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 성수아(2)
* * *
"그래서 무슨 일인데"
일단 진정하고 이곳에 왜 왔는지부터 알아내야겠다.
그리고 아니 씨발 올거면 전화를 먼저 하던가 아무 말 없이 이렇게 들어오면 어쩌자는거야?
"아 그게 저번에 유나언니가 오빠한테 전화했지? 아줌마 생신 문제로 다음주에 가족끼리 같이 식사 하기로"
"그런데?"
"으응 별게 아니라 서로 시간이 맞지 않을 것 같아서 오늘 저녁으로 땡겨졌대. 때문에 나도 내려오는 김에 오빠랑 같이 내려오려고 온거고"
참고로 진아는 이곳 보다 윗 지역에 있는 대학을 다닌다.
하긴 진아 말대로 딱 내려오면서 픽업하면 깔끔은하겠네.
나름대로 합리적이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라?"
그 때 갑자기 진아가 이상한 소리를 내뱉으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바닥에 고개를 숙여 뭔가를 발견하고 멍하니 그것을 집어 올렸다.
"... 오빠 이거 뭐야?"
"또 뭔... 어어?"
"집에 여자 들어왔었어?"
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동생의 손가락에 집힌 것은 어떤 노란색의 기다란 머리카락이었다.
아무래도 은하의 머리카락 같았다.
'씨발 이걸 뭐라고 말하지?'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해명부터 하기로 했다.
"어... 그냥 아는 애가 잠깐 들어왔는데 어쩌다 보니 머리카락이 빠진..."
"했어?"
뭐, 뭐? 이게 미쳤나 거기서 '했어'가 왜 나오는거야.
"하, 하긴 뭘 해 아무것도 안 하고 자기만 했는데! 나 그런 사람 아닌거 알잖아"
"..."
"..."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음...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정보를 말한 것 같다.
씨발 이 분위기를 어떻게 풀지? 서은하 네가 정녕 나를 사지로 몰아가는구나.
"... 그러니까 이 좁은 고시원에서 그 이름모르는 여자랑 오빠가 같이... 잤다고?"
"그게 그러니까 진아야. 이게 이야기를 하자면 조금 복잡한데..."
"그것도 오빠가 굉장히 역겨워하는 노락색으로 염색한 여자랑?"
낭패다. 진아가 내 얘기를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미지의 감각이라던 제6감이 미친듯이 날뛰었다.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하는 게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지금 진아가 왜 이렇게 민감해 하는지 이해가 안됐지만 곱창난 분위기 속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 오빠"
침묵속에서 진아가 입을 열었다. 고요한 진아의 눈빛에 나도 모르게 침이 꿀꺽 삼켜졌다.
그리고 그런 내게 천천히 다가와 손을 어깨에 올린 뒤,
"많이 바꼈구나!!"
"... 어어?"
방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갑작스러운 태세전환에 나는 어안이 벙벙했지만 그러건 말건 진아는 계속 재잘재잘 떠들었다.
"예전에 '나는 무조건 조선시대 남자와 같이 조신한 여자를 만날거야'라는 헛소리를 지껄이던 사람이 결국에 이렇게 타락하고야 말았구나!"
"..."
"만화에서만 보던 이야기가 내 눈앞에서 이루어지다니... 그거 다 개소린줄 알았는데..."
뭔가가 잘못됐다.
"야, 야 잠깐만 네가 잘못 알아들은 것 같은데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정말 자기만 했다니..."
"아아 됐어~ 난 오빠의 타락을 존중해. 까짓것 금발 머리의 태닝한 여자한테 따먹힐 수도 있는 겆..."
"아 좀 미친년아! 지랄 하지 말고 닥쳐봐!!"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아 살면서 처음으로 동생에게 욕을 했다.
나도 모르게 나온 욕에 조금 당황했지만 저 따뜻한 진아의 눈빛을 보니 열불이 들끓어 올랐다.
'씨발... 대체 왜 이렇게 된거지'
배달 주문도 쑥스러워서 못하던 애가 이제는 따먹힌다는 말을 하다니.
씨발 도대체 바뀌는 기준이 뭐인거야?
"그래서 언제 나갈건데"
"응? 아 맞다. 지금 나가지 않으면 조금 아슬아슬한데 일단 나가자 오빠"
"... 그래"
오랜만에 만난 여동생과의 재회는 썩 좋지 않았다.
***
내려가는 길은 교통수단을 이용하기로 했다.
역까지는 택시로 간 뒤 지하철을 타서 집에 가는걸로 말이다.
"그래서 원나잇이야 아니면 여자친구야?"
"..."
옆에서 계속 지랄을 하는 진아의 말은 무시하기로 했다.
어처피 말을 해도 지가 듣고 싶은 것만 들을텐데. 그냥 편안히 생각하기로 했다.
'... 씨발 생각해보니 하는 짓이 내가 아는 누구랑 매우 비슷한데?'
잠깐 노란 머리의 담배를 피고 있던 한 사람이 떠올랐다.
이거 비슷한게 아니라 그냥 머리만 검은 서은하인데?
"오빠 내리자. 여기서 갈아타야 돼"
"어 알았어"
환승역에 도착하자 우리는 지하철에서 내렸다.
앞으로 대충 2번 정도 더 갈아타야되니까... 도착까지 대충 1시간 정도 걸리려나? 뭐 다행히 늦지는 않을 것 같다.
씨발 이번 지하철은 자리가 좀 넉넉했으면 좋겠는데.
아까 30분을 서 있어서 그런지 다리가 미친 듯이 떨리네.
'어?'
멈칫
후들거리는 다리로 앞서가던 나는 뭔가를 발견하고 멈춰섰다.
"... 뭐야 왜 가다가 멈춰?"
