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 여행(2)
* * *
아침을 배불리 먹고 어른들은 펜션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나는 소화를 시킬 겸 바닷가를 살펴보겠다고 말했다.
"... 그럼 같이 가자. 나도... 해변 좀 걸어보고 싶은데..."
"... 뭐 그래 그러면. 진아 너는?"
내 말에 열심히 밥을 긁어 먹고 있던 진아는 잠깐 수아를 바라보다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난 됐어. 둘이서 데이트나 재밌게 하고 와"
"무, 무슨 이게 데이트야 그냥 산책하는 거지..."
"... 에휴 아무튼 난 어른들 따라갈 테니까 둘이서 알아서 갔다 와"
결국 그렇게 나랑 수아 둘이서만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어른들의 의미심장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식당을 나왔다.
'쟤는 왜 개소리를 지껄여가지곤...'
솔직히 나는 별 상관이 없었지만 진아는 상관이 많이 있었나 본지 정신이 없어 보였다.
얼굴 빨개진 거 봐라. 아주 그냥 나중에가면 터져 버리겠네 씁.
어쨌든 그렇게 식당을 나와 우리는 새하얀 모래사장 속으로 들어갔다.
"..."
"..."
모래사장을 밟으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체 나와 수아는 해변을 걸었다.
아까 식당에 들어가기 전만 해도 사람들이 별로 없었는데... 어느새 해변에는 많은 사람이 들어와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리며 그들을 바라봤다.
바다에다 몸을 던지는 사람들, 부모님과 함께 모래성을 짓는 아이들, 썬글라스를 끼고 선텐을 하는 사람들... 모두 각기 다른 행동을 하고 있었지만 저기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모두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 무슨 할 말 있어?"
"... 어어?"
"아니 뭐 아까부터 왜 자꾸 끙끙되는 거야 그러면"
"..."
얘는... 글쎄 모르겠다. 몇 번 만나기는 했는데 만날 때마다 항상 무언가를 숨겨서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사는지 모르겠다.
'특히 오늘은 조금 더 심한 것 같은데...'
내 말에 당황해 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수아를 보고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사람 자체가 내성적인 성격으로 바뀐건지, 아니 그래도 몇십 년 지기 친구인데 이렇게까지 자신을 숨긴다고? 이건 조금 섭섭한데.
"... 에휴 걍 걷기나 하자"
"... 응"
뭐 어쩌겠는가 이건 내 생각이고 수아에겐 늘 하던 행동일지도 모르는데.
걍 내가 이해해야지. 애초에 다른 사람의 기준으로 본다면 오히려 변한 건 나니까 말이야.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계속 말없이 걷기만 한 건 아니다.
"... 짠내 봐라. 오랜만에 바닷냄새 맡으니까 기분 좋네. 안 그래 수아야?"
"... 으응"
"그나저나 넌 뭐 별일없었냐? 나는 저번에 우리 과에서..."
몇 번 만나면서 수아와 어떻게 대화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나였다.
내가 먼저 입을 열어 이야기를 주도하고 그것을 수아가 맞받아치는 형태로 대화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솔직히 이런 방식이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원활하게 이어졌다.
그렇게 한참을 떠들었을까.
"... 어우 날씨가 점점 더 더워지네 그렇지 않냐 수아야? 마음과 같아선 저 사람들처럼 웃통을 벗어 던지고 바다에 몸을 던지고 싶네"
"..."
순간 수아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빨갛게 익어졌다.
내가 의아해하며 수아를 바라보자 수아는 내 눈을 피하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지만 대충 넘어가고 나는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 뭐 어쨌든 이번 여름은 진짜 말도 안 되게 더운 것 같네"
"... 그, 그러면 내가 아이스크림이라도 사 올까?"
"... 아이스크림?"
슬슬 펜션에 들어갈 각을 보고 말한 건데 갑자기 아이스크림이라니.
'그럼 가는 김에 어른들 몫 까지 사오고 펜션에 들어가면 되겠네'
"그래 그럼 아이스크림 사가지고 펜션으로 올라가..."
"조금만 기다려 금방 갔다 올께!"
내가 뒷 말을 하기도 전에 수아는 재빠르게 저쪽 멀리 있는 편의점 쪽으로 달렸다.
"..."
순식간에 점이 되어 버린 수아를 나는 멍하니 바라봤다.
"... 아니 지가 혼자 사오겠다는 거였어?"
당연히 같이 가는 줄 알았는데 이건 뭐... 어이가 없네.
"... 빠르기는 왜 저렇게 빠른 거야? 저것도 신체 능력이 향상 돼서 그런가?"
수아가 달리는 모습을 보고 순간 이곳이 해변이 아닌 줄 알았다.
아무리 달리기가 빠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래도 명색이 모래사장인데 발에 모터라도 달았는지 저렇게 빨리 달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
졸지에 혼자 덩그라니 남겨진 나는 뜨거운 햇볕에 눈을 찌푸리며 일단 수아를 기다리기로 했다.
아까 달리는 행색을 보아하니 전화를 걸기엔 타이밍이 너무 늦었을 것 같고 뭐 별수 있나 그냥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
그래도 대충 속도를 보니까 금방 갔다 올 것이라 생각하며 물속에서 신나게 물장구를 치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 재밌게들 노네'
신나게 물장구를 치며 노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여자였다.
