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10. 터닝 포인트
수한은 복잡한 얼굴을 한 강우형을 보내고 난 뒤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서 있는 비서들에 수한은 강우형의 비서들과는 다른 느낌을 받았다. 조금 더 각이 잡혀 있는 느낌이었다.
수한이 문 앞에 서기도 전에 비서 중 하나가 문을 열었다. 그러자 강우형의 사무실보다 조금 더 넓은 나이수의 사무실이 보였다.
‘사진보다 더 잘생기셨네.’
젊었을 때 꽤 훈훈하게 생겨 인기가 많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적이 있다. 그 말대로 나이수는 미중년에 속했다. 아니다. 중년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더 나이가 들었나?
수한이 먼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자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어서 오세요.”
사람마다 풍기는 분위기가 다른데 나이수는 인자하면서도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강우형과 장준환을 섞으면 나이수 같은 사람이 나올 것 같았다.
“일단 앉으세요.”
“네. 알겠습니다.”
소파가 꽤 폭신해서 마음에 들었다. 허리에는 딱딱한 소파가 좋다는데 이상하게 몸에 나쁘다는 게 더 편하고 좋았다. 마실 것을 마시겠냐는 이야기에 수한은 달콤한 커피를 주문했다.
“나도 이상하게 단 게 좋더군요.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단 거 좋아하는 사람은 많으니까요.”
수한만 해도 그런 편이니 나이와 상관없는 취향이었다. 얼마 안 가 나오는 따뜻한 커피를 마시는 동안 관찰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누가 아이돌 컬렉터 아니랄까 봐 나온 습관이었다.
연예계 사람들을 하도 만나다 보니 이제는 이런 시선도 익숙해졌다. 하다못해 강우형도 이런 식으로 쳐다본 경우가 있지 않은가?
“일단 그분께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처음부터 본론을 말하니 그럼 말할게요.”
이야기를 듣는 동안 수한은 인상을 찌푸리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하였다. 그나마 달콤한 커피를 머금어서 인내심이 생겼다. 수한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나이수를 보며 왜 엘 엔터테인먼트가 망하는지 알게 되었다.
‘이건 뭐 대놓고 자기가 미는 아이돌을 주연, 조연으로 해 달라는 거잖아.’
심지어 그중 한 명은 발연기로 논란이 난 적이 있었다. 거의 소원의 발연기와 맞먹을 정도여서 대체 무슨 정신으로 엘 엔터테인먼트에서 배우로 내보낸 걸까 생각할 정도였다. 뭔가 시작하기도 전에 망한 느낌이 물씬 들었다.
‘테스트가 맞기는 하구나.’
정말 어려운 테스트여서 곤란하기는 했다. 결국은 발연기를 극복할 정도로 재미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이수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껏 들떠서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러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허황한 꿈을 꾸고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수한은 갈수록 추가되는 조건에 먼저 말을 끊어 내기로 했다. 나이수가 그에 관해서 불쾌하게 여겨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럼 한 가지 제안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네. 말하세요.”
“일단 주연은 회장님께서 원하시는 아이돌로 하겠습니다.”
일단이라는 말로 시작하자 나이수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수한은 표정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나이수를 보면서 웃음이 나올 뻔했다. 강우형도 표정 관리는 하는 편인데 회장이라는 사람이 이러니 우스운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회장의 자리에 앉았기에 할 수 있는 갑질이기도 하였다.
‘저렇게 표정을 드러내도 아무런 페널티가 없다는 거지.’
특히나 이 자리에 갑(甲)은 수한이라 생각했는데 나이수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나이수는 수한을 철저한 을(乙)로 생각했다.
수한이 ‘붉은 꽃’ 성공의 1등 공신이지만, 나이수는 그 자세한 내용까지는 몰랐다. 아니, 설사 알았다고 해도 나이수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을 거다. 그는 오랫동안 갑(甲)의 자리에 앉아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조연은 제가 원하는 사람들로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엘 엔터테인먼트 내에서 말이요?”
“아니요. 다른 소속사의 아이돌을 데려올 생각입니다. 그리고 신인 연기자도 쓸 생각입니다.”
이제는 대놓고 찡그려진 얼굴에 수한은 헛웃음이 나왔다. 확실히 나이수는 강우형과 그릇이 다른 사람이었다. 그의 능력이 아이돌 가수에서는 통할지언정 배우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전혀 몰랐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무엇을 보완해야 하고, 무엇을 발달시킬지 알지.’
그런 의미에서 한 말이 아니라고 해도 수한은 원하는 대로 받아들였다. 어쨌거나 나이수는 수한의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리 아이들로는 안 된다는 겁니까?”
