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9. 캐스팅 디렉터
차현. 대한민국에서 성실한 청년의 이미지를 가진 남자 배우다. 차현은 비슷한 나이대의 여자 배우 유진과 공개 연애를 하면서 사랑꾼 이미지를 착실히 챙기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 사랑꾼 이미지는 절대 만들어진 이미지가 아니었다.
‘내가 기억하는 미래에서도 잘 살았으니까.’
차현은 현재 사귀고 있는 배우 유진과 무사히 결혼까지 골인하고 나서도 반듯한 이미지로 온 국민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재미없는 성격이라 하지만, 그래서 더 가정에 충실한 느낌이다.
수한은 친구를 잘 사귀는 것도 좋지만, 그런 식으로 사는 것도 나쁘게 보이지 않았다. 물론 같은 남자로서 차현처럼 할 수 있느냐고 하면 아니었다. 수한이 보기에는 그가 아내 유진을 너무 사랑해서 그렇게 행동한 거로밖에 보이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차현처럼 살려면 그런 사람과 만나서 결혼해야겠지.’
겉보기에는 차현만 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 부부를 보면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사이였다. 차현의 우유부단한 성격을 유진이 커버했고, 유진의 냉정한 성격을 차현이 부드러움으로 감쌌다.
‘부부란 그런 거지.’
그 부부를 보고 처음으로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니 오죽할까 싶었다. 아무튼, 지금은 한창 연애하는 시절이라 수한은 차현을 만날 생각을 하니 기대가 되었다.
“안녕하십니까. 김수한입니다.”
푸른 엔터테인먼트와 마찬가지로 직접 기획사에 방문하였다. 그런데 푸른 엔터테인먼트와 다르게 회사 규모가 매우 작다. 유지영이 있었던 바늘 엔터테인먼트보다 더 작아서 수한은 잘못 찾아왔나 의심했다.
그래도 건물을 보고 판단하는 건 좋지 않아 사무실까지 올라갔는데 여기는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았다. 사무실 관리를 전혀 안 한 건지 허름한데다가 더러워서 냄새까지 났다. 게다가 사람까지 안 보여서 수한의 마음이 심란해졌다.
‘내가 맞게 찾아온 게 맞나?’
의심에 의심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때 안쪽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남자 한 명이 나왔다. 수한은 곧장 남자에게 다가갔다. 남자는 사무실 직원치고는 허름한 복장이었다. 직원보다는 건물 관리인으로 보였다.
“여기 기획사 아닌가요?”
“맞는데 사장이 돈 갖고 튀었어요.”
“네?”
“이 건물도 경매에 넘어가게 되었으니까 여기 사장 찾는 거면 다른 데 가는 게 좋을 거요.”
수한은 황당해서 말이 안 나왔다. 수한은 열심히 미래 기억을 뒤적였다. 그러나 수한의 기억이 아무리 좋다고 한들 이런 것까지 기억할 리가 없었다.
‘그래. 이런 기획사가 흔하기도 했고.’
수한이 명훈과 기획사를 차렸을 때 이런 소식이 곳곳에서 들렸었다. 그때마다 수한과 명훈은 사람의 신뢰를 깨는 짓은 절대로 하지 말자고 다짐하였다. 물론 그 약속은 명훈이 깨 버리면서 사라졌지만 말이다.
수한이 고개를 돌리자 반쯤 찢긴 포스터가 보였다. 기획사에 속한 연예인들의 모습이 담긴 포스터였다. 그중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건 차현이지만, 다들 어느 정도 얼굴이 눈에 익은 상태였다.
이런 배우들을 데리고도 이럴 수 있다는 게 사람을 참 허망하게 했다.
‘그럼 차현 씨는?’
수한은 그동안 쌓아 두었던 인맥을 이럴 때 동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한이 전화를 걸자 상대는 흔쾌히 차현의 연락처를 알려 주었다.
수한은 지체하지 않고 곧장 차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수한이 말을 하기도 전에 차현이 먼저 말을 했다.
[대표님 위치는 저도 모릅니다. 일방적으로 계약 해지만 했으니까요.]
누가 다정다감의 대표가 아니랄까 봐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조곤조곤 흥분하지 않고 말하는 게 마음에 들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캐스팅 디렉터 일을 하는 김수한이라 합니다.”
[아? 아! 안녕하세요. 배우 차현입니다.]
당황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곧 침착한 목소리가 나와 수한이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해야 할 말은 놓치지 않고 말했다.
[저를 드라마에 캐스팅하고 싶다고요?]
