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10. 터닝 포인트
장준환은 이광무 감독에게서 받은 연락에 미소를 지었다. 혹시나 수한이 이광무 감독에게 자신에 관해 묻는다면 바로 연락 달라고 미리 말을 해 두었기 때문이다. 장준환은 지난번 강우형과의 만남이 결정적이었을 거라 여겼다. 일부러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을 알고 들어간 것이니 말이다.
‘설마 그렇게 대놓고 거부감을 보일 줄은 몰랐는데.’
강우형이 수한을 탐내고 있다는 것은 장준환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강우형의 밑으로 들어가기에는 수한이 아깝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물론 강우형도 인물은 인물이었다. 장준환에게 큰 이익을 준 인물이기도 하니 말이다.
‘하지만…….’
수한을 조사하다 보니 재미있는 사실이 많았다. 수한 스스로 안목에 자신이 있는 만큼 실패한 경험이 없다. 본래 한 번 정도는 크게 실패해야 그를 경험 삼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하나, 수한은 그것과는 결이 달라 보였다.
‘일단 스스로 자신감이 넘쳐 보이니 신뢰감이 먼저 들긴 하지.’
게다가 확률이 적은 쪽에는 승부를 걸지 않았다. 물론 남들이 보기에는 확률이 적다고 여겼으나, 누구보다 수한은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해 확신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걸 곧 성공으로 만드는 사람이 수한이기도 했다.
장준환은 수한이 거친 사람 중에서 SSS급 슈퍼스타를 맡은 이재성 PD의 말을 가장 신뢰했다. 그 프로그램을 할 때 보였던 수한의 태도가 재미있는 것이다.
‘내가 투자할 가치가 있어 보이긴 하지만.’
장준환은 대체로 투자할 인물이 위기에 빠져 있을 때 투자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래야 준 것보다 더 큰 마음의 빚을 스스로 지기 때문이다.
이광무 감독이야 조금 특이한 경우로 장준환을 돈이 많은 좋은 지인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 같지만, 이광무 감독의 나이를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수한은 달랐다.
‘음…….’
장준환이 만난 수한은 결핍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렇다고 일부러 수한을 궁지로 몰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장준환은 강우형과 다르게 그런 식으로 몰아서 제 것으로 취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쨌든 간에, 미끼는 문 모양이니 수한이 어떤 식으로 연락을 해 올지 기다리면 될 것이다. 이미 첫 만남 때 연락처를 주었으니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온 전화에 장준환은 수한이 양반은 못 된다고 생각했다.
[안녕하세요. 김수한입니다. 저번에 뵈었을 때 제대로 인사를 못 드린 것 같아서요.]
“네. 그때는 너무 갑작스럽게 만났죠.”
[지난번에 말씀하셨던 테스트라는 것을 받아 보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장준환의 미소가 진해졌다. 안 그래도 수한의 진짜 실력을 알고 싶기는 했다. 어디까지 해내는지 알아야 어떻게 써먹을지 계산할 수 있으니 말이다. 만약 실력이 기대에 못 미치면 강우형의 바람대로 될 것이다.
“좋습니다. 제가 아랫사람에게 시켜서 메일을 보내도록 하죠. 그걸 보고 판단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쉬고 계시는데 폐를 끼치는 건 아닌가 싶네요.]
“아닙니다. 그럼 좋은 대답을 기다리겠습니다.”
장준환은 곧바로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얼마 안 가 전화를 받는 소리에 먼저 인사를 건네니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쩐 일로 전화했습니까?]
“요즘 회사에 좋은 일이 많다고 하여 전화했습니다.”
[아! 드라마 잘된 거요? 운이 좋아서 그런 겁니다.]
실제로 그리 생각하지 않으면서 믿고 싶은 걸 말하는 나이수의 모습에 장준환은 비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으며 차기작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을 띄워 보였다.
[그래야죠. 차기작은 아이돌을 주인공으로 내세워서 하고 싶은데 이게 잘될지 모르겠네요.]
