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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132화 (132/201)

#132 이 나라의 정당한 왕은 나일지니

어떻게 하면 마을이란 마을을 모조리 비울 수 있을까. 솔직히 불가능한 일이다. 성 근처에 있는 마을이라면 몰라도, 성에서 멀리 떨어진 마을까지 그런 일이 가능할 리 없다.

윌리엄은 이야기를 듣고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마을 사람들이 모두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지. 어쩌면 근처에 있는 성안으로 들어갔을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지역으로 모았을지도 몰라. 하지만 분명한 건, 한두 해 준비한 일은 아니라는 거야."

친분이 있는 백인대장은 그렇게 말하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놈들은 우리가 오기 훨씬 전부터 대비하고 있었던 거지. 마을을 모두 비운 건 아마 사람들을 대피시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우리를 괴롭히기 위한 걸 거다."

윌리엄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확실히 백인대장의 말 대로였다.

많은 나라의 군대가 보급 부대 없이 움직인다. 약탈을 하지 못하면 식량과 여자를 구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요 수익도 없다.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고 생존까지 위협받는다. 전쟁을 할 수 없는 거다. 최악의 경우에는 싸우지도 못한 채 먹을 식량이 없어서 그냥 되돌아가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한가? 마을을 모두 비운다는 게 정말 가능해?"

윌리엄의 물음에 백인대장이 씹어뱉듯이 말했다.

"실제로 우리가 겪고 있잖아. 이건 어쩌다 알게 된 건데, 와토린구 위쪽에 있는 산으로 돌아간 군대가 있다더군. 그놈들하고 만나서 와토린구의 영주성을 치기로 했대. 하지만 이 상태로는 거기까지 가지도 못할 거야."

백인대장이 바닥에 가래를 뱉고 말했다.

"결국 오늘 아침 와토린구 옆에 있는 몬테스로 빠진다는 명령이 내려왔어."

"와토린구를 뒤로 미룬다는 건가?"

"나야 모르지. 식량을 보충하고 다시 와토린구로 갈지, 아니면 그대로 몬테스 영주의 성을 공격할지. 어쨌든 먹을 게 없는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몬테스에는 암염이 나는 지역이 포함되어 있다. 본래 그레데 왕국은 암염이 있는 지역과 그 주변을 점령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으니, 목적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제국의 본대가 도착하기 전에 최대한 점령지역을 넓혀 전선을 확대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제국군에게 밀려 결국엔 그레데가 전쟁터가 될 것이다.

게다가 와토린구는 가장 크고 견고한 성이 카니아 침공 때 완전히 파괴된 상태였다. 현재 영주성으로 사용하고 있는 성은 그것보다 작다. 지금이라면 성을 빼앗을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제국군이 온 뒤라면 불가능하겠지.'

백인대장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총대장의 부관이 윌리엄을 부르러 왔다.

백인대장은 부관의 모습이 나타나자마자 똥 씹어먹은 얼굴을 하고 자신의 부대로 돌아갔다.

그레데 왕국군의 총대장은 왕세자다. 아버지나 아들이나 도긴개긴으로 무능하고 탐욕스러웠다.

아직 진군중인데도 왕세자는 의자에 앉아있었다. 의자는 또 어디서 가져온 건지. 어쩌면 짐수레에 싣고 온 걸까.

총대장이 이런 꼴이니, 이 전쟁의 결말이 좋게 날 것 같지 않다. 다들 말은 안 해도 속으로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뭐, 가장 추운 한겨울에, 단독으로 제국과 전쟁하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만.

태어날 때 나라를 잘못 선택한 게 분명한 것 같다.

왕세자 주위에는 각자의 영지에서 병사들을 끌고 온 영주나 대리자들이 서 있었다. 방금 회의를 끝낸 모양이다. 다들 침중한 표정이었다.

"왕세자 전하, 부르셨습니까."

윌리엄이 절을 하자, 왕세자가 엄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윌리엄, 우리의 상황이 어렵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겠지?"

"예, 전하."

싫은 예감이 들었다. 왕세자가 저런 식으로 정색을 하고 말하면 변변한 일이 없다.

"공성전 준비를 하기는 했지만 겨울이라 공성 장비가 든 수레에 문제가 생겼어. 움직일 수 없다. 아무래도 마녀의 힘을 빌려야 할 것 같아."

"그,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그걸 내게 물어보면 어쩌느냐. 마녀가 뭘 할 수 있는지는 그대가 알아봐야지. 성 공격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전하, 국왕 폐하와 마녀의 약속은...."

