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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역전 세계 속 처녀 지키기-24화 (24/72)

〈 24화 〉 음모(9)

* * *

경찰서에 도착한 뒤로 몇 가지 조사와 질문들을 받았다.

나와 은하는 헬스장에서 있었던 일들을 모조리 경찰들에게 설명했고 다행히 이나쌤이 설치해 두었던 카메라가 완전한 증거품으로 선정이 되어 일은 쉽게 풀려갔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조사를 받는 도중 웬 덩치가 산만한 근육녀가 경찰서에 들어오더니 나를 보고 고개를 푹 숙이며 사과했다.

그녀는 이나쌤의 고모이자 헬스장의 사장님이었다.

자기가 지은 죄도 아닌데 진심으로 고개를 숙이는 사장님에 오히려 내가 어쩔 줄 몰라 했다.

후에 사장님께서는 나와 은하가 혹시라도 헬스장을 그만 다니고 싶다면 전액을 환불해주고 그동안 다닌 만큼에 금액도 모두 환불해 주겠다고 약속을 하셨다.

사장님 입장에서도 이번 일은 큰 충격이셨나보다.

하긴 외관만 보더라도 이나쌤과는 다르게 헬스에 진심이신 분 같은데 조카가 자기 헬스장의 회원을 성폭행하려 했으니까 뭐 아마 헬스인으로서의 긍지가 완전히 박살이 났을 거다.

그렇게 경찰서에의 몇 시간이 더 흐르고 나중에 추가로 조사를 요구할 수 있다는 말과 함께 나와 은하는 경찰서를 나왔다.

"..."

"..."

하늘을 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었다.

아침부터 재수 없었던 하루도 드디어 끝에 다가가기 시작했다.

"네... 죄송합니다. 네? 아유 아니에요 내일부터 나와야죠. 저 다친 데 없어요"

아무리 그래도 오늘같은 날에 알바는 무리일 것 같아 호프집 사장님께 전화를 해 상황을 설명해 드렸다.

사장님은 깜짝 놀라하며 괜찮으니까 푹 쉬라고 말씀 하셨고 혹시나 휴식이 더 필요하면 무조건 말을 하라며 친절함을 베푸셨다.

참으로 못된 세상이지만 그래도 아직 살만 한 세상이나 보다.

"... 응? 뭐 내 얼굴에 뭐 묻었어?"

문득 길을 걷다 은하를 바라봤다.

갑자기 내가 자신을 바라보자 은하는 의아해하며 역시 나를 바라봤다.

그렇게 우리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서로를 바라봤다.

"..."

"..."

그사이에 대화가 있지 않았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나와 은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다 주었다. 왠지 모르게 대화를 하지 않아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모두 전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고마웠다. 만약 그 자리에 은하가 없었더라면 아마 꼼짝없이 이나쌤의 계획에 당했을 것이다. 이나쌤이 설치해 둔 카메라로 2차 피해를 입었을지도 모르고.

그 끔찍한 사건을 은하가 홀로 모조리 해결해 주었으니 고마움과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고마워"

"... 고맙기는 무슨 우리 사이에"

진심을 담아서 은하에게 말했더니 은하는 부끄러워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런 은하의 행동이 귀여워 나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지만 이런 내 행동에 더 부끄러움을 받았는지 아에 혼자 멀찍히 걸어가는 은하였다.

하여간 인생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남녀가 바뀌기 전부터 가장 혐호했던 사람이 이제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친구로 바뀌었으니 말이다.

은하는 내게 있어서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나를 조금이나마 바뀌게 만든 계기가 돼 버렸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양아치들이나 문신이 잔뜩 그려져 있는 사람들을 좋게 바라본다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이젠 처음부터 사람을 부정적이게 바라보지는 않게 되었다.

"... 뭐 해 안 오고"

열심히 길을 걷다가 내가 자기를 따라오지 않자 은하는 퉁명스럽게 말하며 뒤를 돌았다.

노란색 긴 머리를 찰랑거리며 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은하에 나는 잠시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붉은 노을에 비친 은하의 모습은 내 마음을 간질거렸다.

평소엔 이런 내 상태에 기겁을 했을 나였지만 오늘 만큼은 마음이 따르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이런 기분이 딱히 싫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그냥 어색하다고 해야 할까?

"... 설마 또 삐졌냐? 뭔 말만 하면 계속 삐지는 거야"

"뭐래 내가 왜 삐져. 간다 가 새꺄"

"욕도 좀 줄이고 좀 더 부드럽게 말하는 것이..."

"싫어 꺄"

"... 에휴"

해가 저물고 희미하게 달이 보이기 시작했다.

재수가 뭣 같이 없는 날이었지만 그래도 마지막엔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다.

***

[으으... 죄송해요 진성 회원님. 제가 대회를 나가는 것이 아니었는데...]

"어우 아니예요 소연쌤. 소연쌤이 제게 사과 할 이유가 뭐가 있어요. 잘못은 이나쌤이 한 건데"

[그래도... 하아 제가 뭐라 해드릴 말이 죄송하다는 얘기 밖에 없네요]

이튿날 헬스장 사장님에게 연락을 받았는지 소연쌤이 전화를 걸어 암울한 목소리로 사과를 해댔다.

