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179화 (179/201)

#179 바다의 무법자

보지 말자.

보지 말자.

그 사람이 다른 여자와 사랑하는 모습은 보지 말자.

달이 구름 속에 숨는다.

서쪽마녀의 마음도 어둠 속으로 숨어버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마라. 이 세상, 모든 것이 암흑 속에 잠기기를.

처음으로 눈이 보이지 않는 데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톡톡톡, 까마귀가 그녀의 손등을 부리로 건드린다.

'위로해 주는 거야?'

괜찮아, 나는 괜찮아. 시조가 남겨준 너희가 있으면 나는 괜찮아.

서쪽마녀는 그렇게 되뇌며 까마귀의 날개를 쓰다듬었다. 너무 부드러워서 눈물이 날 것 같다.

창 밖, 숨었던 달이 나왔다. 달이 비치는 너른 공간에서 황제의 마생물이 춤을 추듯 돌아다녔다. 모두가 기뻐 빛을 뿌리며 사방에 깃든다.

오직 서쪽마녀와 까마귀들만 조용한 침묵 속에 갇혀 있었다.

***

세상은 두 종류의 사람으로 나뉜다.

경험한 자와 경험하지 못한 자.

리리샤는 경험한 측의 사람이다.

"...."

어른이 됐다.

여자가 됐다.

지독하게 아프고 또한 너무도 부끄러운 경험이었지만, 이제야 진정으로 루디와 엮였다. 진짜 부인이 되었어.

작게 구석이 파여 있던 나라는 동그라미에 드디어 알맞은 조각이 딱 맞게 들어간 느낌이었다. 너무 행복해 눈물이 날 것 같다.

어두운 방안, 커튼 사이로 한줄기 빛이 들어왔다.

루디의 검은 머리에 빛이 닿자, 반짝반짝 빛이 난다.

리리샤는 가만히 루디를 내려다보다 뚝뚝 눈물을 흘렸다.

"...좋아...루...너무 좋아...."

사랑이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 나와 넘쳐흐른다. 이 사람이 너무 좋아 어쩔 줄 모르겠다.

어제와 오늘의 사랑은 완전히 다른 것 같다. 더 깊고 더 진했다. 더는 좋아할 수 없을 만큼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상의 좋아함이 있었다.

"...부디 나만 좋아해 주세요...다른 여자랑 그런 거 하지 마...."

루디는 황제다. 당연히 앞으로 후궁이 생길 거다.

지금까지 후궁이 없었던 건 상황제 폐하가 황후의 출산 전에 다른 여자를 후궁에 넣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귀족들은 자신의 집안에서 여자를 후궁에 넣고 싶어도 참아왔다.

하지만 이제 리리샤가 아이를 낳고 후계자가 생기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모두가 눈에 불을 켜고 루디에게 후궁을 권하게 된다.

"싫어, 루."

자신이 루디와 했던 행위가 다른 여자와도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면 가슴을 칼로 얇게 저며내는 것처럼 아팠다.

얇은 생선 껍질 벗겨내듯이 심장을 한 장 한 장을 끊임없이 베어내는 느낌이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토할 것처럼 싫다. 심장이 깨질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눈물 때문에 루디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또 싫고 슬프다.

무엇이 그리 서러운 건지도 모르게 된 상태로 훌쩍훌쩍 울고 있는데 뭔가가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닦았다.

"내 부인은 정말 귀엽게도 우는구나."

눈을 깜박이자 흐릿하던 시야 속에서 루디가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눈물이 다시 차올라 루디가 보이지 않는다. 바로 앞에 있는데도 잠시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이 또 서러워졌다.

"뭐가 그렇게 서러운 거야, 리리샤."

루디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쑥 당겼다.

리리샤는 풀썩 루디의 가슴에 쓰러졌다. 아, 그러고 보니 옷도 입지 않고 있다. 갑자기 밤 사이 있었던 일이 떠올라 부끄러워졌다.

루디는 자신의 가슴 위에 리리샤를 올려두고 가만히 머리를 쓰다듬었다.

"뭘 걱정하고 있는지는 알겠는데, 그런 건 생각할 필요 없어. 나는 리리샤 외에 다른 여자를 후궁에 넣을 생각도, 필요하다는 생각도 없으니까. 그러니까 울지 말아요, 부인."

"...정말?"

"정말."

"...."

반드시 루디의 생각대로 일이 흘러가지는 않을지 모른다. 어쩌면 정작 루디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

그래도 루디의 이 말 한 마디만 있으면 평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 지 않아. 절대로 그 말, 지키게 해준다.

리리샤는 훌쩍훌쩍 루디의 가슴에 눈물 콧물을 묻히면서 주먹을 쥐었다. 와라, 여자들! 모두 두들겨서 내쫓아 줄 테다.

***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루디는 피식 웃으며 이불을 당겨 리리샤의 몸을 덮었다. 리리샤는 주먹을 꽉 쥐고 뭔가를 맹세하는 모양이다.

아까부터 몸속의 마력이 출렁출렁 움직인다. 루디는 리리샤를 안은 채 조금 열린 커튼 사이로 밖을 보았다.

