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를 너무 잘함-183화 (183/200)

183. 사냥

세상 어디에나 존재한다.

남보다 앞서나가는 자가.

남보다 앞서나가는 데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남보다 머리에 든 게 많거나.

남보다 돈이 많거나.

혹은 남보다 눈치가 있거나.

지금 테이블 1번에 선 용족.

남들보다 앞서서 요리를 하는 한 남자.

대귀족 나타샤의 비호를 받는 렌리가 바로 이 케이스에 속했다.

‘반드시 우승하고 만다.’

투당탕탕―

렌리는 힘껏 도마를 내리쳐 칼질을 했다.

그는 지금 목숨을 걸고 이 자리에 선 인물이었다.

불과 3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나타샤의 저택에 갓 들어온 말단 요리사였다.

무려 100명이 넘는 요리사 중 한 명에 불과한 그는 요리실력이 출중했음에도 출생이 미천하여 승진하지 못했다.

자신보다 못한 실력을 가진 자가 출세하는 것을 지켜보며, 렌리는 과감히 나타샤에게 제안했다.

평소 음식을 나르다가 그녀가 대회 우승상품에 관심이 있는 것을 눈치챈 렌리는 조심히 나타샤에게 다가가 귀띔했다.

―제 실력은 하늘국 최고입니다. 반드시 우승을 가져다드릴 테니 무엇이든 시켜주십시오!

그녀에게 원하는 물건을 가져다주겠다고.

나타샤는 그의 요리 실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뒤, 그 제안에 응했다.

말단으로 들어가 이름 없는 용족으로 죽을 뻔했던 렌리의 삶은 그렇게 변했다.

‘우승만 하면 내 인생은 탄탄대로다.’

렌리는 대회에 목숨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칼을 갈았다.

그동안 나왔던 수많은 기출문제들을 매일 연습했고.

나타샤가 가져온 최고의 재료들도 창고 가득 준비해두었다.

이제 우승만 하면.

그렇게만 된다면.

‘내 인생은 꽃길만 펼쳐지겠지.’

호화로운 집, 아름다운 아내, 토끼 같은 아들딸.

수도에 저택을 3채 내려주겠다는 나타샤의 약속은 렌리에게 희망이 되었다.

우승에 눈이 뒤집힌 렌리에게 첫 번째 과제는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천 개의 요리를 만들라는 과제는 13년도, 18년도, 232년도 기출문제였지.’

그는 남들이 허둥지둥하는 사이 침착하게 요리에 들어갔다.

이 기출문제의 답은 모든 재료를 도마에 올려놓고 다지는 것.

복잡하게 냄비에 요리를 하는 순간, 그때부터 탈락이었다.

냄비를 하나 준 것은 트릭이었다.

‘냄비 1개에는 요리 1개밖에 못 하니까. 그 시간에 다른 걸 하는 게 몇 배는 이득이지.’

100명의 참가자 중에 셋.

고작 세 명 안에 들어가려면 눈썹이 휘날리게 만들어도 부족했다.

투닥탁탁―

그는 소소리 나물을 꺼내 먹기 좋게 잘랐다.

그다음 소스를 만들기 시작했다.

간장과 새콤달콤한 식초를 섞고 로즈마리 가루를 살짝 뿌리고.

삭삭삭―

나물과 소스를 한데 섞어 접시에 올렸다.

【간편한 소소리나물(특10급) 완성!】

‘좋았어.’

주위에서 지지고 볶고 익히던 말던 렌리는 나물을 만드는데 집중했다.

“참가자 1번 렌리, 요리 330개 완성이요! 현재 1위입니다!”

…….

“참가자 1번 렌리, 요리 350개 완성이요! 현재 1위입니다!”

렌리는 이마에 땀이 흐름에도 피식웃으며 계속 손을 놀렸다.

1위라고 불리는 상황이 어찌나 기분이 좋은지.

시원한 여름날, 태풍의 눈 사이에서 붕붕 떠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뭐야. 왜 저렇게 빨라.”

“아. 벌써 저렇게 많이 만들었다고?”

“세상에나.”

주위에서 감탄사가 들려오자 그의 어깨가 활짝 펴졌다.

입꼬리도 슬쩍슬쩍 올라가려 했으나 렌리는 굳게 다물었다.

아직 놀라기는 이르다고.

투닥탁탁―

그는 소스를 대량으로 만든 다음, 나물을 골고루 접시에 담고 차례차례 붓기 시작했다.

완성된 요리 갯수가 수직으로 상승했다.

“참가자 1번 렌리, …음, 하나 둘…. 요리 570개 완성이요! 현재 1위입니다!”

“대회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500개 돌파야.”

“대단하네.”

계속해서 들려오는 감탄사에 렌리가 씩 미소짓던 그때.

등 뒤편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조용했었는데 대체 무슨 일이지?

렌리는 고개를 돌려 보고 싶었지만, 아직 시합이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며 꾹 참았다.

