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 성수아
* * *
부스럭
"으으... 씨발"
폭우가 지나가고 끈적한 아침이 시작됐다.
화장실이 가고 싶어 잠에서 깼지만 침대에서 벗어나기는 힘들었다.
'... 진짜 누가 나 대신화장실 좀 갔다와줬으면 좋겠네'
가기 존나 귀찮은데 아래에선 신호가 오고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할 것 같아 잠에 취해있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스윽
"아씨...! 그러고 보니 얘도 있었지"
멍한 상태로 바닥에서 자고 있는 서은하를 발견하고 순간 놀라버렸다.
자는 꼬라지는 보니까 얘도 일어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내 옷을 입고 자고있는 은하의 모습에 뭔가 기분이 묘해졌다.
"... 그런데 왜 이불이 나한테 있지? 내가 어제 줬던 걸로 기억하는데"
분명히 어제 이불을 깔아줬는데 그 이불이 내 손에 쥐어져 있었다.
잠시 이불을 만지작 거리다 자고 있는 서은하를 내려다 봤다.
얘는 왜 줘도 지랄이야... 설마 지딴에선 이걸 배려라고 생각한건가?
"... 등신이 그냥 깔고 자라니까"
한심한 행동에 한숨이 나왔지만 덩달아 미소도 같이 나왔다.
이불을 한 번 펼치고 새우처럼 웅크리고 자는 은하에게 조심스럽게 덮어 주었다.
별거아닌 행동이지만 주체가 서은하라 그런가 이런 배려가 왠지 모르게 귀여워 보였다.
쏴아아
화장실에서 볼 일을 마치고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자연스럽게 허기가 졌다.
[10:24]
"... 존나 애매하네. 끼니를 아점으로 해결해야되나?"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씨발 근데 생각해보니까 집에 라면 밖에 없는데?
'... 오늘은 장이라도 봐야지'
요즘 들어 너무 라면만 먹는 것 같다.
이따 저녁에 간단하게 장을 보자고 생각하면서 자연스럽게 라면 두 봉지를 꺼냈다.
보글 보글
라면이 거의 다 익어가자 나는 잠에 빠져있는 서은하를 억지로 깨웠다.
"... 으으"
깨어난 서은하는 눈을 반쯤 게스름히 뜬 체 곧바로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사이 나는 다 끓여진 라면을 탁자에 놓고 접시와 젓가락을 꺼냈다.
그런 다음엔 의자를... 잠깐만 생각해보니까 의자가 한 개밖에 없는데?
"그게 뭐가 문제야 그냥 일어나서 먹으면 되지"
세수를 하고 왔는지 아까 보단 훨씬 잠에서 깨어난 상태로 서은하는 일어선 체로 라면을 먹었다.
라면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렇게 밥까지 알차게 말아먹고 고시원을 나온 우리는 근처 골목으로 들어가 자연스럽게 담배를 입에 물었다.
"후우..."
조용히 니코틴을 들이마시고 내뱉으며 마음을 정리했다.
생각해보니 어제는 정말 나 답지 않은 인생을 산 것 같다.
가족이 아닌 여자와 한 방에서 잠을 자다니 우리 가족이 이 모습을 보면 경악을 할 지도 모른다.
"에취...!"
"... 참 맛없게도 핀다"
뭐 그렇다고 서은하가 밉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정말 짧은 순간에 내 신념들을 많이 깨져버린 것 같았다.
그렇다고 신념을 이제 버린다는 것은 아니고 그냥... 조금 그랬다.
'... 어유 밉상'
"... 뭐야 그 한심하게 쳐다보는 듯한 눈빛은"
"... 뭐 이젠 보는 것도 안되냐 우리 사이에?"
"우리 사이는 지랄"
담배가 타들어간다.
그리고 골목 사이로 한 점에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서은하는 담배를 발로 지진 뒤 나를 바라봤다. 분위기가 묘해졌고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고맙다 유진성"
잠시 뒤 은하가 작게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그것은 지금까지 내가 본 미소 중에 가장 아름다운 미소였다.
한 점 밖에 들어오지 않았던 빛은 어느새 환한 빛이 되어 우리를 쬐어주었다.
***
"허억... 허억..."
거칠게 호흡을 내뱉었다.
입에선 마른 침이 잔뜩 생성되었고 땀 때문에 옷은 점점 축축하게 젖어갔다.
삐삑
"허억... 씨발 이건 대체 뭔 저질같은 체력이야..."
대충 런닝머신을 탄지 20분쯤 됐으려나? 너무 힘들어서 잠깐 휴식을 취하려 런닝머신에서 내려왔다.
저번에 서은하를 부축한 뒤로 어디 다른 근육들을 키우는 것 보다는 그냥 체력을 늘리는 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나였다.
"어우 진성회원님은 어지간한 여성 회원님들보다 훨씬 성실하게 하시네요?"
그렇게 휴식을 취하던 도중 소연쌤이 내게 다가왔다.
몸이 뜨거워서 그런가 소연쌤이 입고 있는 배가 훤히 보이는 운동복이 갑자기 부러워보였다.
"네... 그런데 무슨일로?"
"아! 그냥 별건 아니고 이거라도 마시면서 하세요"
그러면서 소연쌤은 내게 이온 음료를 건내주었다.