“네. 안 됩니다.”
딱 잘라 말하는 수한에 나이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런 식으로 그의 의사를 단호하게 끊는 인사는 또 오랜만에 봤다. 나이수는 작은 불쾌감이 들었지만, 일단은 이유를 들어 보기로 했다.
“아무리 내용이 재미있다고 해도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대놓고 연기 잘하는 애들이 없다고 까는 수한의 모습에 나이수는 뒷골이 당겼다. 그러나 수한은 어쩔 수 없었다. 지금 나이수의 눈치를 볼 때가 아니었다. 나이수의 입맛대로 만들었다가는 반드시 망한다.
‘그리고 망하면 내 경력에 치명적이지.’
한창 수한의 주가가 상승 중이다. 그 불을 스스로 끌 필요가 없다. 비록 테스트라고 해도 수한의 경력에 망한 작품을 넣고 싶지 않았다.
“얼마나 자신이 있기에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수한이 대놓고 깠으니 나이수의 심기가 불편할 만했다. 그러나 수한은 다른 것보다 이 일을 연결해 준 장준환을 믿어 보기로 했다.
“그리 말하니 고민은 해보죠.”
“네. 저 혹시 한 가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이 와중에 말이요?”
“네. 이 와중에 말입니다. 소속 아이돌을 한번 보고 싶습니다.”
나이수가 허락하지 않았는데도 벌써 일을 진행하려는 수한의 모습에 나이수는 불쾌감을 어쩌지 못하였다. 장준환이 소개해 줘서 만난 건데 이렇게 오만한 사람은 또 오랜만이었다. 이런 경우에는 둘 중 하나였다. 실력자이거나 사기꾼이거나.
장준환의 소개로 만났으니 전자겠지만, 나이수는 수한이 후자이기를 바랐다.
‘누군가는 대범하다고 말하겠지만, 나는 저런 놈이 딱 싫단 말이지.’
마치 강우형을 보는 것 같았다. 아니, 수한의 경우 강우형보다 더 심한 편이었다. 강우형도 건방지나, 이렇게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나마 수한이 엘 엔터테인먼트에서 일하지 않아 다행이었지, 만약 아래에 있었으면 나대지 못하게 철저히 짓밟았을 것이다.
어쨌든 간에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니 참을 수밖에 없었다.
“좋아요. 말해 둘 테니 보고 가시죠.”
우선 장준환에게 따로 연락을 해 봐야 할 것 같다. 그러므로 지금은 수한에게 함부로 굴지 않기로 했다. 만약 장준환이 신경 쓰는 사람이라면 큰일이니까. 그건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으나, 수한은 이미 나이수를 좋지 않게 평가했다.
“바로 보러 가실 건가요?”
“아니요. 잠깐 통화 좀 하고 가려고요. 만났다고 보고는 해야 하니까요.”
주어를 말하지 않았지만, 나이수는 그 상대가 장준환인 것을 알고 흔쾌히 웃었다. 그리고 비서에게 가서 말하면 될 거라고 말했다.
“미리 연락은 했으니 통화하고 오시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근데 비상계단이 어디인가요?”
“저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수한은 알려 주는 방향으로 걸어가 비상계단 문을 열었다. 그리고 장준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이수에게 말한 대로 보고는 해야 했다.
[만나셨습니까?]
“네. 어려운 과제를 주셨더라고요.”
[그래야 테스트죠. 그래서 할 생각은 있습니까?]
“여기까지 왔는데 당연히 해야죠. 다만 나이수 회장님께서 저에 대해 불만을 표해도 나서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나이수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수한의 뒤에 있는 장준환을 신경 쓰는 느낌은 있었다. 그래서 한 말인데 장준환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사람을 정확하게 보는 편이군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뭐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하라고 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저 지켜만 볼 겁니다. 그래야 공정하니까요.]
“네. 알고 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따로 요청하지 않을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나이수를 어떻게 요리하는지도 테스트에 포함이다. 수한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전혀 아쉽지 않았다. 수한은 전화를 끊고 나서 나이수의 비서에게로 돌아가지 않고 강우형에게 갔다.
“생각보다 빨리 오셨습니다.”
“그런가요?”
시간을 확인해 보니 1시간도 안 지나기는 했다. 그 시간도 나이수가 요구 사항을 말하느라 오래 걸린 것이지 수한이 한 말은 거의 없었다. 수한은 시원한 음료를 내온 강우형의 비서에게 감사함을 표하고 시원하게 마셨다.
‘이제야 한결 살 것 같네.’