“그렇습니다. 원래는 기획사를 통해 먼저 말씀을 드리고 싶었는데 현장에 와 보니까 말이 아니네요.”
[거기까지 찾아가셨어요? 일이 이렇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차현 씨 잘못이 아닌걸요. 차현 씨가 괜찮다고 하면 제가 직접 찾아가겠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가겠습니다. 저 때문에 먼 길까지 가셨는데요.]
역시 사랑꾼 이미지가 괜히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차현은 모든 사람에게 다정한 성격이었다. 그래서 유진과 같이 냉정한 성격의 사람이 필요한 거다.
웃기게도 모두에게 그러면 누군가 한 명쯤은 바람을 의심할 수도 있을 텐데 유진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에게 다정하게 대해도 유진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눈빛부터 달랐기 때문이다. 꿀이 뚝뚝 떨어져 누가 봐도 차현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유진임을 알게 하였다.
몇 번의 사양과 거절 끝에 결국 수한이 차현을 찾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차현이 더 늦게 도착했다는 거다. 일부러 약속 장소를 수한에게 더 가까운 장소로 정한 게 틀림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차가 막혀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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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현 – 스타성: S, 연기력: S, 가창력: B, 춤: B, 인지도: S, 기타: S, 성장 가능성: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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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모자도 쓰고, 마스크도 했는데 옷맵시부터 달라서 이미 카페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차현에게 향했다. 더불어 수한 또한 훈훈한 외모를 가졌기에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제가 약속 장소를 잘못 잡은 걸까요?”
“아닙니다. 어차피 어딜 가도 비슷할 겁니다.”
그나마 사람이 많지 않은 카페여서 대화를 나누기에 나쁘지 않았다. 수한이 미리 준비한 커피를 가져오자 차현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커피를 마셨다. 누가 배우 아니랄까 봐 그런 사소한 행동도 다 화보 같았다.
수한은 커피를 다 마실 때쯤 대본을 꺼내 차현에게 건네주었다.
“사전 제작으로 만들어질 드라마이고, 이미 완고가 난 상태입니다.”
“좋은 조건이네요. 지금 읽어 봐도 되겠습니까?”
“네. 기다리겠습니다.”
차현이 대본을 읽는 동안 수한은 외국 배우들의 프로필을 열심히 봤다. 아직 시간이 있다고 하지만, 어렵기는 했다.
‘이 눈으로 직접 확인하면 좋을 텐데.’
실물로 직접 보지 않으면 능력이 작동하지 않으니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렇다고 해도 수한은 이 능력에 매우 감사했다. 덕분에 캐스팅 디렉터로 먹고사니까 말이다.
수한이 반 정도 보고 있을 때 테이블 위로 책이 내려앉는 작은 반동이 느껴졌다.
“좋은 작품이네요. 하고 싶습니다.”
“그 전에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제작사는 엘 엔터테인먼트입니다.”
수한은 그게 무슨 문제냐고 쳐다보는 차현 때문에 더 당황했다. 전윤진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다. 그 순간, 수한은 이상하게 예진이 떠올랐다.
“혹시 최근에 음주 운전 사건 모르십니까?”
“네? 그게 무슨 사건인데요?”
설마 했는데 정말이었다. 차현도 예진처럼 세상일에 관심이 없는 타입이었다. 수한은 이래서 유진이 차현을 걱정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한은 이런 일에는 오히려 어물쩍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수한이 관련된 일을 말하자 차현은 잠시 고민하는 것 같더니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하고 싶네요. 작품이 마음에 들어요. 그리고 캐스팅 디렉터를 맡은 수한 씨도 마음에 들고요.”
“그렇습니까?”
“네. 유진이 말로는 눈탱이 맞는다고 하던데. 수한 씨라면 제 눈탱이를 때릴 것 같지는 않네요. 그리고 조건도 좋고, 상대 배우분도 연기를 굉장히 잘하시는 분이잖아요. 그런데 제가 매니저가 없어진 상태라 곤란한데 이래도 괜찮은 건가요?”
아마 유진이 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제정신이냐고 뭐라 할 것 같은 느낌이 수한은 강하게 들었다. 더불어 그녀가 수한까지 안 좋게 생각하면 곤란했다. 배우 유진도 연기를 잘해 수한이 탐내는 연예인이었다.
‘무려 연기대상 수상자잖아.’
아직은 빛을 보지 못했지만, 결혼 직전에 한 작품에서 뛰어난 연기력을 보여 지상파 연기대상을 거머쥐었다. 지금은 차현과의 공개 연애 때문에 캐스팅이 잘 안 된다는 소식을 들어 수한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혹시 유진 씨와 작품 고를 때도 상의를 하는 편입니까?”