아이들과 함께 튜브를 타면서 놀아주는 사람도 여자였고 그냥 해변에는 압도적으로 여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남자 몇 명이 해변에 걷기만 하면 여자들이 예쁘고 몸 좋은 여자들이 다가왔고 그들은 함께 어딘가로 사라지는 그런 상황이...
스윽
"...?"
그렇게 수아를 기다리며 주변을 둘러보는 동안 갑자기 누군가 내 팔을 건드렸다.
"HII~ Are you alnon?"
"Let's play with us babay!"
어디서 왔는지 정말 은하에 염색 색깔과는 차원이 다른 금발 머리에 두 백인 여성이 내 뒤에 서 있던 것이다.
'... 뭐야 이건 또 씨발'
갑작스러운 상황에 순간 뇌 정지가 왔다.
"Hmm? Don't you speak english?"
"너너, 우리랑 놀자 같이"
그런데 내가 뇌 정지가 온 걸 백인 여자들은 내가 영어를 못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나보다.
'... 외국 얘들한테 헌팅을 받을 줄이야'
정말 성의란 1도 없는 한국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이 여자들을 어떻게 쫓아 버릴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 그건 그렇고 뭔 몸매들이...'
확실히 내가 지금까지 만나 본 여자들 중에서 단연 피지컬적으로는 살벌하기가 짝이 없는 몸매였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비키니와 특유의 크고 새파란 눈동자는 확실히 매혹적이었다.
'... 씨발 어떻게 해야되지'
물론 성에 대해선 씹 선비의 마인드를 가진 내겐 아무런 상관이 없는 말이지만 말이다.
뭐 어쨌든 그렇게 내가 내린 결정은.
"... Sorry!!"
후다닥
"... What?"
그냥 냅다 수아가 사라진 방향으로 달렸다.
다행히도 나를 쫓아오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단지 멍하니 나를 바라봤을 뿐이지 아마 저것도 어이가 없어서 저러는 행동일 것이다.
'... 씨발! 그럼 저기서 뭔 방법이 있겠어? 그나마 이게 제일 평화적인 방법이지...!'
모래 때문에 발이 푹푹 빠지는 와중에도 나는 결코 발을 멈추지 않았다.
아무튼,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저 멀리서 검은색 비닐봉지를 든 체 걸어오는 수아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수아를 발견한 것처럼 수아도 뛰어오는 나를 발견했는지 잠깐 자리에서 우뚝 서다가 빠른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진성아...! 뭔 일이야. 왜 갑자기 뛰는 거야...?"
"헤엑... 헤엑... 너는 진짜..."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내게 묻는 수아에 갑자기 짜증이 확 몰려왔다.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이렇게 뛰는 건데...'
내가 생각해도 정말 병신같은 생각이었지만 어쨌든 나는 수아를 매섭게 노려봤다.
아니 그렇다고 이게 내 책임이라고 하기엔 너무 억울하잖아. 솔직히 수아가 내 말을 안 듣고 먼저 달려 버린 것도 있고. 이렇게라도 구실을 잡아야지 아니면 언제 이걸...
"... 히끅!"
"..."
"호, 혹시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어...? 그러면 내가... 히끄윽..!!"
순간 수아의 반응에 짜증이 물러가고 무기력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이건 뭔...'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수아가 손으로 입을 가린 체 딸꾹질을 하니 이건 뭐 오히려 당황스러움에 빠진 나였다.
"...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잠깐 더위를 먹었나 보네"
"... 히끅!! 정말...?"
"그래. 올라가기나 하자"
결국엔 아무것도 아니라며 사건을 대충 넘긴 나였다.
펜션으로 올라가기 전 비닐 봉지에 담긴 아이스크림이 생각보다 모자랄 것 같아 다시 편의점으로 들어가 넉넉하게 아이스크림을 샀다.
나와 수아는 바를 입에 하나씩 문체로 편의점을 나왔고 거기에 덧붙여 나는 이온 음료도 하나 구매를 했다.
"..."
"..."
가는 길은 다시 침묵길로 바뀌었지만 이번엔 딱히 그 흐름을 깨지 않았다.
그냥 내가 말하기 힘든 것도 있었고 여기서 뭐라고 말해야 될지도 난감했고.
그래도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나는 말을 할 타이밍을 잡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수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 저기 진성아"
"... 어?"
"아까... 그... 왜 그런 거야...? 아니 나는 무슨 너를 추궁하거나 그러려는 의미가 아니라..."
자기가 말해 놓고선 허둥지둥해하는 수아의 모습에 어이가 없는 것과 더불어 얘가 귀엽게 느껴져 작게 웃음을 터져 나왔다.
"... 풋! 알겠으니까 그만 좀 당황해라. 다 설명해 줄 테니까"
"... 으으 미안해..."
"미안은 무슨. 사실 아까 너가 편의점으로 가고 나서 말이야..."
수아는 아무런 말없이 내 말을 경청했다.
그리고 나는 얘기하면서 실시간으로 얼굴이 시뻘겠지는 수아에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렇게 바뀐 수아가 마음에 들었다.
"으으... 나 때문에..."
"그게 왜 너 때문이야. 아니 생각해보면 결과적으로 너 때문에 벌어진 일은 맞지만..."
펜션에 도착할 때 까지 수아는 계속해서 내 시선을 피했다.
자기 입장에선 많이 미안했나 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