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눈에 탑스타-6화 (6/186)

< 1. 새 시작 >

수한이 주차를 마치고 공항으로 들어갔을 때는 따로 마련된 대기실에서 성민이 시은을 설득하던 중이었다. 시은은 처음 보는 얼굴임에도 수한에게 관심 갖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하는 중이었다.

"제가 다 감당할 수 있다니까요."

"그건 네가 너무 이 일을 쉽게 보는 거야. 인정하는 순간부터 네가 할 수 있는 배역이 확 줄어들 거라고."

"그건 가봐야 아는 일이죠. 저 연기 잘하는 거 실장님도 알잖아요."

시은의 연기력은 굳이 연기하는 걸 보지 않아도 확인이 가능했다.

[박시은- 스타성: S, 연기력: S, 가창력: A, 춤: A, 인지도: B, 기타: F, 성장 가능성: 32%]

연기력뿐만이 아니라 다른 능력치가 만만치 않았다. 성장 가능성이 낮은 게 이해가 될 정도로 완벽에 가까운 능력치였다. 이런 인물이 열애설 하나로 무너졌다는 게 수한은 믿기지 않았다. 그 순간, 수한의 머릿속에 다른 여자와 함께 연극을 보러 왔던 성준이 스쳐지나갔다.

'그게 그렇게 된 거군.'

상황이 참 어지러웠다. 시은이 저렇게 고집을 부리는 건 성준의 마음을 확신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성준은 다른 여자를 만나고 다녔고, 그 믿음이 깨지면서 무너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여기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처음 보는 사람이 대뜸 네 남자친구 양다리라고 말하면 누가 믿을까? 그러나 저대로 두기에는 저 능력치가 아까웠다. 어쩌면 이 기회가 수한이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계기가 될 수도 있고. 수한은 여기서 말을 꺼내는 게 자리에 안 맞는 행동이라는 걸 알면서도 입을 열었다.

"그러면 일단 유성준 씨 입장은 어떻습니까?"

"성준이라면 당연히 한다고 할 거예요."

시은은 확신에 차서 눈을 반짝였다. 누가 봐도 신뢰가 가득한 얼굴이라서 옆에서 한숨을 쉬는 성민이 보였다. 수한은 시은에게 직접 말을 꺼내기보다는 성민에게 돌려서 말하기로 했다.

"실장님. 잠시만 저를 따로 볼 수 있을까요?"

"지금?"

"네. 지금이어야만 합니다."

성민은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들어 인상을 찌푸렸지만, 수한이 뭐라고 하나 보나 지켜보는 입장으로 수한을 따라갔다.

"열애설을 절대로 인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건 나도 같은 입장인데. 설마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날 여기로 데려온 건 아니겠지?"

"아니요. 당연히 아닙니다. 그게 제가 최근에 대학로에 있었는데 말입니다."

"대학로? 혹시 연극했었어? 하긴 그 얼굴로 매니저 일을 하기에는 아깝긴 하지."

수한은 자신을 관찰하는 듯이 보는 시선이 살짝 불편했지만, 이건 연예인에게는 일상이었다. 연예인은 몸 자체가 상품이니까. 그러나 수한은 연예인이 아니므로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덕분에 성민도 미안하다는 듯이 웃었다.

"이게 일종의 직업병이라서 말이야. 불쾌했다면 미안해."

"아닙니다. 아무튼 거기서 유성준 씨를 봤는데 옆에 다른 여자와 함께 있었습니다."

"그게 정말이야?"

"네. 친한 동생이라 하기에는 손을 꼭 잡은 채로 있었습니다."

수한의 말에 성민이 갑작스레 수한의 손을 두손으로 꽉 잡았다. 성민의 입가에는 어느새 환한 웃음이 걸려있었다. 그 순간, 수한의 머릿속에 찰칵 소리가 스쳐지나갔다. 당시에는 잘못 들었나 했지만, 어쩌면 파파라치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불확실한 사실이므로 흘러가듯이 말하기로 했다.

"나쁜 새끼. 감히 시은이를 두고 바람을 펴?"

