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9. 캐스팅 디렉터
“선배님. 오랜만입니다.”
수한이 먼저 악수를 청하자 동현이 수한의 손을 꼭 잡았다. 수한은 그사이에 단단했던 덩치가 축소된 것을 보고 씁쓸해했다. 이럴까 봐 가지 말라고 한 건데. 수한이 안쓰럽게 동현을 보자 동현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었다.
“괜찮아. 네 말대로 거기는 사람이 있을 곳이 아니더라.”
“이제라도 그만두셔서 다행입니다.”
그 지옥에서는 빨리 나오는 게 답이었다. 동현 또한 수한의 말에 공감하는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뭐. 나만 그만둔 건 아니야.”
“네?”
“최명훈도 같이 그만뒀어.”
설마 여기서 그 이름을 들을지 몰랐기 때문에 수한은 깜짝 놀랐다. 수한은 설마 하며 동현을 봤다.
“같이 기획사 차리기로 했어.”
수한은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설마 자신이 빠진 자리에 동현이 들어가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더블에스 엔터테인먼트에서 함께 고생한 모양인지 명훈의 이름을 담는 동현의 표정은 굉장히 밝았다.
“괜찮겠습니까?”
“아… 너와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는데. 너무 선입견을 품고 안 봤으면 좋겠어. 더블에스에서 봤을 때는 사람이 괜찮았거든.”
수한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차단해 버린 동현의 모습에 수한은 그가 단단히 홀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수한 또 저 시기에 딱 그랬다. 더블에스 엔터테인먼트에서의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의지할 사람이 명훈밖에 없었다. 그래서 누가 명훈에 관해서 나쁜 말을 하면 화내기 바빴다.
수한은 명훈이 달라졌다는 말을 절대 믿지 않았다. 3년 전이라고 하지만, 우연히 마주쳤을 때도 선의를 가장한 악의를 보인 게 명훈이다. 그때도 더블에스 엔터테인먼트에 있던 시절이 아닌가? 절대 믿을 수 없었다.
‘그래도 이건 말려야 하지 않을까?’
수한은 동현을 똑바로 바라봤다. 동현은 더블에스 엔터테인먼트에 들어갈 때처럼 단단한 눈빛을 하였다.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을 그런 눈빛이었다. 이런 사람에게는 어떠한 설득도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수한은 마음과는 다른 말을 했다.
“만약 힘든 일 생기면 저한테 연락하십시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네 호의는 좋게 받아들일게. 그래도 기획사 차리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차현 씨 일을 하고서 차릴 생각이야.”
“최명훈은요?”
“그 기간에 돈을 구하러 다니기로 했어. 더블에스에서 나오기 전에 돈 나올 만한 곳을 찾아본 모양이야. 꽤 자신 있어 해서 기대 중이야.”
수한은 처음 명훈과 기획사를 차리기로 마음먹었을 때 굉장히 막막해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 가운데 명훈은 어디서 돈을 구한 건지 돈을 구해 와 이것저것을 준비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명훈이 없었더라면 기획사는 차리지 못했을 거다. 그렇다고 해도 수한은 전혀 감사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아! 그래서였나?’
함께 기획사를 차렸으나, 소속 연예인들이 대표로 더 따르는 건 수한이었다. 명훈이 바깥에 돌 때 수한은 적극적으로 연예인들을 돌보았다. 정작 열심히 다닌 건 명훈인데 존경은 수한이 받으니 명훈이 더 환장할 수밖에 없었다.
수한이 아는 명훈은 돈에 관한 욕심도 있지만, 명예욕도 있는 사람이었다.
수한은 자신과 비슷한 길을 걷게 될 동현을 보자 입 안이 썼다. 그래도 지금 당장은 뭐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없다. 일단 지금은 지금 해야 하는 일을 하는 수밖에 없다.
“드라마 촬영하는 동안 차현 씨를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일자리 소개해 줘서 고맙다.”
“그럼 차현 씨가 저쪽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만나 보십시오.”
일부러 시간 차이를 두고 약속을 정하였다. 수한은 차현이 있는 곳으로 동현을 보낸 후에 성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성민 덕분에 무사히 일이 성사되었으니 감사하다는 표현을 하고 싶었다.
[고마우면 술 한잔 어때?]