“아니요. 작품에 대해서는 서로에게 관여하지 않기로 했어요.”
“그래도 이번에는 한번 상의해 보는 게 어떻습니까?”
“네? 어째서요?”
“나중에 눈탱이 맞았다고 저를 오해하지 않을까 해서요.”
수한이 넉살 좋게 웃자 차현은 고민하는 것 같더니 곧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나타나는 유진의 모습에 수한은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캐스팅 디렉터 김수한이라 합니다.”
수한을 못 알아본 차현과 다르게 유진은 수한의 이름을 들어본 모양인지 반갑게 인사했다. 수한은 면접 프리패스 상으로 나중에 유명해지는 유진의 단아한 얼굴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을 이런 식으로 먼저 보게 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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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 – 스타성: S, 연기력: S, 가창력: A, 춤: C, 인지도: B, 기타: S, 성장 가능성: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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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성은 있지만, 인지도는 확실히 떨어졌다. 작품 활동을 원활하게 하지 못하니 생긴 문제였다.
“얘기는 대충 들었어요.”
다행히 수한을 나쁘게 보지는 않는 듯했다. 게다가 수한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으니 오히려 호감 섞인 미소를 지었다. 유진은 공적인 자리인 만큼 차현의 이름 뒤에 씨를 붙여 가며 말했다.
“일단 차현 씨가 이보다 좋은 조건으로 계약하지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은 드는데 문제는 기획사 문제로 매니저가 없다는 거예요.”
기획사 이야기를 하면서 유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설마 그 회사가 이런 식으로 차현의 뒤통수를 칠 거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 화가 났다. 그러나 이 와중에 계약 해지라도 해 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잘못했으면 계약에 묶여서 드라마 촬영을 못 했을지도 몰라.’
그뿐 아니라 소송에서 이기기 전까지는 다른 기획사로 가는 것도 힘들어지니 천만다행이었다.
“그럼 임시로 엘 엔터테인먼트에 도움을 청하는 건 어떻습니까?”
“거기가 여력이 돼요?”
세상일을 모르는 차현과 다르게 유진은 잘 아는 듯했다. 이래서 두 사람이 잘 맞는다는 거였다.
수한은 자신의 일정을 떠올려 보았다. 드라마 촬영이라면 거의 종일 붙어 있어야 할 텐데 이게 가능할까 싶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수한은 성민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매니저 쪽이라면 수한보다도 성민의 인맥이 훨씬 넓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잘 있느냐고 연락이 왔기 때문에 시간 여유가 있을 때 같이 술을 마시기로 했다.
[어! 무슨 일이야?]
“이런 일로 전화해서 죄송합니다. 혹시 매니저 일을 하던 사람 중에 잠시 일을 쉬는 사람이 있습니까?”
[매니저 일을 할 사람을 찾는 거야?]
“네. 한 작품을 함께 소화해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지금 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민은 그런 수한을 다 안다는 것처럼 잠시만 기다려 보라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전화 온 인사에 수한은 크게 반가워했다.
“동현 선배님!”
[실장님한테 이야기 들었어. 내가 도움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근데 그 사람이 누구길래 그래?]
“차현 씨입니다.”
[그 사람이라면 편하지. 내가 할게.]
“감사합니다. 선배님.”
쉬고 있다니 수한은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았다. 수한의 예상대로 더블에스 엔터테인먼트에서 버티지 못한 것이다. 하긴 벽창호들만 있는 곳에서 평범한 사람은 살아남기 힘들다.
수한이 전화 통화를 마치고 오자 두 사람이 수한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사이에 유진은 대본을 다 읽었는지 굉장히 흡족해하는 얼굴이었다. 하긴 유진은 대본을 잘 보는 배우 중 하나였다.
“매니저는 제가 구했습니다. 만나 보고 괜찮으면 그 사람과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좋아요.”
“계약은 제가 따로 시간을 정해서 엘 엔터테인먼트로 모시겠습니다.”
“아니에요. 그 정도는 저 혼자서도 찾아갈 수 있어요.”
매니저 일을 하던 게 습관이 붙어서 그런지 저절로 나온 말이었다. 수한이 어색하게 웃자 차현도 따라 웃었다. 그러다가 수한은 왠지 부러워하는 듯한 유진을 발견했다. 공개 연애 이후로 작품이 잘 들어오지 않는다고 하니 저 반응이 당연했다.
‘도움을 주고 싶은데 어떻게 줘야 할지 모르겠네.’
수한과 시선이 마주치자 웃기는 하는데 수한의 마음이 다 씁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