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149화 (149/201)

#149 여난의 상

여러 해 전, 루디의 봉황이 까마귀를 죽인 일이 있다.

꽤 많이 죽였다고 하던데, 대장인 것처럼 보이는 이 까마귀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까마귀가 루디의 어깨에 앉은 채 부리를 뺨에 비비며 애교를 부렸다.

'미안해. 너의 동료들을 죽여서.'

루디가 속으로 중얼거리자, 그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까마귀가 머리로 그의 뺨을 쭉쭉 밀었다. 괜찮아요, 라고 말하는 것 같다.

루디는 서쪽마녀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녀는 바닥을 더듬거리며 엉뚱한 방향으로 기어가고 있었다.

가끔 허공을 손으로 젓는 걸 보면 까마귀를 찾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울고 있었다.

까마귀가 마치 그녀를 잊고 있다 알아차린 것처럼 움찔하더니, 푸드득 날갯짓하여 허공을 날아갔다.

"아!"

날개 소리를 듣고 서쪽마녀가 허둥지둥 손을 뻗었다.

까마귀가 손등에 오르며 푸드득 날개를 움직인다. 자신의 무게 때문에 주인에게 무리가 가지 않도록 하려는 것 같다.

톡톡, 까마귀는 달래는 것처럼 마녀의 팔을 부리로 건드리더니 다시 어깨 위로 올라갔다.

제국군 병사는 여전히 적병을 추적 중이다. 요란한 발소리와 무기 부딪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그 소음 속에서, 서쪽마녀가 바닥을 더듬어 신발을 찾아 신고 일어섰다.

아직까지 목걸이 때문에 고통스러웠던 것이 다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여전히 그녀는 고통스러운 듯 몸을 떨며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어쨌든 자신도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서쪽마녀가 허공에 손을 허우적거리며 조금씩 걷기 시작했다.

"...."

전 황제에게서 물려받은 마력감지 반지는 그녀에게 반응하지 않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전혀 반응이 없다.

'마력이 없는 건 아닐 텐데.'

어쩌면 지금 마력을 감지할 수 없는 것이 노예 목걸이를 하게 된 이유일까.

서쪽마녀는 조금 걷다 멈추고 다시 방향을 바꾸었다.

그녀 주위에는 제국군 병사들이 서 있다.

너무 가깝지는 않지만 서쪽마녀가 돌발적인 행동을 하면 충분히 잡을 수 있을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

서쪽마녀는 병사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당황한 모습으로 이쪽으로 저쪽으로 계속 허우적거리며 움직였다.

침묵 속에서 그녀를 바라보던 제국군 병사들이 그녀가 어디론가 가지 못하도록 사람 울타리를 만들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쪽마녀는 열심히 허공을 더듬는다. 그 모습이 마치 낯선 곳에서 길을 잃고 겁먹은 아이처럼 보였다.

루디는 마녀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너무 놀라지 않도록 일부러 발소리를 조금 낸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선 뒤 한국어로 말을 걸었다.

[나는 정진영입니다. 당신이 지구에서 소환한 사람이에요. 지금 세상에서는 제국의 황제라는 입장입니다.]

서쪽마녀의 움직임이 멈췄다.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정...진영? 시조?]

서쪽마녀가 멍하니 서서, 보일 리 없는 루디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 몸, 모든 것에서 색채가 사라지는 것 같다. 마치 컬러 티비 속에 선 흑백 영화 주인공 같았다.

한참 동안 그렇게 서 있던 마녀의 얼굴에 갑자기 색이 되살아났다. 뺨이 붉어지면서 일시에 꽃이 피는 것처럼 생기가 돌아온다.

[진영 씨.]

한 번 입속에서 중얼거리더니, 서쪽마녀가 루디를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무기 움직이는 소리가 울렸다.

병사들이 루디에 가까워지는 서쪽마녀에게 일제히 무기를 겨누었다.

몇몇 가까운 병사는 서쪽마녀 목덜미에 닿을 듯 쇠붙이를 들이댔다.