그가 분주하게 나물을 자르고 있을 때, 귓가에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분히 흥분에 가까운 목소리로 떠들어댔다.

“어어. 저거 뭐야.”

“이야. 칼질 좀 보게.”

“인간 주제에 솜씨가 장난이 아닌데?”

“요리한 지 2분도 안 되었는데 벌써 100개가 넘었대.”

“뭐? 미친 거 아닌가.”

“저거 보게. 양배추가 날아다니는 거 보니 칼질의 신이라도 되는 모양이구만.”

“허어. 내 천년을 살면서 저런 광경은 처음 보네.”

사람들의 찬사가 이어질수록 렌리의 입꼬리는 점점 내려갔다.

이제 아무도 렌리가 요리를 완성하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렌리의 요리를 세던 용족조차도 중간중간 뒤편을 흘깃거리기 시작했다.

렌리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짓누르며 소소리나물을 계속해서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불안함을 증폭시키는 소리가 귓가로 계속 들려왔다.

“참가자 100번 호준, 400개 완성이요! 순위는… 자 잠깐. 401개 완성이요! 402개 완성이요! 순위는 나중에 집계하겠습니다! 403개 완성이요!”

참가자 100번, 호준이라는 자.

그가 빠른 속도로 치고 올라오고 있었다.

그를 담당하는 용족이 순위집계를 하기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로.

용족이 갯수를 말하고 나면 또다른 요리가 완성되고 있었다.

‘이런 젠장.’

그 소리를 고스란히 듣는 현재 1위, 렌리의 심장은 자꾸 쪼그라들어갔다.

호준이 치고 올라오는 걸 느끼자마자, 그는 누가 심장을 콱 거머쥔 것처럼 불안해졌다.

‘내가 얼마나 준비했는데. 이대로는 질 수 없다.’

렌리는 눈에 불을 켜고 소소리나물을 만들기 시작했다.

투닥 탁탁―

군더더기 없는 칼질.

허브 따위를 뿌리는 멋을 들이지도 않았다.

최소한의 재료만을 넣어 만든 간단한 소스를 뿌리고.

아까보다도 한결 더 간소한 절차로 나물을 만들기 시작했다.

‘요리 시간이 단축됐어.’

다행히 요리 속도가 아까보다 더 개선되었다.

렌리는 빠른 속도로 1,000개에 도달해 가고 있었다.

마침내 요리에 초집중한 결과로 완성된 요리 개수가 900개에 가까워져 가자 그의 입꼬리도 슬슬 올라갔다.

“와. 벌써 900개네.”

“대단하다.”

“슬슬 경기가 끝날 거 같은데?”

“우승자는 정해졌군.”

그도 사람인지라 주위에서 띄워주는 말에 귀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렌리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내버려 둔 채로 허리를 구부리고 요리에만 집중했다.

이미 그의 전신은 땀으로 흥건했다.

슬슬 피곤하기까지 했으나 그는 포션을 마시는 대신 칼을 높이 들었다.

그가 나물을 내리치고 잘게 자르고 있는 사이.

옆에 서있던 용족이 최종갯수를 체크했다.

“참가자 1번 렌리, 요리 901개 완성이요! 현재 1… 아 2위로 내려갑니다. 현재 2위입니다.”

“뭐?”

렌리가 당황한 나머지 입술을 짖이기며 용족을 쳐다보았다.

심판을 맡은 용족이 고개를 뒤로 돌리더니 동료와 손으로 사인을 주고받았고는 다시 말했다.

“현재 2위 맞습니다. 1위는 호준입니다. 보십시오!”

용족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렌리가 고개를 돌렸다.

저 뒤편.

100번 테이블 바로 옆에 서 있는 기분 좋아 보이는 용족이 우렁차게 외쳤다.

“참가자 100번 호준, 요리 902개 완성이요! 현재 1위입니다!”

“젠장할.”

마지막에 뒤집히다니.

열이 받고 속이 우글우글거렸지만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요리를 계속 만드는 것만 남았을 뿐.

“XXXXX”

렌리가 욕설을 중얼거렸으나 그의 목소리는 묻혀버렸다.

“오오!”

“우와!”

“인간이 제법이군.”

“타무르가 신기한 인간 요리사를 데려왔어!”

“구혼을 거절당해 도망간 게 아니었군.”

수많은 용족들의 시선은 이미 렌리를 떠나있었다.

1위를 거머쥔 한 인간에게로.

* * *

요란법석했던 요리 콘테스트.

수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요리 콘테스트의 결과가 의외로 빠르게 나왔다.

1시간은 걸릴 거라 생각했던 콘테스트의 최종 우승자가 드디어 무대 위에 섰다.

무대의 정중앙에 선 남자는.

첫 번째 과제의 1위를 차지한 호준이었다.

“첫 번째 과제의 우승자는, 호준입니다! 2위, 3위에게도 각각 도전의 기회가 주어짐을 알려드립니다!”

