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 음모(6)
* * *
이튿날 늘 마찬가지로 수업이 끝나고 헬스장으로 가던, 아니 이제는 옆에 껌딱지를 하나 붙힌 체로 나는 헬스장으로 가고 있었다.
"더워..."
"... 아 좀 붙지 말라고!"
여전히 거지 같은 날씨에 은하는 많이 지쳤는지 축 늘어진 몸으로 내 뒤를 쫄쫄 따라왔다.
의상은 뭐... 다시 원래의 그 짧은 옷차림으로 돌아갔지만 말도 안 되는 날씨 때문인지 딱히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부러울 정돈데 무슨'
땀을 많이 흘려서 그런지 약간의 에로틱한 면이 보여지기도 했지만, 이 날씨에 그런 사소한 현상까지 신경 쓸 틈은 없었다.
마음과 같아선 나도 은하처럼 타이트한 옷을 입고 싶을 지경이니 이 정도면 말을 다한 셈이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으으... 야!"
"왜 또"
갑자기 따라오다 말고 은하가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말투로 나를 불렀다.
"빙수 먹으러 가자!"
"... 빙수?"
"그래. 마침 저 앞에 빙수 파는 카페 보이네"
은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확실히 저 앞에 있는 건물에 큼지막한 글씨로 [멜론 빙수 판매 중!] 이라 써있는 현수막이 세워져 있었다,
무심코 카페 안에서 빙수를 먹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멜론을 그대로 통째로 파서 속에 여러 가지 재료들로 가득 담은 빙수는 나와 은하의 시선을 빼앗기엔 충분했다.
"..."
"..."
"... 꿀꺽"
침까지 삼키면서 넋 놓고 바라보는 꼬락서니를 보니 참... 성냥팔이 소녀가 가정집에서 식사를 하는 장면을 볼 때에 모습이 저랬을까?
참으로 아련하게 바라보는 은하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지었다.
그렇게 잠깐동안 멍하니 그곳을 바라보다 은하가 내 쪽으로 고개를 휙 돌린 체 맹렬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 야아"
"..."
"가자앙~ 내가 사줄게"
"아오 제발 붙지 좀 말라고 미친년아!"
갑자기 내 팔을 잡고 아양을 떠는 은하의 행동에 잔뜩 짜증을 부리며 떨어뜨리려 했지만 무슨 거머리마냥 은하는 계속 내게 붙어됐다.
더워 미치겠는 날씨 속에서 이렇게 달라붙은 그녀의 행동에 자연스럽게 온갖 짜증이 피어 올랐다.
"아 알겠으니까 꺼지라고! 더워 죽겠는데 지금 뭐 하는 난리야"
"정말? 그럼 가는 거지?"
"그래 씨발 간다고 가!"
내가 화를 내 듯이 말하자 그제서야 은하는 자기가 원하는 바를 만족했는지 더이상 거추장스러운 짓을 하지 않았고 매섭게 바라보는 내 눈치에도 은하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체 가벼운 발걸음으로 카페쪽으로 걸었다.
'... 에휴'
왠지 모르게 하찮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대충 그러려니 넘어가고 나도 은하를 따라 카페쪽으로 갔다.
솔직히 나도 빙수를 먹고 싶었고 김치짓이긴 하지만 뭐 자기가 산다고 하니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 이거 그래도 너무 얻어 먹기만 하는 거 같은데'
사실 예전에 은하에게 한번 이 문제에 대해서 물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은하 왈.
"여자가 사는 게 당연하지 그게 뭔 개소리야"
"너도 그 뭐냐 더치페인가 뭔가 얘기하는 거야? 글쎄... 솔직히 존나 없어보이는데?"
뭐 그렇다고 한다.
이에 대해선 내가 보수적인면이 강해서 나도 딱히 별다른 생각은 크게 들지 않았다. 애초에 내가 늘 하던 행동이기도 했고.
'그래도 언제 한번 날 잡아서 거하게 대접해줘야겠네'
받은 게 있으면 그 사람에게 보답을 하는 게 예의이다.
뭐 어쨌든 어쩌다 이런 말까지 흘러왔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내 생각은 이랬다.
"뭐 해 설마 이제 와서 마음이 바뀌었다는 건...?"
"아니야 들어갈 거야"
"... 난 또 그새 마음이 바뀐 줄 알고 깜짝 놀랬네"
"얼씨구 문이나 열어. 더워죽겠다"
그렇게 투닥거리며 우리는 카페로 들어갔고 멜론빙수를 시킨 뒤 자리에 앉아 빙수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참 그걸 안 말했네"
대충 시답지 않은 얘기로 시간을 떼우다가 갑자기 할 말이 생각난 나는 은하를 지그시 바라봤다.
"너 헬스 몇 개월치 끊었다고 했더라?"
"나? 6개월치 끊었는데"
은하는 내 물음에 의도를 모르겠다는 듯 나를 멀뚱히 바라봤다.
"사실 나 2주뒤에 회원권이 끝나거든?"
"...?"
"근데 너도 알다 싶이 헬스장에 그 미친 트레이너 때문에 연장은 하지 않을 셈인..."
쿠구궁
어디선가 벼락이 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기분 탓이라 넘기고 나는 조심스럽게 은하의 반응을 살폈다.
충격을 받았는지 은하는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 이건 못했다고 하는 게 더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
뭐 그렇다고 해도 주문한 멜론 빙수가 나오니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기는 했지만 말이다.
"... 너 일부러 그랬지...? 우물우물"
"뭘 일부러 그래. 원래부터 그럴 예정이었는데"
"하아... 그럼 나는 대체 무슨 병신 짓을..."