차가운 음료수 캔이 내 손안에 들어오자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나는 음료를 건내 받고 멍하니 소연쌤을 바라봤다.
"... 그"
"네?"
뭔가 내게 할 말이 있는지 소연쌤은 잠시 망설이다가 내 시선을 피하면서 입을 열었다.
"운동 열심히 하는 모습이 되게 멋지세요. 진성 회원님이라면 지금처럼 성실하게 운동을 하시면 원하시는 결과를 얻으실거에요!"
"... 아 네!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응원을 받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게 그 헬창들이 헬린이를 볼 때 기특하다고 느끼는 마음인가?갑작스러운 응원에 잠깐 당황했지만 그래도 일단 감사하다고 말을 했다.
개인적으로 낯간지러운 말을 싫어하는 편이라 이런 걸 별로 내키지 않아 하는데 소연쌤의 칭찬은 나쁘지 않게 들려졌다.
그니까 음... 순수함이 느껴진다고 해야되나?
"파이팅!"
그 말을 끝으로 소연쌤은 방긋 미소를 짓고 다른 회원에게 갔다.
정말인지 나보고 성실하다고 말했지만 나는 소연쌤이야 말로 성실함에 대가이다.
'... 은하가 소연쌤에 반만이라도 닮았으면...'
노란색의 긴 머리에 타이트한 옷차림, 그리고 화룡정점으로 어깨에 문신까지.
행색은 빼박 양아치지만 미소는 예쁜...
"... 씨발 근데 내가 왜 걔를 생각하지? "
아무래도 운동을 너무 열심히 했나보다.
어떻게 그 양아치 새끼랑 소연쌤을 비비는거야? 양심이 있어야지.
어우 이거 생각할수록 미안해지네 . 가기 전 닭가슴살이라도 몇 개 사가야겠다.
***
띠리릭
"으어으... 샤워를 해도 존나게 덥네"
날씨가 미처가나보다.
그래도 저녁이 되면 온도가 낮아질 줄 알았는데 별 차이가 없었다.
어쨌든 다시 고시원으로 돌아온 나는 대충 닭가슴살을 냉장고에 처박아두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 씨발 선풍기라도 틀어야겠네"
예전에 대학 축제에서 얼떨결에 타게 된 선풍기를 찾아 플러그를 꽂았다.
버튼을 강풍으로 눌러놓고 선풍기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오씨 공기가 더워서 그런가? 무슨 히터도 아니고 뜨거운 바람이 나오냐"
더운 바람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뭐 어쩌겠는가 좆같지만 없는 것 보다는 났겠지.
그나마 시간이 조금 지나니 대충 아까 보단 시원한 바람이 선풍기에서 나왔다.
"..."
침대에 누운 나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이제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주말이라 수업이랑 알바도 없었고 시험은 그래도 여유가 있었으니... 그렇다고 친구들을 만나자니 변한 그들의 모습을 볼 자신이 없었다.
"... 마트나 갈까? 냉장고가 비었긴 했는데"
하지만 마트에 가려는 생각은 빠르게 접어들었다.
생각해보니 이곳 주위에 가장 가까운 마트가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더위에 20분 동안 걸을 자신이 없었다.
띡 띡띡...
"...?"
그렇게 대충 노가리를 떼우던 중 갑자기 이상한 기계음 소리가 들렀다.
'잠깐만 저거 우리 집 도어락 소린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말 그대로 누군가 지금 우리 집 도어락을 열고 번호를 누르고 있는 중이었다.
상식 밖에 일이 벌어지자 매우 당황한 나머지 나는 멍하니 현관을 바라봤다.
그리고 잠시 뒤.
띠리링
문이 열렸다. 그리고 내가 아주 잘 아는 사람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나는 눈살을 존나게 찌푸리고 내 집에 무단 침입을 한 사람을 바라봤다.
"... 너 뭐야? 니가 여기 도어락 번호를 어떻게 알아?"
"응? 그냥 우리 집 도어락 번호로 했는데 나도 열릴지 몰랐어"
유진아, 하나 밖에 없는 여동생이 현관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 어우 이건 뭔 냄새야? 오빠 환기 안시켜?"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온 진아는 자기 집 안방 마냥 침대에 몸을 던졌고 바로 내게 지적질을 날렸다.
평상시에 나라면 무조건 반박을 했겠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너무 당황해서 말을 할 수 없었다.
"... 너 유진아 맞아?"
"그럼 내가 유진아지 유진아가 아니면 누구야?"
진아는 뭔소리냐는 듯한 형식으로 대답했지만 나는 진아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아는 진아는 조용하고 소심한 성격 때문에 내게 말도 못 거는 그런 아이인데 저건 도대체 뭔...
"... 뭐야 진짜. 자다가 대가리라도 박았어?"
"..."
"... 진짜야?"
늘 쓰던 범생이 안경은 어디에 팔아 먹었는지 괴상한 색상에 렌즈를 끼고 화장을 진하게 한 저 여자가 정말로 진아라고?
"... 하아"
갑자기 머리가 아파왔다.
그런 내 모습에 진아는 어리둥절해 했고 내 입에선진심이 담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