내용은 성준을 욕하는 내용이지만, 성민의 입꼬리는 이미 귀에 걸려있었다.

"그리고 제가 찰칵 소리를 듣기는 했는데 이건 확실한지는 모르겠습니다."

"그거면 충분해. 뒤는 내가 처리하도록 하지."

성민의 신뢰가 가득한 눈빛에 수한은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마음 같아서는 수한이 직접 시은을 설득하고 싶었지만, 수한은 오늘이 첫 출근 날이라는 걸 잊지 않았다.

**

[박시은, 열애 No! 유성준은 그저 친한 동생일뿐이다.]

결과적으로는 이렇게 되어버렸다. 수한은 이게 잘한 짓인가 했지만, 그래도 시은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이게 낫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알 일이었다. 그래도 마음이 무거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너를 바로 채용하고 싶은데 회사 규정이 있어서 말이야."

"저는 괜찮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고."

아직 수습 기간이기 때문에 맡은 연예인 없이 다른 매니저들을 쫓아다녀야 했다. 다행히 예진과는 그 날 이후로 만나지 않아 마음이 편했다. 수한은 성격 좋은 연예인을 만나는 게 얼마나 복된 일인지 간접 체험을 제대로 하였다.

'물론 그보다 더한 성격의 연예인도 존재한다니까.'

재원의 입으로 들은 거라 신빙성은 그닥 없어 보였지만 말이다.

"그보다 문제는 시은이가 사실을 알아버린 이후로 집에만 있어서 말이야. 탐나는 시나리오는 밀려들어오는 데 이게 참 문제란 말이야."

"아무리 연예인이라 해도 사람이니까요."

"안 그래도 그래서 의사를 데려갔는데 자기는 괜찮다면서 쫓아내더라고. 그러면 뭐해. 말과 다르게 슬픈 영화만 보면서 질질 짜고 있는데."

성민은 말은 저렇게 해도 시은을 많이 걱정하였다. 다른 매니저의 말을 들으니 처음 성민이 맡은 배우가 시은이라고 한다. 물론 그 당시 시은은 신인이었다. 시은이 배우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을 때 매니저를 교체하여 다른 배우를 맡기는 했지만, 첫 정이 큰 법이었다. 수한도 스윗걸스 멤버들을 아직 머릿속에 잊지 않았으니 그런 성민을 이해하였다.

"오늘도 찾아가실 겁니까?"

"그래야지. 얘가 이상한 생각이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너도 갈래?"

"네?"

"안 그래도 시은이가 널 보고 싶다고 했거든."

성민이 우울한 분위기를 버리고 활짝 웃는데 오히려 그래서 수한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가자마자 뺨이라도 맞는 거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까지 들 정도였다. 수한은 자연스럽게 차 키를 건네주는 어색하게 성민을 따라갔다. 예진의 집만큼이나 시은의 집도 회사에서 먼 거리는 아니었다. 이번에는 시은의 집으로 함께 따라가는 것이기 때문에 집안에 대한 호기심이 들었다.

"너무 오래 두리번거리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

벨을 누르자 안쪽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성민이 문고리를 잡아당기니 현관문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독특한 디자인의 신발들이 신발장 앞에 빼곡 나열되어있어 발을 딛기가 불편했다.

"시은아. 신발 정리 좀 잘하라니까."

"한 거예요."

거실 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성민은 가지런히 신발을 정리해두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수한 또한 성민의 신발을 옆에 둔 후 따라 들어갔다. 그리고 놀란 가슴을 애써 달랬다.

"또 그러고 있어?"

귀신처럼 긴 머리카락을 늘어놓은 시은이 보였다. 지난번 공항 때와 너무 달라서 수한은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다. 바닥에는 휴지가 얼마나 많이 쌓여있는지 얼만큼 울었는지 짐작이 되었다. 지금도 TV를 통해 슬픈 영화가 나오는데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영화 좀 그만 보고. 밥은 챙겨먹었어?"

"알아서 챙겨먹고 있다니까요."

그런 것치고 설거지 통이 너무 깔끔했다. 성민이 한숨을 쉬며 냉장고 문을 열자 안에는 물 밖에 없었다.