나이수 앞에 있을 때는 고구마만 잔뜩 집어삼키는 느낌이었다. 수한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자 강우형이 피식 웃었다. 굳이 그 현장을 보지 않아도 수한이 그 앞에서 얼마나 답답해했을지 알았다.
“저와는 다른 분이죠?”
“네. 완전히요.”
수한은 그 말을 끝으로 차기작에 관해서만 이야기했다. 강우형이 수한에 대해 높게 평가하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나이수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얼마나 사람을 갑갑하게 했는지에 대해 털어놓았을 텐데 수한은 공과 사를 너무 잘 구별해 냈다. 이 정도로 친분을 쌓았으면 쉽게 말할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오늘 저녁에 시간 어떻습니까?”
“오늘은 곤란할 것 같습니다. 다음에 좋은 날로 잡으시죠.”
어차피 오늘 아이돌도 만나야 해서 촉박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강우형은 그런 수한의 말을 기분 나쁘지 않게 받아들였다.
“그럼 좋은 대본이 들어오면 또 뵙겠습니다.”
“그러죠. 사무실로 보내겠습니다.”
사무실이라 쓰고 집이라 읽는 주소에 수한은 쓰게 웃으며 강우형의 사무실에서 나왔다. 수한은 그 뒤로 다시 비상계단을 통해 나이수의 비서에게 갔다.
강우형과 대화한 시간이 꽤 된 지라 비서는 곤란한 얼굴을 하다가 수한을 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연습실에 다 있는 게 아니라서요.”
“괜찮습니다. 다음에 또 와서 보면 되죠.”
수한의 낙관적인 대답에 비서는 여전히 곤란해했다. 나이수의 심기가 얼마나 불편한지 눈치로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 자신 있게 수한이 말해서 정말로 다시 볼 것 같은 예감은 들었다.
수한이 엘 엔터테인먼트 연습실로 가자 한창 안무를 맞춰 보는 남자 아이돌 그룹이 보였다. 한창 인기가 많은 남자 아이돌 그룹 다크니스였다. 해외 투어를 앞두고 있기에 서로 안무를 맞춰 보기 위해 연습실을 찾은 것이 어쩌다 수한과 타이밍이 맞아버렸다.
‘우와. 대단하네.’
수한은 하나같이 다 아는 얼굴이라 반가운 마음과 동시에 소름도 돋았다. 훗날에 사고 칠 사람이 여럿 보였기 때문이다. 사고도 비슷하게 친 걸 생각하면 끼리끼리 모였다고도 볼 수 있었다.
‘아직 마약은 하지 않나 보네.’
눈빛이 하나 같이 맑았다. 물론 몇몇 나른한 눈은 있으나, 정말로 피곤해서 풀린 눈이었다. 수한은 일단 갑작스럽게 찾아온 손님이기에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들으셨는지 모르겠는데 캐스팅 디렉터 김수한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수한이 당연히 자기들이 누구인지 알 거라 생각했는지 다크니스 멤버들은 특별히 자기소개하지 않았다. 물론 옆에 있던 나이수의 비서는 당황하여 눈짓을 보냈지만, 그 눈짓을 봤어도 수한이 무어라 말하나 기다리기만 하였다. 드라마 어쩌고 이야기를 듣기는 했는데 딱히 와닿지 않은 것이다.
“연습하는데 이런 식으로 시간을 빼앗아서 죄송합니다. 몇 가지 질문만 하고 가겠습니다.”
수한은 연기에 관심이 있느냐 같은 일상적인 질문만 한 뒤 연습실에서 나왔다. 앞에서는 웃었던 수한이 연습실에서 나와서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자 수한을 안내한 비서는 괜히 불안해졌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수와 다르게 그의 비서들은 수한에 대해 들은 게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강우형과 연관된 사람이라 수한에 대한 소문이 안 도는 게 이상했다. 무엇보다 강우형이 탐내는 인재가 아닌가?
수한은 잠시 볼을 긁적이더니 비서를 보며 말했다.
“다른 분들은 없을까요?”
“저 중에서는 연기할 만한 친구가 없나요?”
“네. 안타깝게도요.”
말은 안타깝다고 하지만, 하나도 아쉬워하지 않는 얼굴에 비서의 얼굴도 어두워졌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이수가 가장 미는 아이돌 그룹이 저들이었다. 연기 경력이 없으므로 주연으로는 못 내세우지만, 중요 조연으로 내세울 생각은 있었기에 수한의 단호한 대답은 비서를 곤란하게 했다.
수한은 그날 최대한 많은 아이돌을 보고 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단 두 명만을 골라냈다. 이걸 좋은 일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미래에서도 사고 치지 않을 두 명의 여자 아이돌을 골라내 수한은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