‘붉은 꽃’의 성공으로 확실히 주눅이 든 상태였다. 그 오만한 나이수가 이럴 정도이니 엘 엔터테인먼트 내에서 강우형의 기세가 얼마나 드세졌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리 쉽게 엘 엔터테인먼트를 먹는 건 재미가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 내게 적의를 보낸 대가도 치러야 할 테고.’
“제가 알게 된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를 기용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뭐 하는 친구인데요?]
“캐스팅 디렉터입니다. 이번에 붉은 꽃을 담당했던 친구인데 제가 눈여겨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도 좀 투자를 해 보려고 하니까 돈에 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강우형이 알면 크게 화를 낼 일을 장준환은 아무렇지 않게 하였다. 덕분에 핸드폰 건너편에서는 좋아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장준환이 내준 테스트는 간단하였다. 아이돌을 주연으로 내세워 드라마를 성공시킬 것. 수한이 이 테스트 내용을 받았을 때 어떤 표정을 지을지 굉장히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
“하하.”
처음에 메일을 보고 수한은 자신이 글을 잘못 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아무리 봐도 내용은 변한 게 없었다. 다르게 해석할 여지도 없었다.
‘아이돌로 드라마를 성공하게 해 보라고?’
그것도 아이돌을 주로 구성된 드라마를 만들라는 거였다. 돈은 마음껏 내줄 테니 돈 걱정은 하지 말라고 하는데 수한의 어깨가 너무 무거워졌다.
‘게다가 엘 엔터테인먼트라니…….’
자세한 건 엘 엔터테인먼트 회장인 나이수에게 직접 들으면 된다고 하는데 수한은 정신이 다 아찔해졌다. 지금 나이수와 강우형이 회사 내에서 엄청 싸운다고 들었다. 강우형에게 직접 말을 듣지 않아도 하도 들려오는 게 많아서 수한은 조용히 강우형을 응원했다.
‘이왕이면 아는 사람이 잘됐으면 하지.’
게다가 강우형은 배포도 커서 보너스 수당을 잘 챙겨 주었다. 그래서 수한은 강우형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강우형과 맞서는 꼴이 아닌가?
‘지난번에 봤던 초조함이 그래서 그런 건가?’
장준환에게 버림을 받았다든가. 막 이상한 상상이 들면서 수한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강우형에게 양해를 구하고 일을 진행해야 할 것 같다. 강우형과 별로 척을 지고 싶지 않았다.
‘물론 안 한다는 선택지도 있지만.’
솔직히 말해 수한도 이 눈의 한계를 알고 싶기는 했다. 더불어 제 능력에 대한 도전 의식이 생기기도 했다. 언제까지 이 일을 할지 모르는데 이런 것까지 해 봐야 뭐라도 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고.’
수한은 팔짱을 낀 채로 앉아 우선 어떤 이야기로 가야 대중들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아이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일단 엘 엔터테인먼트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어떤 아이돌이 있는지 대충 살폈다.
‘아이돌이 대부분 20대 초반이나 더 어린 편이네.’
수한은 조용히 무대 위에서의 모습을 검색해 보았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결정을 내렸다. 가장 아이돌다워도 되는 모습을 화면에 보여 주면 되는 것이다.
‘아이돌 학교를 만들면 되겠네.’
연예인이 되기 위해 경쟁하고 사랑하고 우정을 그리는 드라마를 만들면 된다. 수한은 유지아 작가를 잠깐 떠올렸지만, 고개를 저었다. 유지아 작가와는 전혀 맞지 않는 장르 성향이었다. 그러다가 재미있는 생각이 들었다.
‘공모전을 하면 되겠네.’
상금을 꽤 크게 걸고 하면 관심 있는 사람들이 많을 거라 여겼다. 물론 그전에 나이수에게 허락을 받아야 일을 진행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나이수가 뭘 원하는지 구체적으로 들어야 하니 그와 만나야 무언가를 결정할 수 있다.
‘그래도 마음에 걸리는 건 역시 강우형이란 말이야.’