진아가 의아해하자 나는 조용히 손가락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하나 사줄까?"
"... 뭐?"
내가 가리킨 것은 다름 아닌 땅콩과자를 파는 집이었다.
'진아 어릴 때 저거 엄청 좋아했는데'
갑자기 옛날 생각이나네 엄마가 가끔씩 땅콩과자를 사오면 진아가 정말 맛있게 먹었는데...
"... 오빠 지금 진심으로 한 말이야?"
"응? 왜 너 저거 좋아하지 않았냐?"
"..."
내 말에 진아는 침묵했다. 이거 뭔가 분위기가 또 이상한데.
뭐지? 설마 바뀌면서 그런 기억들이 사라진건가?
"... 오빠"
"어?"
"나 땅콩 알레르기 있는데..."
"... 뭐?"
진아의 말에 나는 잠시 멍해졌다.
땅콩 알레르기가 있다고? 그런 얘기는 처음 듣는데?
진아는 정말 이해가 안된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진아도 당황스러워했고 나도 당황스러워했다.
"... 아아 맞다! 너 땅콩 알레르기 있었지? 내가 그걸 깜빡했네"
"..."
하지만 결과적으론 내가 실수를 한 거나 다름이 없었다.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에게 알레르기 음식을 사준다고 하다니.
이게 병신짓이 맞기는 한데... 씨발 이러면 너무 억울한데.
"... 크흠! 가자 이러다 늦겠다"
"... 그래 뭐"
그 이후로 나는 진아에게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때문에 돌아오는 길에서 진아의 질문만 잔뜩 대답했다.
***
덜컥
"저희 왔어요"
녹초가 된 몰골로 집에 돌아왔다. 얼마만에 집에 온 건지 우리 집에 풍경이 너무나도 반가웠다.
"왔니? 이제 나갈거니까 그냥 신발 벗지 말고 나가있어"
그리고 나와 진아는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다시 집 밖으로 쫓겨났다.
오랜만에 뵙는 부모님은 별로 달라진 거 없이 무뚝뚝하셨다.
그냥 아빠와 엄마의 위치가 바뀐 정도? 성격은 똑같았다.
'... 만약에 엄마와 아빠가 진아 같이 이상한 성격으로 바뀌셨다면'
어우 씨발 소름이끼치네.
평생을 무뚝뚝하게 사신 분들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전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왔네 타자"
그 사이 저 멀리서 아빠가 모는, 아니 이젠 엄마가 차를 몰고 집 앞으로 오셨다.
우리 가족이 차에 모두 탑승하자 엄마는 페달을 밟으며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아빠에게 말을 했다.
"선물은?"
"주문 했으니 3일 뒤에 도착할거야"
"뭘로 준비했는데?"
"저번에 자동차 방향제가 떨어졌다고 해서 방향제로 구매했어"
음... 내가 지금까지 여자친구는 사귄 적이 없지만 만약 사귀게 된다면 부모님보다 연애는 훨씬 잘할 것 같다.
이게 무슨 비즈니스식 대화법도 아니고 어떻게 정이 하나도 안 느껴지지? 대화가 너무 담백하다.
"진성이 넌 어떻게 지내니?"
유나 아줌마의 생신 선물에 관한 얘기가 끝나자 아빠가 내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이 또한 아무런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 그냥 알바 하면서 학교 다니고 있어요"
"그래. 열심히 다니렴"
"..."
그리고 대화는 이렇게 끝이 났다.
쓸데없는 내용을 얘기하지 않는 것은 우리 부모님의 대화 방식 중 가장 큰 특징이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답답하지는 않았다.
"... 아빠 난 뭐 안 궁금해?"
"넌 궁금하지 않아"
"... 참나"
아무래도 가족 중에서 특별히 크게 바뀐 사람은 진아말곤 없나 보다.
그렇게 된통을 맞은 진아는 갑자기 나를 바라보더니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입을 열었다.
"엄마 내가 오늘 오빠 고시원에 찾아갔거든? 그런데 내가 뭘 발견했는줄 알아?"
... 잠깐만 저 새끼가 설마?
"야 너 장난치지 말고..."
"오빠 방에 노란색으로 염색 한 기다란 머리카락을 찾았다? 심지어 그 머리카락의 주인공이랑 같이 잠을 잠까지 잤다네? 정말 대박이지?!"
진아가 활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멍하니 진아를 바라봤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설마 저런 얘기를 가족 앞에서 말하다니. 아니 이건 역전이고 나발이고 그냥 미친 거 아니야?
"그렇구나. 네 오빠도 슬슬 현실을 받아들일 때가 됐지"
하지만 철벽 같은 엄마의 반응에 그 대화도 그렇게 끝이 나버렸다.
역시 우리 부모님이시다. 아마 내일 지구가 멸망한데도 무표정한 모습으로 그렇구나라고 태연히 말 하실분들이다.
"... 아니 뭐 걱정 안되세요? 사랑하는 아들이 양아치 같은 여자와 잤다는데"
"뭐가 양아치야 너 걔 봤냐? 왜 알지도 못하면서 씨부려"
진아의 말에 나는 발끈해 하며 화를 냈다.
물론 서은하가 양아치가 맞기는 하지만 얘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왜 지랄하는 거지?
노란색으로 염색했다는 이유로 양아치라고 말 하는 건 조금 심한거 아닌가?
"... 에이 재미없어"
내 말은 거들떠도 안 듣고 더이상 아무런 반응이 없자 진아는 이어폰을 끼고 눈을 감았다.
나는 그런 진아의 태도에 미쳐버릴 것 같았지만 에휴... 화를 내봤자 나만 손해지 그냥 나도 신경을 끄기로 했다.
그렇게 다시 조용해진 분위기에서 우리 가족은 식당에 도착할 때까지 더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