사장님과 마찬가지로 그 자리에 없었던 소연쌤이 이렇게 까지 사과를 하니 나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 이런 착해 빠진 사람들 같은 이라고'

한 10분 정도를 사과만 받은 것 같다.

소연쌤은 자기가 그곳에 없었다는 것과 이나쌤을 제대로 통제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자신을 크게 자책했다.

그 말에 나는 당연히 소연쌤의 탓이 아니라 말했지만 소연쌤은 내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속 자신을 자책했다.

이쯤 되니 뭔 말을 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자 나는 그냥 아에 화제를 돌릴 생각으로 이나쌤에 처후에 대해 물었다.

[이나쌤, 아니 그 여자는 앞으로 더 이상 헬스장에 나오지 못할거예요. 옆에 있던 양아치들은 전과가 있어서 그런지 처벌을 세게 받을 것 같고요]

"그건... 다행이네요"

[헬스장은 일주일 정도 잠길 거예요. 정리도 해야 되고 경찰에서도 더 조사를 해야된다 말해서요]

"어쩔 수 없네요"

[그리고... 앞으로는 어떻게 하실거예요...? 역시 그만두실 생각이신가요?]

"..."

소연쌤의 말에 나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원래라면 이나쌤 때문에 헬스장을 끊으려고 했는데 이제 이나쌤도 없으니 그냥 계속 다니면 되는 거 아닌가?

뭐 딱히 트라우마나 그런 건 별로 들지 않아서 상관은 없긴 했다.

"아뇨. 별다른 이유가 없으면 계속 다닐 생각인데..."

[... 저, 정말로요? 그런 일을 당했는데도 진짜 괜찮으세요?]

"네 뭐... 어차피 지나간 일인데. 이번에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앞으로 다시 벌어질 것 같지도 않고"

아마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소연쌤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볼 것이다.

내 말에 소연쌤은 잠시 침묵하더니 무언가 결심을 한 듯 자신이 사장님께 여쭈어 회원권을 전액 무료화 시켜 주겠다고 말을 한 뒤 사장님과 통화하겠다며 전화를 끊어 버렸다.

전화가 끊기고 나는 멍하니 휴대폰을 바라보다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 뭐야? 누구랑 통화했길래 좋아 죽으려고 하는 거야?"

"아 다름이 아니라 소연쌤이 있지 말이야..."

앞에서 밥을 처먹고 있던 은하에게 나는 소연쌤과 나눈 대화를 알려 줬다.

"... 그래? 그 사람 생각보다 꽤 괜찮은 사람이나보네"

"꽤는 무슨 너보다 5000배는 괜찮은 사람이지"

"뭐래. 세상에 나보다 5000배나 착한 사람이 어디 있어? 나 정도면 천사지"

"..."

어이가 없어 실소를 내뱉었지만 딱히 나는 은하의 말을 지적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 뭐야 왜 가만히 있냐? 원래라면 지금쯤 욕하는 모습이 나와야 되는데"

그러자 오히려 당황한 은하가 불안해하며 눈을 가늘게 띠었고 나는 그런 은하에게 싱긋 미소를 지으며 받아 주었다.

내 미소에 눈이 크게 떠진 은하가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은 그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다.

"그래서 너 다음 주에 뭐 하냐?"

"... 다음 주? 추석 날 말이야?"

"그럼 다음 주가 추석이지 뭐야 등신아"

"... 뭐 하기는 아무 일도 없는데?"

계속 당황해 하던 찰나 욕을 하는 내 모습에 그제야 진정이 됐는지 은하는 젓가락을 뒤적거리며 말했다.

"왜 뭐 혹시 그날 나랑 같이 데이트나 하게?"

"아니. 난 추석날 약속이 있어가지고"

내가 단호하게 말을 하자 왠지 모르게 실망해 하는 은하였다.

"그럼 왜 물어 봤는데?"

"그냥 별다른 이유 없는데? 뭐 무슨 문제 있어?"

"아니... 그렇게 말하면 내가 할 말은 없는데..."

풀이 죽은 체 어정쩡 거리는 은하의 모습이 생각보다 귀엽다고 생각하며 나는 추석에 일어날 일들을 생각했다.

추석날엔 가족끼리 바다를 가기로 했는데 역시 이번에도 수아네 가족과 같이 동반 여행을 가기로 했다.

2박3일 동안 펜션을 잡고 놀기로 했으니 아마 어른들끼리 밤새도록 술을 마시는데 우리가 가서 꼽사리 끼는 것이라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수아랑은 저번에 몇 번 식사를 같이 했으니 딱히 어색한 분위기는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진아인데...'

"... 에이 뭐 별일이야 생기겠어"

"응? 뭐가?"

"있어 그런 게. 됐고 밥이나 처먹어. 무슨 학식을 40분째 처먹고 있어"

"원래 천천히 먹는 게 건강에도 좋고 그런..."

"아니 이건 천천히 먹는 게 아니라 그냥 반찬을 뒤적거리는 거잖아"

"... 그거나 이거나 뭐 다를 게 있나?"

"... 그래 니 많이 처먹어라"

아직 진아가 어떤 성격으로 바뀌었는지 전부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아마 큰 문제는 없을 거로 생각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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