보복을 안 할 인사로는 절대 안 보여서 문제였다. 어차피 이 업계에 들어서려면 대형 기획사의 눈치를 안 볼 수는 없어서 수한은 강우형과 좋게 지내고 싶었다. 강우형이 자신을 두고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아이돌 학교라 재미있겠다.’
유치하지만, 재미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 수한은 시청률보다는 화제성을 목표로 잡으며 제안서를 만들기 시작했다.
***
‘어색하네.’
강우형과 만날 때와 차별을 두고 싶지 않아서 편하게 입고 왔다. 게다가 수한은 나이수와의 관계에서도 자신이 지금은 갑(甲)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래서 조금 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엘 엔터테인먼트에 도착했다.
“회장님을 만나 뵈러 왔습니다.”
당연히 강우형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던 안내원은 살짝 당황한 눈치였으나, 얼마 안 가서 나이수에게 연결했다. 바로 올라와도 된다는 말에 수한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했다.
띵. 엘리베이터가 도착한 소리에 수한이 고개를 드니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아니, 여기 회사 큰 편 아니었어?’
왜 하필 올라가는 길에 강우형과 만난 건지 수한은 어색한 미소가 저절로 나왔다. 물론 오기 전에 강우형에게 양해를 구하긴 했지만, 강우형은 아무렇지 않게 괜찮다고 했다. 그래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일렁이는 눈빛이 심상치가 않았다.
‘말로만 괜찮다고 한 건가 보네.’
수한은 남의 회사에 와서 이렇게 눈치를 보는 건 또 처음이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으며 웃으면서 인사를 먼저 건넸다.
“만날 수도 있다고 생각은 했는데 여기서 마주칠 줄은 몰랐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회장님과 대화를 마치고 나면 저와도 시간을 내주시죠.”
“아! 네. 알겠습니다.”
누가 봐도 나가는 길로 보였는데 강우형은 엘리베이터에서 나오지 않고, 안에서 수한이 타기를 기다렸다.
수한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살짝 황당했지만, 그래도 뭐 말로는 화내지 않았으니 수한은 괜찮다고 여기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살짝 후회했다. 이 좁은 공간 안에서 숨 막히는 분위기가 흘렀다.
강우형은 제법 딱딱한 말투로 말문을 열었다.
“회장님이 원하는 대로 드라마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아직 대화를 안 나눠 봐서 잘 모르겠는데요.”
게다가 엘 엔터테인먼트 아이돌도 한번 봐야 했다. 여기서도 연기를 잘 해야 하는 아이돌을 골라내야 하니 말이다.
‘물론 얼굴로 연기를 극복하는 배우가 있기는 한데…….’
평생 연기력 논란에 시달릴 걸 생각하면 좋은 현상은 아니었다. 수한의 무덤덤한 대답이 강우형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이마를 만졌다.
“원래는 바로 저와 차기작 이야기를 하자고 하려고 했는데 일이 꼬여 버렸네요. 아직 드라마도 제대로 고르지 못한 상태인데 이러면 미뤄질 수밖에 없겠습니다.”
강우형이 많은 대본을 수한의 앞에 가져다 뒀으나, 수한은 무엇 하나 고르지 않았다. ‘붉은 꽃’을 바로 잡아냈던 과거가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수한의 눈은 까다로운 편이었다. 그래서 다른 대본을 모집하던 중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진행될 줄은 강우형도 몰랐다. 그리고 그 배후에 있는 장준환의 존재에 조용히 이를 갈았다. 그 가운데 산뜻한 수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요. 동시에 진행해도 상관없을 것 같은데요.”
수한의 말에 강우형의 고개가 돌아갔다. 수한의 자신감이 넘치는 얼굴에 강우형이 먼저 당황했다. 하지만 그 말대로 수한은 상관없다고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수한의 역할은 캐스팅이었다. 드라마를 직접 제작하는 감독의 자리에 선 사람이 아니니 괜찮았다.
“이사님이 괜찮다고 하면 동시에 하자고요.”
물론 모든 게 완벽하게 준비되었을 때의 일이지만, 수한은 그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