게 중고로 살 수 있는 거지?
"으으... 춥다. 빨리 타기나 해"
"... 어 그래"
일단 정신을 차리고 차에 올라탔다.
탁
"... 너 근데 면허는 언제 땄냐?"
"응? 성인 되자마자 땄는데?"
"... 그러면 운전 경험은?"
"에이... 걱정하지 마 새꺄. 이래 봬도 나 운전병 출신이야"
그래? 그러면 다행이네. 그나저나 얘도 군대를 다녀왔긴 했구나.
'그러고 보니 수아랑 진아가 군대를 갔다 왔는지를 모르겠네'
나이로 봤을 때 수아는 아마 갔다 왔을 것 같고 진아는... 음... 애매한데? 지금이 갈 시기이긴 한데 잘 모르겠네.
"그럼 출발한다"
부르릉
내가 잠시 딴생각에 잠겨 있던 도중 차가 출발 했고 확실히 운전병 출신이라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별문제는 벌어지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점점 길이 좁아지면서 놀이동산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했다.
"... 어우 사람 많은 것 봐라. 아직 10시 밖에 안 됐는데"
"히히... 오늘 여기 있는 놀이기구 다 타기 전까진 집에 못 가는 거다?"
"... 에휴 그러던가 말든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도 설레기는 마찬가지였다.
'중학생 때 이후로 한 번도 안 갔는데 이렇게 와보다니'
그것도 학교에서 다 같이 간 거지 이렇게 사석에서 가보기엔 정말 오랜만에 와보는 곳이었다.
티켓을 끊고 설레는 마음을 가지고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나는 은하에게 마스크를 건넸다.
"아이 씨... 이거 꼭 껴야 돼?"
"너 나랑 약속했잖아. 여기 오는 대신에 마스크 착용하기로"
"아 그래도 기분이 확 떨어지잖아..."
"닥치고 빨리 쓰기나 해. 오늘 여기 있는 놀이기구 다 탈거라며. 그러면 빠르게 움직여야지"
어쩔 수 없었다. 안 그래도 감기에 걸린 상태인데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그것도 야외에서 하루 종일 돌아다니려면 마스크라도 껴야 안정이 되지 않겠는가.
"뭐 부터 탈까?"
"일단 사람들이 더 몰려오기 전에 제일 인기 많은 것부터 타자"
"... 그럼 롤러코스터 부터 타야겠네"
그러니까 롤러코스터가 저쪽에 있고 그다음으로 인기 높은 것이 바이킹이니까...
덥썩
'응?'
열심히 지도를 보며 계획을 짜던 도중 갑자기 은하가 내 손을 붙잡았다.
"뭘 언제까지 서있을 거야? 일단 가면서 생각하자고"
"야야...!
"계획은 가면서 생각하는 거야. 그러다간 아무것도 못한다?"
"아, 알겠으니까 손 좀 노라고 새꺄!"
"우선은 저 앞에 있는 범퍼카를 타볼까요~"
되도 않는 콧노래까지 부르며 앞서나가는 은하에 나는 어이없음을 느꼈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 늘 그랬듯이 길게 한숨을 내쉬고 상황을 받아드린 나였다.
그렇게 은하의 주도 하에 우리는 놀이기구를 타기 시작했고 범퍼카를 선두로 시작해 바이킹, 롤러코스터, 심지어는 회전목마까지 정말 하나씩 다 즐기기 시작했다.
끼이이익
"으으..."
"..."
콰앙
"으어억!!"
"... 좀 제발 가만히 좀 있으라고"
"아, 아니 씨발 진짜 누가 내 다리를 만졌다니까!!"
벌벌 떨며 호들갑을 떠는 은하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뭔 군대도 갔다 왔다는 새끼가 귀신의 집을 무서워해?'
나야 뭐 비현실적인 상황에 대해선 그다지 겁이 없는 편이라 상관이 없었지만 은하 얘가 이렇게 까지 반응을 보일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꽈악
"아오 야! 손 좀 살살 잡아!!"
"미, 미쳤냐?! 내가 지금 믿을 건 너 밖에 없는데 니 손을 어떻게 놔!"
"아니 손을 놓으라는 게 아니라 조금만 살살 잡으라는..."
"이, 이익!!! 빨리 가기나 하자고!!"
어둠 속에서 은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대충 은하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 다른 한편으론 귀엽기도 한단말이지'
꺄아아악
"으허허헉!!!!"
"아오 좀!! 아프다고 썅년아!!!"
3가지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하나는 기계가 내지른 소리, 하나는 그 소리에 놀란 은하가 내지른 소리, 나머지 하나는 은하 때문에 내가 내지른 소리.
귀여운 건 귀여운 거고다시는 은하와 귀신의 집에 들리지 않겠다고 나는 조용히 다짐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