그제야 자신이 현재 적으로 이 자리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모양이다. 서쪽마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어, 나, 나는, 전혀 모르고, 미안해요. 죄송, 으, 시조, 진영 씨, 나 몰랐어요. 다른 사람을 불러왔다고 생각했을 뿐, 당신을 적대하려고 한 건 아닌데.]

서쪽마녀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오랜 세월을 거듭해서 환생해온 마녀일 텐데 아이 같다. 부모에게 혼나 어쩔 줄 모르는 꼬마처럼 보였다.

왠지 한숨이 나왔다.

평온하게 살고 있던 자신을 이 세계로 불러온 원흉이다. 게다가 죽이려 했다. 이전의 인연이 있다고는 해도, 만나면 분명 미울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얼굴을 보니, 한숨 한 번에 미움은 사라졌다. 뭐, 이미 벌어진 일이고 어쩔 수 없는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악의 축이라 생각했던 존재가 너무 약하다. 천년 이상 환생하며 살아온 마녀라고 해서 뭔가 대단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예상과 다른 사람이었다. 결코 자신이 여성에게 약한 게 아니다.

"...."

그래, 그래, 자신이 없어진 뒤 혼자 외로이 살던 마생물의 처지도 알게 되었으니 잘 된 건지도 모른다.

마생물을 알게 된 지금은 자신이 없는 세상에서 혼자 외로워할 마생물을 외면할 생각은 없어졌다. 그런 잔인한 짓은 할 수 없을 것 같다. 다시 한번 긴 한숨이 나왔다.

루디는 눈짓으로 경계하는 병사들을 진정시키고 입을 열었다.

[미리 이야기하지만, 내게는 당신에 대한 기억이 없습니다. 나는 중학생 때 사고를 당해 몇 달간 혼수상태에 있었어요. 아마 그때 이곳에 왔었던 모양인데, 전혀 몰라요. 기억하지 못합니다.]

[....]

서쪽마녀가 먼 옛날을 기억하는 것처럼 눈동자를 허공에 두고 멍하니 있다 불쑥 말했다.

[나는 당신의 부인이었어요.]

아니, 그렇게 말하면 진짜 같지만, 어느 정도 거짓말이라는 거 알고 있으니까.

루디는 그렇게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서쪽마녀가 눈이 무너질 것처럼 눈물을 쏟으며 울고 있었다.

과거의 인연을 강요하려고 했던 말이 아닌 것 같다.

방금의 말은 어쩌면 그녀가 계속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주는 한 마디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이런 모습을 보면 싸울 생각은 전혀 없는 것 같다.

그때 하늘에서 불쑥 큰 소리가 내려왔다.

[주인님! 마녀야. 마녀가 있다. 왜 마녀가 여기에 있어? 놀러 온 거야?]

점보다. 허공에서 점보가 커다란 귀를 펄럭거리며 빙빙 날고 있었다.

루디가 수를 많이 센 뒤에 쫓아오라고 한 말을 착실히 지킨 모양이다. 뒤늦게 하늘에 도착해 있었다.

마침 잘 됐다.

루디는 주변의 병사들을 물러나게 한 뒤 점보를 아래로 불렀다.

신이 난 점보가 땅에 처박히듯 내려오더니 겅중겅중 뛰어왔다.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마녀의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주인님! 마녀 왜 울어? 우는 시간이야? 나도 울까?]

안 울어도 된다.

루디는 뭔가를 착각한 듯 억지로 눈물을 자아내려는 점보의 얼굴을 보았다.

"점보, 내가 임무를 하나 줄 텐데, 할 수 있겠니?"

[응! 응! 점보는 할 수 있어. 많이 할 수 있다.]

"많이는 필요 없고.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우는 동안, 마녀가 다른 사람을 해치지 못하도록 좀 봐 줘."

[응? 마녀가 사람을 다치게 해? 왜? 그러면 안 되는데. 사람은 죽이지 않게 조심해야 하는 거예요.]

