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115화 (115/201)

#115 진실의 의자

"폐하,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시종이 의자를 가지고 와 루디 앞에 놓자, 시종장이 물었다.

이번 켈러 가문의 당주와 만날 때 사용할 알현실 의자다.

루디 앞에 놓인 의자는 뒤집혀 있었다.

앉는 부분 뒷면에는 마석이 박혀 있고, 마석에서부터 얇게 파인 홈이 뻗어 나와 의자 바닥 가장자리를 둘러쌌다.

송곳으로 홈을 낸 것처럼 파인 홈은 가장자리에서 다시 십자선을 그리며 중앙에서 교차하고 있었다.

그 홈을 채우고 있는 것은 마잉크다.

"그래, 이 정도면 괜찮아."

루디가 고개를 끄덕이자,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마잉크가 담긴 병과 펜을 가지고 왔다.

펜은 끝이 뭉툭했다. 꼭 펜 끄트머리를 잘라 놓은 것처럼 보였다.

이 펜으로 쓰면 글씨가 몇 배 두껍게 나온다고 한다.

마법 문자를 쓸 때 마잉크를 더 많이 묻힐 수 있도록 고안된 거라고 들었다.

루디는 의자 앞에 앉아 빈 공간에 마법 문자를 적어 넣기 시작했다. 나중에 수정할 걸 생각해서 글자와 글자 사이는 넉넉하게 여러 줄 띄웠다.

[거짓말 탐지기 ; 인증 없음 ; 누구나 사용 가능 ; 명령어 "진실의 의자" "구속" "해방" "진실의 의자 오프" ; ]

거기까지 쓴 뒤 잠시 생각에 하고, 루디는 다시 마법 문자를 이었다.

[ ; TRUE 일때 무반응 , FALSE 일때 불빛 ; "구속" 명령 시 전신의 근육 무력 ]

중학교 올라갈 무렵, 친척형이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었다.

가끔 친척 집에 놀러 갈 때마다 나이차 많은 형은 회사 일을 다 못 끝내고 집에 가져온 건지, 아니면 공부를 하고 있었던 건지, 프로그램 작업을 하고 있었다.

책상에는 왠지 멋져 보이는 도형과 글자들이 적힌 노트와 종이가 흩어져 있었다.

그때 언뜻 어깨너머로 보고 이것저것 배웠다.

정식으로 배운 것도 아니고, 제대로 된 프로그램 언어도 아니었다.

자신은 그렇게 향학열에 불타는 유형이 아니다.

그저 친척형이 쓰던 낯선 문자들이 왠지 멋있어 보여서, 비슷하게 흉내만 내 노트에 한껏 비슷하게 적곤 했었다.

한데 어째서인지 이 세계의 마법 문자는 그때 자신이 중2병에 걸려 노트에 장난삼아 적던 것과 비슷한 체계를 가지고 있다.

'이상하기도 하지.'

루디는 다시 한번 자신이 적은 걸 읽어본 뒤, 마지막으로 마력 회로를 그려 넣었다.

보통, 마도구에는 전기 회로와 비슷한 마력 회로가 그려져 있다.

사람의 몸이나 마잉크로 마생물을 만들 때는 그런 게 필요 없다.

하지만 무생물인 물건은 그냥 마잉크로만 가동할 수 없었다. 반드시 마석과 같은 동력원을 그린 회로가 필요하다.

구조는 간단했다.

전자 회로의 콘덴서 부분 대신 "마석"이라는 한글이 들어가면 된다.

다른 걸 첨가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쨌든 마석과 선만 그려져 있으면 마도구가 된다.

굉장히 어설프지만, 왠지 그게 통용되어 실제로 만들어지고 있으니 뭐, 그런가 보다 해야지.

어차피 말도 안 되는 마법이 있고 마생물이 살아 돌아다니는 세상이다. 어설픈 마력 회로 정도야 이상한 일도 아닐 것이다.

"시종장, 테스트를 해보게 좀 도와줘."

왠지 엎어진 의자를 보고 묘하게 감동하고 있는 시종장을 불러, 의자를 세우고 그 위에 앉혔다.

방 안에는 보리스와 시종장, 그리고 업무를 내팽개치고 구경 온 관리들로 가득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실패하면....'

엄청 부끄럽겠지. 약간 걱정이 된다.

"한데 폐하, 이것은 무엇입니까?"

의자에 앉아서 시종장이 감동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모르면서 왜 감동을 하고 있는 거야?

"진실의 의자다. 거짓을 말하는지 진실을 말하는지 판별하는 거야."