은하가 크게 낙심해하며 말했다.
'스읍... 그래도 이렇게 보니 조금 미안한 감이 드는데'
입에 떡가루를 잔뜩 묻힌체로 신나게 숟가락질을 하던 은하를 바라보며 나는 슬며시 숟가락을 내려놨다.
"뭐야? 그만 먹게?"
"아니 뭐... 그냥 입맛이 없네"
"그러면 다른 거라도 먹으러 갈까?"
은하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됐어. 이거 먹고 헬스장가야지. 먹기는 뭘 더 먹어"
"... 쳇 그럼 어쩔 수 없지"
"..."
에휴 모르겠다. 뭐 어떻게든 알아서 하겠지. 아직 헬스장에 나온 지 이틀째니까 환불을 신청해도 크게 나쁜 일은 없을 것이다.
"아으...! 이 시려"
"..."
크게 한 숟갈을 집어 놓고 입을 벌린 체 허허거리는 은하의 모습에 실소를 내뱉으며 나는 남몰래 작은 미소를 지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는지 숟가락을 내려놓고 은하는 고개를 푹하고 아래로 숙였다.
"으... 머리가 깨질 것 같아..."
"... 에휴"
가끔 이렇게 요상한 댕청미를 부릴 때도 있었는데 이제는 예전처럼 그렇게 역겹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결국 더 이상 못 먹겠다는 은하의 결정과 함께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나왔다.
빙수 맛은... 그럭저럭 맛있었지만 솔직히 다음번에는 사 먹지 않을 그런 평범한 맛이었다.
"으어 잘 먹었다!"
"..."
뭐 그건 내 사정이고 아까보다 훨씬 활기찬 표정을 지은 은하에겐 나름대로 만족스럽게 느껴졌나보다.
하지만 그 만족스러움도 압도적인 더위 앞에선 차마 1분을 채 넘기지 못했다.
"..."
"..."
헬스장으로 들어갈 때까지 더 이상의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
"여자 보디빌더 대회요?"
소연쌤의 말에 나는 잠시 하던 운동을 멈추고 소연쌤을 바라봤다.
"네. 말씀드리기 조금 부끄럽지만 제가 사실 특별한 커리어가 없거든요. 그래서 이번 대회에 나가기로 했는데..."
소연쌤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
보디빌더 대회라... 뭐 직장인이 커리어를 쌓겠다는데 내가 뭐라 할 이유도 없고 그럼 언제 나가시는 거지?
소연쌤에게 묻자 내일 바로 나간덴다.
대회는 내일부터 이틀간 진행이 되고 때문에 그 이틀을 헬스장에 나오지 못할 것이라 소연쌤이 말했다.
"잘 다녀오세요. 기왕 나가는 김에 우승도 하고 자랑도 하셔야죠"
"아하하... 감사합니다. 진성 회원님"
소연쌤의 미소에 나도 미소로 환답했다.
"... 솔직히 제가 없는 사이에 이나쌤이 이상한 짓거리를 할까 봐 걱정이 되는데..."
사실 제일 중요한 문제는 이것이었다.
나는 데스크에서 졸고 있는 이나쌤을 힐끗 바라보다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건 걱정 마세요. 설마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겠어요. 그래도 명색이 트레이너인데. 여차하면 은하라도 부르죠 뭐"
"... 휴우 그래도 혹시 모르니 가기 전에 제가 한 번 더 주의를 시킬게요"
정말뜻밖이지만 은하가 헬스장에 오면서부터 확실히 이나쌤에 시비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은하가 양아치력이 더 높아서 그런 건가?'
뭐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내게 있어선 딱히 나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은하에게 고맙다고 말을 해야겠지.
어쨌든 그렇게 소연쌤이 물러가고 적당한 거리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은하가 스리슬쩍 내 쪽으로 다가왔다.
"... 무슨 얘기 나눴냐? 둘이 사이 좋아 보이던데"
"제발 이 미친년아. 소연쌤이랑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몇 번을 얘기해야 되는 건데"
"... 큼! 그래서 뭔데? 혹시 나한테 얘기하면 안 되는 내용이야?"
"그건 아니고 내일부터 소연쌤이..."
딱히 숨길 내용도 아니므로 은하에게 앞으로 이틀간 소연쌤이 헬스장에 나오지 못할 거란 걸 얘기했다.
그러자 은하는 묘한 눈빛으로 소연쌤을 잠시 바라보더니 이윽고 다시 나를 바라보고 은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야 근데 내가 저 트레이너쌤보다 몸이 더 좋아 보이지 않냐?"
"... 뭐?"
"아니 대충 보니까 나도 뭐 끌릴건 없어 보이는데..."
"..."
지금 진심으로 얘기하는 건가? 도대체 어딜 봐서 자기가 소연쌤보다 낫다는 거지?
은글슬쩍 눈을 반짝거리며 내 대답을 기대하는 은하의 모습에 기가차서 한숨을 내쉬었다.
"... 아니야?"
"개소리 집어치우고 그런말할 시간에 운동이나 열심히 해. 소연쌤이 너보다 30배는 더 나아 보이는데 끌릴게 없기는 무슨"
"..."
내 말에 은하는 실망스럽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혀를 내두르며 운동을 해야 되니 이만 꺼지라고 말했다.
"... 칫 그래도 가슴은 내가 더 큰데"
뒤에서 은하의 중얼거림이 들렸지만 사뿐히 무시하며 나는 다시 운동의 집중을했다.
너무 뒤를 의식하지 않으려 애를 써서그런지 때문에 데스크에서 이를 갈고 있는 이나쌤의 모습을 눈치챌 수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