마지막 말은 서쪽마녀를 쳐다보더니 타이르듯 말한다.

"그래, 네 말이 옳아. 마녀도 사람을 다치게 할 생각은 없을 거야. 하지만 만일을 위해서."

루디는 봉황을 불러냈다.

함께 다니는 동안, 어느새 봉황은 점보를 컨트롤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성격이 너무 달라 잘 어올리지 않을 것 같았는데 의외로 둘이 잘 맞는다.

봉황을 점보와 함께 붙여놓으면 괜찮다. 그래, 아마 괜찮을 거다.

루디가 가볍게 휘파람을 불자 흑마가 가까이 다가왔다.

[적대할 생각은 없는 것 같으니, 우선 급한 일을 처리하고 이야기합시다. 만일을 위해 당신에게는 점보를 붙여놓지요. 만일 내 병사를 다치게 하면 당신과 나는 영원히 적입니다. 용서하지 않아요.]

서쪽마녀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절대, 절대로 당신을 적대하지 않아요. 나는 당신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습니다.]

[....]

루디는 훌쩍 말에 올라탔다. 마녀를 경계하는 병사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마녀는 반항하지 않을 거야. 만일을 위해서 점보와 봉황을 함께 두지. 내가 돌아올 때까지 서쪽마녀를 성에 감금해두도록 해."

힐끔 서쪽마녀를 본 뒤 말을 이었다.

"연약한 여성이니 너무 험하게는 다루지 마라. 감옥에 두지는 마. 그러면 죽을 거야."

"알겠습니다."

병사들이 대답하는 것을 보고, 루디는 말머리를 돌렸다.

이제 도망치는 적병을 추적해야 한다.

적에게 패해 쫓기는 병사는 특히 위험하다. 뒤를 생각하지 않은 채 더욱 잔인해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들을 놓치면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는 내내 이 나라의 백성을 괴롭게 할 것이다.

루디는 말을 다그쳐 적병을 쫓는 제국군에 합류했다.

"지금 놈들을 놓치면 민가를 습격한다. 모두 잡아 죽여라. 놓치지 마!"

총대장을 잃고 도망치는 중이지만, 적의 전력 자체는 그다지 줄지 않았다.

제국과 달리 그레데 왕국은 각지의 영주를 소집해 전쟁을 치른다. 군대를 실질적으로 지휘하고 이끄는 것은 바로 그 영주들이었다.

대부분의 영주들은 노련한 전사들이다. 이 세계의 영주들은 대부분 너구리처럼 교활하고, 치고 빠지는 전투에 익숙했다.

잘못하면 궁지에 내몰린 쥐에게 물어뜯기고 만다. 골치 아픈 일이다.

"방심하지 마라. 혼자서 너무 깊이 들어가지 마. 항상 동료가 주변에 있는지 확인하면서 움직여라."

루디의 말을 대장들이 이어받은 것처럼 다시 외쳤다.

하지만 루디 근처에 있는 병사들은 오히려 더 들썩들썩해졌다.

황제가 옆에 있어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한 명이 앞서면 다른 놈이 기를 쓰며 빨리 나간다. 그러면 또 다른 병사가 그걸 제치려고 앞서 나갔다.

3년 차의 병사들이 가장 위험하다. 막 신참에서 벗어나 자신감을 얻기 시작한 병사들은 어느새 처음의 두려움을 잊고 무모해진다.

노련한 병사들은 혈기왕성한 병사들이 너무 앞서가면 창의 막대기로 두들기면서 주위와 보조를 맞췄다.

"이봐, 그러다 젊은 애 죽는다. 적당히 해."

"하하. 폐하! 제국의 병사 중에 이 정도로 죽는 놈은 없습니다."

병사들이 와하하하 큰 소리로 웃었다.

글쎄, 인간은 머리를 맞으면 모두 죽을 거다. 실제로 루디 자신도 계단에서 떨어져 머리를 치는 바람에 지구에서 죽은 것 같고.