"너 그러다가 쓰러지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시은은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영화에만 시선을 고정하였다. 그래서 성민은 어쩔 수 없이 수한을 쳐다봤다. 수한은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지만, 성민에게 자비는 없었다.

"얘가 저번에 말한 걔야. 보고 싶다고 해서 데려왔는데 안 볼 거야?"

성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지 버튼이 눌려지면서 영화도 멈췄다. 귀신 머리를 한 시은이 고개를 돌리자 수한이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김수한이라 합니다."

"공항에서 본 기억나요."

긴 머리카락 사이로 돌아가는 눈동자가 무섭긴 했지만, 수한을 보는 그녀의 시선에는 부정적인 감정 같은 건 없었다. 다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게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아 보여서 조금 무섭긴 했다.

'공포 영화 찍으면 잘하겠다.'

웬만한 연차 찬 연예인들은 공포 영화를 잘 안 하긴 하지만, 가끔씩 무슨 이유로 찍는 배우도 있었다. 그때 시은이 갑자기 팍 고개를 숙였다.

"감사해요. 만나면 감사 인사 드리고 싶었어요."

'깜짝이야!'

순간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리고 말았다. 문제는 그걸 성민이 봤다는 거다.

"방금 신입 쫀 거 같은데?"

"아닙니다."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아! 제가 너무 제 상태를 안 살펴봤네요."

시은이 다급하게 화장실 안으로 뛰쳐들어가는 게 보이면서 성민의 짓궂은 표정이 보였다. 수한은 모른 척하느라 힘들었지만, 앞으로 성민과 친하게 지내면 심장 놀랄 일이 많을 것 같아서 불길했다. 그때 성민이 슬쩍 옆으로 다가오더니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수습 잘 끝나면 시은이 로드 매니저로 고용할 것 같으니까 시은이랑 잘 지내봐."

"그렇습니까?"

"열애설 수습 못했으면 다른 연예인 됐을 텐데 왜? 아쉬워?"

"아니요. 저는 좋습니다."

뺨이라도 맞는 거 아닌가 걱정한 게 무색할 정도로 시은은 성격이 착해보였다. 다만 심성이 너무 여려보여 걱정이 되기는 했다.

"하긴 예진이보다 훨씬 낫겠지."

이번에는 수한이 안 욱할 수가 없었다. 수한이 성민을 살짝 노려보자 성민이 장난스레 웃으면서 수한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조금 전에 인사가 빈말이 아니라 진심이니까 시은이한테 잘해줘."

"누가 들으면 전남친이라도 되는 줄 알겠어요."

깔끔해진 모습으로 화장실에서 나온 시은이 보였다. 나오면서 머리카락도 말렸는지 귀신 머리를 곱게 잘 묶어두었다. 누가 여배우 아니랄까 봐 작고 하얀 얼굴에 뚜렷한 이목구비가 꽉 차있었다.

"이제야 박시은 같네."

"이러려고 이 사람 데려온 거죠?"

"틀린 말은 아니야. 온 김에 대본들 가져왔는데 볼래?"

"네. 주세요. 실장님 말대로 차라리 일에 집중하는 게 낫겠어요."

"그 말 취소하기 없기야."

성민은 언제 들고 왔는지 모를 서류 가방을 꺼내 그 안에서 책 뭉텅이를 꺼냈다. 그 순간 수한의 눈동자가 바쁘게 돌아갔다.

[여우비- 대중성: B, 화제성: B, 평균 시청률: 11%, 성장 가능성: 40%]

[더 크라임- 대중성: C, 화제성: D, 평균 시청률: 4%, 성장 가능성: 76%]

[수상한 보스- 대중성: A, 화제성: A, 평균 시청률: 22%, 성장 가능성: 87%]

요즘 같이 TV를 안 보는 세대에서 시청률이 20%가 넘어가는 거면 대단한 거다. 밑에 다른 대본집도 있었지만, 수한의 시선은 이미 '수상한 보스'에 꽂혀있었다.

< 1. 새 시작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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