윌리엄이 말을 꺼내자, 왕세자가 벌컥 화를 내며 의자 팔걸이를 두드렸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딴 소리를 하고 있으면 어쩌겠는가. 성을 공격하지 못하면 이대로 방황하다 그대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마녀도 그걸 원하는 건 아니겠지."

왕세자가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마녀를 설득하는 것이 네 일일 것이다. 설마하니 정말로 호위만으로 끝낼 생각은 아니었겠지."

왕세자가 이런 식으로 나올 때는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 윌리엄은 일단 수긍하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마녀가 공성전에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 외에도 몇 가지 자잘한 이야기를 들은 끝에, 윌리엄은 겨우 왕세자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윌리엄이 인사를 하고 몸을 돌리려는데, 왕세자가 약간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오늘 저녁 마녀의 거처는 내 천막으로 하도록."

윌리엄은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았다.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잠시 마음을 식힌다.

왕세자가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정말 화가 났다.

한겨울, 병사들이 먹을 식량조차 오늘 내일 하는 판에 본인은 여자를, 그것도 손대서는 안 될 여자를 자신의 천막에 불러들이려 한다. 듣기로는 이곳까지 오는 동안 동사자도 있었다고 하는데, 그런 일은 전혀 안중에도 없는 걸까.

'정말, 나는 태어날 곳을 잘못 선택했어.'

윌리엄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전하, 저 여자는 아름다워 보여도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마녀입니다. 너무 위험해요. 그녀와 전하를 단둘이 두었다가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윌리엄은 목소리가 날카로워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말을 이었다.

"게다가 이곳으로 출발하기 전 국왕 폐하의 엄중한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혹시라도 마녀를 불편하게 해서 다른 나라로 떠나게 하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고요. 마녀는 반드시 우리나라가 아니라도 상관없다고 했습니다. 폐하께서 만일 그런 일이 벌어지면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책임을 묻겠다고 하셨습니다."

윌리엄을 노려보는 왕세자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죄송합니다, 전하. 하지만 폐하께서 저를 따로 불러 특별히 당부하신 일입니다."

"칫, 알았다."

왕세자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혀를 찼다.

윌리엄은 절을 하고 재빨리 물러났다.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불만스러운 티를 보일 것 같았다.

왕세자에게서 떨어져 흩어져 쉬고 있는 병사들 사이를 걸어갔다. 곳곳에 동상 걸린 병사가 있었다.

어느 정도 지위와 돈이 있다면 모를까, 징집되어 끌려온 평민 병사에게는 제대로 된 신발이나 옷이 없는 경우도 많다.

윌리엄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는 병사들에게서 눈을 돌린 채 빠르게 걸었다.

동상에 걸리면 발이 썩어들어간다. 전쟁터에서 살아남더라도 결국엔 고통스럽게 죽어버릴 것이다.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더 어렵고 힘든 세상이다.

'빌어먹을.'

서쪽마녀는 군대와 합류한 뒤에도 거의 대부분은 마차 안에 머물고 있었다.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인지, 아니면 마녀의 습성이 그런 건지, 서쪽마녀는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싫어했다.

까마귀는 마차 지붕 위에 몇 마리만 남아 있었다. 왕의 앞에서 물러난 이후 조금씩 줄어들더니 어느새 몇 마리만 남아버렸다. 하지만 언제 날아갔는지, 떠나는 까마귀를 본 사람이 없었다.

'소름 끼치는 일이야.'

윌리엄은 마차의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대답하는 소리가 들리자, 윌리엄은 안될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성을 함락시키는 일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물었다.

서쪽마녀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렇겠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마녀라고 별 수 있을까. 하지만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 마녀가 말했다.

"당신들이 나의 새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성에 올라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윌리엄은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물었다.

"그,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

"그래,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너무 오래 유지할 수는 없어요. 십 분 정도, 길면 이십 분일 겁니다."

"그걸로 충분합니다."

성은 대부분 해자로 둘러져 있거나, 그게 아니라도 매우 높다. 그 때문에 보통은 공성 장비를 끌고 가거나 공격할 장소에서 만들어 사다리를 걸친 뒤에 넘어갔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 준비 없이 성벽을 넘어갈 수 있다면 그 이점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윌리엄은 문득 마차를 바라보았다.

마녀에게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면 국왕과 왕세자는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잡아두려고 하지 않을까. 그야말로 사지를 모두 끊거나 약을 이용해서라도 그녀를 나라에 묶으려고 할지 모른다.

"...."