하지만 병사들은 실제로 안 죽는다고 생각하는지, 맞은 놈까지 큰 소리로 웃고 있었다.

어쩌면 이 세계의 인간은 두개골이 좀 두꺼울지도 모르겠다. 아까 분명히 퍼퍽, 하고 큰 소리가 났었는데 멀쩡한 걸 보면 진짜 그런지도.

적병의 추적은 여러 날에 걸쳐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수만에 이르던 왕국군은 몇 번 제국과 부딪친 뒤 조각나듯 뿔뿔이 흩어졌다.

여러 영주가 함께 싸우던 왕국군이 각 영주가 이끄는 규모로 작게 쪼개지고, 다시 추적을 받아 수가 줄어들었다.

만일 그들이 그레데 국경에 가까이 있었다면 일부는 살아서 자신의 나라로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국경에서 멀다.

제국군은 다른 나라도 아닌 디코콰리아 안에서 그들을 놓아줄 생각은 없었다.

끝까지 추적하고 샅샅이 뒤져, 마지막 한 놈까지 모두 잡아 죽인 뒤에야 겨우 추적이 끝났다.

일부 부대는 중장비 마도 부대와 짝을 지어 몬테스의 영주성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그레데 왕국군이 일부 주둔하고 있을 것이다.

몬테스만 처리하면 디코콰리아에는 더이상 카니아와 그레데의 군대가 없다.

'이제 디코콰리아의 전쟁은 끝이 난 건가.'

간신히 여름이 되기 전에 끝낼 수 있었다. 한시름 덜었다.

아직 남아있는 일이라고 하면 도적떼와 민가에 숨어든 패잔병을 색출하는 정도뿐이었다.

그런 일은 각 영지에 넣어둔 관리와 후일 도착할 영주들이 알아서 할 것이다.

"자, 우리는 이제 돌아가자."

루디는 제국군을 이끌고 다시 마녀가 있는 성으로 향했다. 이제는 돌아가서 전부인을 만날 시간이다.

"...."

한데 어쩐다.

적이라고는 하지만 마녀는 이 세계에서 치외법권이랄까, 대부분의 나라에서 어떤 짓도 용인되는 분위기가 있었다.

제국에서도 이전에 여러 번 서쪽마녀에게 뒤통수를 맞은 일이 있었는데, 그런 원한은 물에 흘리듯 잊어버린 척하며 지나갔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금 전까지 죽이려고 달려들던 적을 그냥 놔줄 수도 없다.

아무리 마녀라고 해도 그렇게 얼렁뚱땅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어갈 수는 없겠지.

"...."

놔준다고 해서 그냥 갈 것 같지도 않다.

자기도 모르게 끙, 소리가 났다. 아직 결혼한 적도 없는데 전부인에 대해서 고민하자니 머리가 아파왔다.

게다가, 어쩌면 좋냐. 혹시라도 서쪽마녀가 나는 전부인인데 라고 떠들어대기라도 하면....

'리리샤.'

그제서야 리리샤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라, 이거 리리샤한테 알려지면 진짜 울고불고 난리가 나는 거 아닌가.

머리 한구석에서 같은 지구에서 온 사람이라고 아주 조금 들떠있던 마음이 차갑게 식어 버렸다.

그러고 보니 마녀도, 리리샤도, 모두 루디에 대한 집착이 좀 강한 편이다.

한쪽은 어릴 때부터 잠시라도 곁을 떠나면 악을 쓰며 울어댔고, 다른 쪽은 천년 이상 집착하며 결국엔 자신을 소환까지 한 여자다.

'어머니가 내 사주 보러 갔을 때, 점쟁이한테 여난의 상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었지.'

그때 점쟁이가 몇 백만 원짜리 굿을 해야 한다고 어머니를 들쑤셨다. 굿을 하려는 어머니를 말리느라 아버지와 땀깨나 뺐는데, 어쩌면 그 점쟁이는 진짜였을지도 모르겠다. 굿을 할 걸 그랬나.

루디는 지끈지끈 아파오는 머리를 짚으며 말을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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