“간만에 소고기 어떻습니까?”
[좋지.]
“네. 그러면 제가 약속 장소를 문자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이 일이 잘 되면 수한 또한 큰돈과 더불어 좋은 경력을 가지게 되므로 일단은 동현의 일은 머릿속에서 지우기로 했다. 지금은 드라마가 성공하는 게 더 중요했다.
***
남일은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약속 장소로 걸어갔다. 이전에도 와 본 적이 있는 한정식집이다. 전에 왔을 때는 회장이 계산했으나, 이번에는 자신이 계산해야 한다. 그만큼 큰돈을 쥐게 되었으니 큰 불만은 없었다.
그게 다 김수한이 만들어 놓은 성과라고 누군가는 말하지만, 남일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수한의 의견을 받아 준 게 남일이다. 결국, 남일의 성과였다.
“크흠.”
“오셨습니까?”
이전에는 먼저 들어가 있더니 오늘은 앞에서 강우형과 마주쳤다. 남일은 미소를 지었지만, 눈은 전혀 웃지 않았다. 그와 다르게 강우형은 환하게 웃으며 남일을 반가워했다. 그 반가움에 남일은 의아해했다.
“기분 좋은 일이 있으신가 보네요.”
“요즘 제가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수월하게 풀리고 있어서요.”
얼마 전에 음주 운전 사고로 난리 났던 것만 기억하기에 남일은 강우형이 드디어 미쳤나 잠시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강우형은 전혀 미치지 않았다.
“그런 의미로 오늘 저녁은 제가 사겠습니다.”
강우형이 문을 열고 먼저 안으로 들어가자 회장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이에 남일은 크게 불쾌감을 느꼈다. 누구 맘대로 저녁을 산다, 만다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나 회장의 앞에서는 그저 웃을 뿐 기분 나쁜 티를 내지 않았다.
“강 이사. 좋은 일 있나 봐.”
“네. 제가 전부터 하고 싶었던 일을 하게 되었거든요.”
“아! 그거? 용케 허락했네?”
“얼마 전에 음주 운전으로 시끄럽지 않았습니까? 그걸 수습하는 대가로 허락을 받았습니다.”
주어를 빼놓고 말해서 남일은 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가끔 셋이 있다 보면 이런 일이 종종 있었다. 그때마다 불쾌했지만, 남일은 회장에게 잘 보여야 했다.
회장은 잘나간다고 해도 무시할 인물이 절대 아니었다.
뭐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회장은 큰돈을 거머쥔 인물이었다. 남일도 그에게 큰 도움을 많이 받았기에 감사하는 마음을 늘 가졌다.
“그보다 서 대표님께는 제가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갑자기요?”
“아니요. 실은 3년 전부터 드리고 싶던 말씀이었습니다.”
남일은 3년 전이라는 말에 무슨 말을 하려는지 깨닫고 주먹을 꽉 쥐었다. 강우형의 입가에 대놓고 걸린 비웃음에 남일의 머리에 열이 올랐다. 그러나 남일은 강우형의 말을 막지 못했다.
“김수한을 쫓아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그 친구! 요즘 캐스팅 디렉터로 잘나가고 있다지?”
“회장님도 아십니까?”
“그럼. 이번에 이광무 감독의 영화에 들어간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이광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거장 감독 중 하나였다. 해외에서도 상을 받아 온 경력이 있는 감독이자 대한민국의 자랑이었다. 이광무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면 칸에 가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이 나올 정도여서 이광무 감독은 모든 배우가 선망하는 감독이었다.
“김수한이요?”
아무리 수한과 친하게 지낸다고 해도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기에 강우형이 답지 않게 놀란 얼굴이 되었다. 물론 함께 자리에 있던 남일 또한 경악한 상태였다.
“확실하지는 않아. 카더라야. 흘려들어.”
그러나 두 사람 모두 회장의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말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돈이 있기에 다른 이보다 더 정확하고 은밀한 소식이 회장에게 들어갔다. 그래서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서 대표님, 설마 방해할 생각을 하지는 않으시겠죠?”
“제 회사에 있던 사람인데 설마요. 잘 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여러 번 훼방을 놓았던 거로 아는데 그건 그저 소문이겠죠?”
“네. 소문입니다. 요즘 그런 소문 누가 믿습니까?”