윌리엄은 몸을 돌렸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이 전쟁을 이롭게 끌고 나가야 한다. 자신이 마녀를 걱정해서 어쩔 건가.

'혹시 마녀한테 내가 홀리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

구체적으로 마녀가 무엇을 어떻게 할 건지 모르는 상태에서 그레데 왕국군은 첫 번째 디코콰리아의 성에 도착했다.

***

지옥이다.

루디는 망연히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았다.

디코콰리아에 접어든 이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비쩍 말라비틀어진 사람들의 시체였다.

뼈의 모습을 그대로 알 수 있을 것처럼 마른 아이, 남녀의 차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피골이 상접한 성인. 조금이라도 살이 붙어 있는 사람은 없다. 모두 똑같이 말랐다.

국경에서 조금 들어가자 그런 사람들의 시체가 곳곳에 널려 있었다. 추위 때문에 죽을 당시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갖추고 있었다. 그들의 몸에 솜이불을 덮은 것처럼 눈이 조금 쌓여 있다.

루디는 말에서 내려 한 아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이의 몸에는 눈이 덮여 있지 않았다. 어쩌면 살아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할 만큼 아이의 얼굴이 깨끗했다. 지금이라도 부르면 눈을 뜰 것처럼 보였다.

루디는 아이의 몸을 안으려고 했지만, 안 된다.

아, 죽은 거구나.

한 번 더 안으려고 시도한 뒤에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의 몸은 완전히 굳은 채 땅에 붙어 있었다.

얼핏 볼 때 아이에게는 상처가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시선을 조금 숙여서 바닥을 들여다보자, 조금 뒤틀린 몸의 등에서 피가 흘러 고인 것이 보였다. 눈이 검붉은 피를 그대로 빨아들여 흐르지 않은 것뿐이었다.

"어째서."

어째서 이토록 어린아이조차 여기에 죽어있는가. 사람은 왜 이리 잔인한가.

루디가 중얼거리자 보좌관이 옆에 와 무릎을 꿇었다.

"폐하."

루디가 고개를 들자, 보좌관이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얼굴에서, 루디는 이 보좌관이 이런 시체를 이전에도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위를 둘러보자 병사들이 루디를 보고 있었다. 그들 역시 이렇게 마르고 비참한 시체를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루디만이 넋을 잃고 있었다.

'그런가. 이 사람들에게는 오래전 디코콰리아가 침략당할 당시 이미 숱하게 본 장면인가.'

루디가 다시 아이의 주검에 시선을 주자, 보좌관이 입을 열었다.

"이들은 국경을 넘으려던 난민들입니다. 필시 카니아의 병사가 죽인 걸 테지요. 지배하는 측이다보니 처음부터 살리려는 생각은 없었을 겁니다."

"그래."

"다른 곳에도 이런 시체는 있습니다, 폐하."

"...그래."

"폐하."

"...."

루디는 잠시 눈을 감았다. 잘못하면 눈물이 흐를 것 같다. 한참 뒤 루디가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병사들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대들은 이미 제국이 디코콰리아에 온 이유를 듣고 있을 것이다."

루디는 찬찬히 주위의 병사들을 보았다. 모두 조용히 루디를 보고 있었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그대들에게 말하니, 이 땅의 백성을 더 이상 고통 속에 두지 말라. 디코콰리아의 왕은 본래 와토린구의 혈통. 이 나라의 정당한 왕은 나일지니, 그대들의 손으로 억압받고 있는 나의 백성들을 구하라."

루디의 말이 끝나자 병사들의 요란한 함성이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울려 퍼졌다.

"우리 황제의 나라를 찬탈한 카니아를 물리쳐라!"

"그레데를 이 땅에서 내몰자!"

"물리쳐라!"

"물리쳐라!"

이 나라를 침략한 것이 그레데나 카니아뿐만은 아니다. 제국 역시 디코콰리아를 침략한 나라였다. 하지만 그 일을 언급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지금 그들의 앞에 서 있는 루디는 디코콰리아의 왕이 아니다. 병사들이 보고 있는 사람은 제국의 황제였다.

그리고 이 나라에서 카니아를 쫓아내고 지배하는 자도 디코콰리아의 왕이 아닌 제국의 황제다.

제국의 황제가 디코콰리아를 다스린다.

병사들의 함성 소리는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국경을 뒤흔들었다.

황제폐하 만세!

푸테그린 제국 만세!

루디는 사람들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오래 걸렸지만, 이제야 겨우 황제가 된 목적을 이룰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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