달이 밝은 가운데, 하늘에서 봉황이 춤추듯 날아다니고 있었다.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불꽃놀이를 보는 것 같다.

"...."

인간에게도 마생물에게도, 루디와 리리샤의 첫날밤이 오늘이라는 사실은 모두 알려져 있는 것 같다. 하반신 사정이 모두 알려지는 건 정말 괴롭다. 제발 그만둬 줬으면 좋겠다. 정말, 그만둬.

다른 때는 아직 캄캄할 무렵 시종들이 찾아와 옷차림을 정돈해 주고 정무 볼 준비를 하지만, 오늘은 날이 완전히 밝아도 깨우러 오지 않는다.

루디는 리리샤를 깨우지 않게 조심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어느 순간 떨어지는 것처럼 잠이 들더니 깨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꿈나라 속이다.

루디는 그녀의 목까지 이불을 올려 여민 뒤 이마에 키스를 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참으로 간사하다. 몸의 체온을 나누는 사이가 되자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의 질이 변해버렸다.

이전에도 사랑스럽게는 생각했지만, 지금과 같은 마음은 아니었다. 지금은 뭐랄까, 심장 한구석이 애절하다고 해야 할지, 자신의 몸 밑에서 허덕이던 리리샤의 얼굴을 떠올리면 머릿속이 저릿하면서 안타까워진다.

루디는 조용히 손가락으로 리리샤의 뺨을 되짚었다. 여전히 아이처럼 순진해 보이는데 자신이 알던 소녀는 언제 여자가 되어버린 걸까.

마치 시간을 가늠하고 있었던 것처럼, 남작 부인이 들어와 조용히 침대에 붙어 있는 얇은 휘장을 내렸다.

침대에서 떨어진 곳에는 어느새 시종들이 서 있었다.

루디가 침대에서 내려 그들에게 가까이 가자 납작한 은대야에 물이 채워졌다.

루디는 그 물에 손을 담가 가볍게 세수를 했다.

시종이 수건을 내민다.

얼굴을 닦는 동안 다른 시종들이 재빨리 그의 몸에 하나씩 옷을 입혔다.

레빈은 가장 가까운 시종이지만 리리샤가 있는 침실에는 가급적 들어오지 않는다.

황후의 방에 너무 젊은 시종은 출입하지 않았다. 나이 든 시종들이 대부분이다. 혹시 모를 불상사와 나쁜 소문을 경계하기 위해서다.

시종장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제일 먼저 세렌 남작의 알현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해외 건으로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그 뒤에는 각국 대사와의 면회가 이어집니다. 그 나라 중 두 곳에서 혼인 제의가 있사온데...."

시종장의 말을 들으면서 옷을 다 입고 힐끔 침대 쪽을 보았다. 남작 부인이 침대 바로 옆에 조용히 서 있었다.

"황후에게 무리를 시킨 면이 있으니 오늘 하루는 움직이지 않고 쉬게 해주게."

"예, 폐하."

"나중에 꽃을 보내지. 만찬은 이곳에서 함께 하자고 전해줘."

"마마가 기뻐하실 겁니다."

남작 부인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깨어날 때까지는 함께 있어주고 싶었지만 해야 할 일이 태산이다. 그런 사치는 부릴 수 없었다.

휘장 너머로 희미한 리리샤의 모습을 한 번 본 뒤, 루디는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

세렌 남작은 리리샤 옆에 있는 남작 부인의 남편이다. 부부가 모두 약간은 고지식한 면이 있고 매우 성실한 성격이었다.

세렌 남작은 루디를 보자마자 얼굴 가득 웃음을 채우고 정중하게 축하 인사를 해왔다.

말로는 카니아, 그레데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축하하고 있지만, 사실은 리리샤와 진정한 부부가 된 것을 기뻐하는 것 같다.

세렌 남작은 부인이 리리샤의 측근이라 그런지 유난히 황후에게 정이 깊었다.

'리리샤에게 아군이 느는 건 기쁜 일이지.'

황제의 딸이지만 후원이 없는 그녀에게, 루디는 가급적 많은 지원을 붙여주고 싶다. 자신이 없는 곳에서도 힘든 일이 없도록.

세렌 남작은 몇 가지 축하 선물을 내놓은 뒤,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폐하, 아무래도 바다 건너에서는 묘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듯합니다."

세렌 남작은 현재 배 두 척을 이용해서 바다 멀리 다른 대륙과 무역을 하고 있다.

주로 페리라는 나라에서 향신료와 비단, 상아 같은 것을 사들였다.

페리는 각국에서 물건이 모이는 국제 교역의 중심지다. 제 나라에서 생산되는 물건은 그리 많지 않지만, 위치가 좋아서 이쪽 대륙과 저쪽 대륙을 잇는 교역 중심 국가였다. 나라 전체가 교역으로 먹고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기에는 향신료 등의 물건을 사들이는데 집중했다.

하지만 바다 건너의 대륙에서는 기상 조건이 좋지 않아 식량이 모자라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 방향을 바꿨다.