웃으면서 말하고는 있지만, 서로의 가슴에 칼을 품었다. 술을 마시면서도 두 사람의 눈에 절대 힘이 풀리지 않았다. 그 결과 술을 누가 더 잘 마시나 경쟁 아닌 경쟁을 하게 되었다.
그런 현장을 지켜보던 회장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회장은 두 사람과는 다른 생각을 했다.
‘김수한이라…….’
처음에는 별 관심 없던 인사였지만, 김수한을 두고 싸우는 두 사람을 보고 있으니 호기심이 생겼다. 더불어 이광무 감독이 콕 짚은 인사라고 하니 언젠가 한번 만나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물론 저 두 사람에게는 비밀로 하고 말이다.
***
수한은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도 약속은 다가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피곤해 죽겠지만, 그래도 사람을 만나는 건 좋았다. 특히나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는 건 더 좋았다.
“실장님!”
매니저 일이 바쁘다는 것을 아는데도 먼저 와서 기다리는 성민의 모습에 수한은 가슴이 다 뭉클했다. 3년 동안 일부러 그를 만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예전과 다르게 마른 얼굴이 더 잘 들어왔다.
“김수한이!”
3년이 지났는데도 부르는 방식이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수한은 순간 울컥했지만, 마음을 가다듬으며 성민의 앞에 앉았다. 수한이 약속 장소로 정한 곳은 예전에 성민이 소고기를 사 준 적이 있던 그 가게였다.
“오랜만입니다.”
수한이 먼저 밝게 인사하자 성민이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는 게 보였다. 남자가 무슨 눈물이냐고 말하고 싶었으나, 성민이 먼저 눈물을 보이자 애써 가라앉힌 감정이 다시 올라왔다.
“여기요. 꽃등심 이 인분 주세요!”
“야. 무슨 첫판부터 꽃등심이야. 다른 거 먹고 나중에 먹어.”
“예전처럼요?”
“그래.”
결국, 주문을 취소하고 다른 싼 부위부터 먹기로 했다. 그래 봤자 똑같은 한우여서 가격 면에서 크게 달라지지도 않지만, 두 사람은 만족했다.
“살이 많이 빠지셨네요.”
“일이 많아서 그래. 네가 싼 똥을 내가 치우느라 바빴어.”
“에헤이. 먹는 자리에서…….”
“맛만 좋으면 됐지. 근데 너 예전이나 지금이나 고기 잘 굽는 건 똑같다.”
“사람이 그렇게 쉽게 변하나요?”
수한이 잘 구워진 고기를 성민의 접시 위에 올려 두자 성민은 씁쓸해했다. 성민도 그리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남일을 보며 그 생각이 달라졌다.
“너 간 이후로 더 모질어지셨어.”
“실장님이 마음고생 많이 하셨겠네요.”
“그래 봤자 너보다 많이 했겠냐.”
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수한은 고기를 입에 넣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 일을 하면서 좋은 것을 많이 먹고 다니기는 하지만, 수한은 이 고기가 최근에 먹은 것 중에 가장 맛있었다.
“나중에 퇴사하고 싶으면 연락하십시오. 일자리 알아봐 드리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너보다 인맥이 적을까?”
수한이 진심이냐고 자신 있는 표정을 짓자 성민의 자존심이 팍 깎였다. 수한의 직업 특성상 수한이 더 넓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내가 자리를 구걸하지는 않겠다 이거야.”
“구걸이 아니라 스카우트겠죠.”
수한이 잔에 소주를 따르자 성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수한이 그에 관한 대답은 하지 않았으나, 수한의 계획을 대충 알아챘다.
“그래. 나중에 스카우트해라. 여기서는 너무 힘들어서 못 버티겠다. 특히 고주혁이 때문에 요즘에 머리가 아파.”
“고주혁 씨요?”
수한이 놀란 표정을 짓자 성민이 전혀 모르냐는 식으로 수한을 봤다. 수한이 아는 건 국내에서도 얼굴 보기 힘들다는 것뿐이었다. 물론 성격이 까칠해졌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으나, 직접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이라 대충 흘려들었다.
“주혁이 지금 상태 되게 심각해.”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심각한 성민의 표정 때문에 수한은 그 말을 진지하게 듣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