진행자 역할을 맡은 용족이 우승자를 호명하자 수많은 관중들의 함성이 이어졌다.

귀가 터질만큼 커다란 함성이었다.

호준은 어깨를 으쓱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뛰어난 청각 덕분에 용족들의 대화 소리도 함성소리 너머로 들려왔다.

“이야. 대단하네!”

“인간이 1위를 한 건 처음이지 아마?”

“그러게. 실력이 대단하구만.”

“어떤 요리인지 한번 먹어보고 싶군.”

“용족을 넘어서는 실력이면, 전투 실력도 꽤 있겠는데?”

‘인간에게 적대감을 보이지는 않나 보군.’

타무르도 그렇고, 파이젤도 그러했지만.

용족과 인간의 관계는 친하지도 멀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인 듯했다.

용족이 아니라 인간이 우승해도 뭐라 하는 용족은 없었다.

뭐, 어쨌든 1위를 하고 통과한 기분은 괜찮았다.

노력한 결과가 나오니 기분이 좋기는 했지만.

아직 기뻐하기는 일렀다.

‘나머지 2명을 제쳐야 해.’

2위와 3위로 통과한 두 용족이 저편에 서 있었다.

3위를 한 여자는 푸른 장발의 머리를 했는데, 자신의 가족에게 손을 흔드느라 바빴다.

문제는 2위를 한 남자 용족이었다.

그는 그냥 평범하게 생긴 외모였는데, 이상하게 눈빛에 적의가 가득했다.

표정에도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조심해야겠군.’

왠지 모르게 꺼림칙한 눈빛을 띈 그를 바라고 있는데.

왕족들과 함께 의자에 앉아있던 카이사르 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이사르 왕이 의자에서 일어서자 용족들의 환호성이 차차 가라앉았다.

모두가 잠자코 왕이 무슨 말을 할지 기다렸다.

카이사르 왕은 황금창으로 1위 우승자, 호준을 가리키며 말했다.

“인간이기 이전에 요리사로서 훌륭한 실력이었소. 왕으로서, 그리고 관객으로서 훌륭한 실력을 보았네. 자네 이름이 호준이라고.”

“그렇습니다.”

“이 경연은 자네가 인간이라고 배려를 해서 룰을 바꾸지는 않네. 앞으로의 경연은 서로 목숨을 걸고 하는 싸움이 될 수도 있네. 그래도 계속 참여하겠는가.”

나직이 말했으나 그 내용에는 분명히 경고가 담겨 있었다.

더이상 참여했다가는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카이사르 왕의 말이 끝나자 달아오른 분위기가 축 가라앉았다.

허공에서 호준과 카이사르 왕의 시선이 마주했다.

호준은 날카로운 카이사르 왕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고 답했다.

“중간에 내려올 생각이었다면 이 자리에 서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하겠다는 거로군.”

“그렇습니다.”

“흠… 알겠네.”

호준의 의지를 확인하자 카이사르 왕은 더이상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그는 피식 웃으며 창으로 바닥을 내리찍었다.

쿠쿠쿠쿵―

단단한 아다만티움석에 구멍이 뻥 뚫렸다.

“용족의 왕으로서 2번째 과제를 공개하겠다.”

카이사르 왕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퍼졌다.

무대와 그 아래 관중석까지 모두 들릴 만큼 큰 소리였다.

가지각색의 머리색을 지닌 용족들, 타무르의 옆에 앉아 관람중이던 미르와 다크니스, 츄츄가 카이사르 왕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호준과 다른 참가자들 역시 마찬가지로 그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카이사르 왕은 좌중을 쓱 둘러보며 굳게 다문 입을 열었다.

“사냥하지 못하는 자, 우승하지 못할지니. 요리를 제공하는 자는 반드시 재료를 확보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 오직, 무대에 나타나는 몬스터만을 재료로 해서 요리를 만들어라. 시중에서 가져온 모든 재료는 사용할 수 없다. 제한 시간은 1시간, 그 시간 아래 몬스터를 사냥하고 요리를 만들어야 한다. 최종 우승자 결정은, 음식을 시식한 용족들의 투표로 결정한다.”

룰이 공개되자 카이사르 왕은 긴 숨을 내뱉었다.

황금빛 가루가 그의 입김에서 흘러나와 무대에 뿌려졌다.

그 순간 무대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무대의 지축이 흐물흐물해지더니 지하에서 몬스터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화이트헤드 트롤이다!”

“자이언트맨도 있어!”

“맨손으로 싸우는 거면, 너무 어려운 거 아냐?”

“용족이야 어떻게든 살겠지만. 인간은… 영….”

“끝났네. 이번에는 용족이 우승하겠군.”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비관적인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호준은 씩 웃고 있었다.

‘재미있어졌는데?’

사냥해서 요리해라.

색다른 과제에 그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사냥이라면 얼마든지 자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