세렌 남작은 배에 곡물을 가득 실어 저쪽에 가져가 판매했다. 모피와 꿀 같은 물건도 함께 가져가 팔고 있는데, 부르면 부르는 대로 값을 쳐준다. 덕분에 향신료등의 물건을 한계까지 사들이고도 돈이 남았다.

무역에 사용하는 배는 국가 소유였다. 국가에서 배와 자금을 투자하고, 세렌 남작은 전체적인 운영을 담당하는 식이다. 당연히 제국의 돈주머니도 점점 커지고 있었다.

"계속하게."

루디가 시선으로 재촉하자, 세렌 남작이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돌아온 배의 선장에게서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웃 나라의 배가 바다 건너 대륙에 있는 아루바소라는 나라에 납치되었다는 소문이 돈다고 하더군요."

해상 무역은 고위험 고수익 사업이다. 바다에서 오는 위험 외에도 해적과 선원의 반란,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는 돌발 상황 등 여러 가지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후추가 비싼 거야. 엄청 비싸다.

"납치라고 하면, 배를 통째로 억류하고 있다는 건가? 아루바소에서 타국의 배를 직접?"

"소문은 그렇지만 정확한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확인해본 결과 이쪽에 있는 나라에 배가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바다에서 사고를 당해 침몰했거나 표류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세렌 남작의 표정이 신중해졌다. 이마에 주름이 약하게 생겼다.

"어쨌든 그 소문을 듣고 우리 쪽 선장이 아루바소에 대해 조사를 한 모양입니다. 한데 그 결과가 조금 마음에 걸립니다."

세렌 남작의 이마에 주름이 더 생긴다.

"그 나라가 다른 대륙의 나라를 발견해서 식민지로 삼는다는군요. 노예선도 운영하고 있답니다. 식민지에서 사람을 끌어모아 다른 나라에 판매하거나 자신들의 나라로 데려가는 거죠."

"...."

그건 어째 지구에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같다.

세렌 남작이 음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게다가 그들의 배에는 아무도 본 적이 없는 신무기가 있다고 합니다. 대포라고 하더군요. 그게 굉장히 무서운 위력을 지녔다고 합니다."

아, 그래. 정말 지구에서 있었던 일이 그대로 여기에서도 벌어지는 것 같다.

그 뒤의 이야기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다. 루디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그들의 다음 목표는 우리 대륙이라는 건가?"

"아무래도 그런 조짐이 보입니다. 그들이 이쪽의 사정을 염탐했다는 정황이 있습니다. 게다가 아루바소 사람들은 우리 제국의 선원들을 보고 미개인이라고 부르고 있다 하니까요. 쉽게 정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루디는 히죽 웃었다.

아루바소라는 나라가 그의 예상대로 대포와 총기를 개발해 사용하고 있다면, 아직도 칼과 활을 무기로 사용하는 제국은 당연히 미개해 보일 것이다.

바다 건너 대륙에는 마력이라는 개념이 없다고 한다. 당연히 마도구도, 마력소유도 그 대륙에는 없다.

'마력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사실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겠지.'

만일 그런 게 있다는 말을 들었어도 헛소문으로 치부해버렸을 것이다.

직접 보았다면 믿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마도구를 볼 기회는 거의 없다.

제국의 배에도 전등이나 수도 마도구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긴 항해 기간 동안 마력 보충을 하기 어렵기 때문에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비상용일 뿐이다.

마석이 많이 필요한 박격포는 당연히 쓸 수 없다. 나름대로 자위를 위해 저격총은 배에 두고 있지만, 그것 역시 진짜 중요한 순간이 오지 않으면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해적을 만났다는 보고는 없었다.

"대포를 실제로 본 사람은 있나?"

"아니오, 없습니다. 소문만 무성한데 대포는 천둥 같은 소리를 내고 배를 파괴한다고 하더군요."

뭐, 그렇겠지. 지금쯤의 시기라면 쇠구슬을 쏘아대는 수준의 대포일 거다.

제국은 이 대륙에서 최대 강국이지만, 해상 쪽으로는 그다지 강하지 않다. 보유하고 있는 군함의 수도 적었다.

"아루바소에서 쳐들어온다면 기회인지도 몰라."

"...."

루디의 말에 세렌 남작이 놀란 듯 그를 보았다.

히죽 웃으면서, 루디가 말했다.

"우리에게는 군함이 모자라지. 배를 늘릴 기회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신무기가...."

자기도 모르게 웃는다.

루디가 쿡쿡거리고 웃음소리를 흘리자, 세렌 남작이 잠시 굳은 표정이 되었다.

"괜찮아. 내가 있는 한 우리 제국에 적군의 흙은 묻히지 않는다."

루디의 말에 세렌 남작의 표정이 서서히 풀려갔다.

흠, 그런데 어쩐다.

자신 있게 말은 했지만, 어떻게 하면 좋을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전생에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다. 해전 따위, 해보기는커녕 제대로 본 적도 없는 거야.

"...."

괜한 허세였을까. 그냥 배를 파괴하는 정도면 쉬울 텐데, 어떻게 하면 배를 무사히 빼앗을지 전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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