"그런 게 가능합니까?"

시종장이 깜짝 놀라며 고개를 기울여 자신이 앉은 의자를 다시 바라보았다.

"가능한지 아닌지는 지금부터 검증해봐야지."

루디는 시종장 앞에 섰다.

그때, 사람이 가득하던 방에 모세의 바닷길이 열리는 것처럼 길이 생겼다.

태상황제와 태상황후가 나란히 방으로 들어왔다. 태상황제야 그렇다 쳐도, 태상황후까지 뭔가 기대하고 있는 듯한 표정이다.

태상황제가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황제가 마도구를 만들었다고 해서 구경하러 왔다."

그 뒤에서 빼꼼 리리샤가 고개를 내밀었다.

"폐하! 소첩도 왔사옵니다."

리리샤가 어디에서 이상한 말투를 배워 왔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말투가 매우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어딘지 모르게 의기양양하다. 엣헴, 하는 얼굴로 턱을 들고 새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의 약간 뒤에, 자기도 있다는 듯이 한껏 가슴을 내밀며 존재감을 나타내려고 노력하는 소녀가 있었다.

다른 황후의 시녀들처럼 고개는 약간 숙이고 있다. 하지만 어깨가 자꾸만 들썩였다. 어떻게든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은 모양이다.

소녀는 한계까지 납작한 가슴을 잔뜩 내밀고 있었다. 너무 지나치게 상체를 내밀어서 허리에 무리가 갈 것처럼 보였다.

초원에서 맹약의 증거로 온 소녀, 타이라다.

그녀는 시녀로서의 교육이 너무 모자라다는 이유로 아직 루디를 만난 적이 없었다.

루디가 별궁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면 다른 곳으로 보내졌다.

남작 부인은 타이라가 루디를 만나고 싶어 하는 걸 일종의 당근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황제 폐하를 만나고 싶다면 제대로 된 시녀처럼 행동해라, 뭐 그런 거겠지.

타이라가 바짝 긴장해서 공부하면 그것은 리리샤에게 전염되어, 결국엔 둘 다 눈에 불을 켜고 공부를 한다고 남작 부인이 흐뭇해하고 있었다.

'오늘 처음으로 높은 점수를 받은 건가.'

9살, 10살이면 루디가 볼 때는 그야말로 어린아이다.

도토리를 얻기 위해서 힘껏 달리는 다람쥐를 보고 있는 것 같아 왠지 둘 다 귀여웠다.

루디의 시선이 타이라를 향하자, 리리샤가 자신도 납작 가슴을 앞으로 내밀었다.

'아니, 가슴 때문에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니니까.'

여전히 이상한 걸로 경쟁하고 있는 모양이다. 남작 부인이 두 사람 뒤에서 살짝 한숨을 쉬었다.

사람이 너무 늘어나니 왠지 부담감이 증가했다.

루디는 시종장을 일어나게 하고 다시 의자 바닥 뒷면에 있는 글자를 수정했다.

[ ; TRUE 일때 불꽃놀이 & 천사의 나팔 영상 , FALSE 일때 지옥도 영상 재현 & 티라노사우루스 영상 재현 ]

만일 이게 제대로 발현되지 않는다면 대망신이다.

시종장이 기대하는 표정으로 의자에 앉자, 루디가 입을 열었다.

"시종장 지금부터는 내가 묻는 말에 무조건 네, 라고 대답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폐하."

"당신은 남성입니까?"

시종장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네."

그 순간, 방안 여기저기에서 화려한 불꽃이 터졌다. 소리는 나지 않지만 마치 팡, 팡, 하는 효과음이 들리는 것 같았다.

동시에 작은 아기 천사들이 나타나 사람들의 머리 위를 날아다니며 나팔을 입에 대고 불었다. 물론 소리는 나지 않는다.

작은 날개를 파닥파닥 움직이며 아기 천사들이 방을 날아다니자, 태상황후가 맙소사 라고 중얼거렸다.

리리샤가 팔딱 팔딱 위로 뛰면서 아기 천사를 잡으려 하자, 뒤에 서 있던 타이라가 더 높이 뛰며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두 사람이 시소라도 타는 것처럼 번갈아가며 허공으로 뛰었다.

"황후 마마, 타이라! 그만하세요."

남작 부인이 작은 소리로 뭐라고 했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뜀박질을 곁눈질하며 계속해서 뛴다.

상황후가 뭔가 말하기 전에, 루디는 다시 질문을 이어갔다.

"이렇게 의자에 앉은 사람이 대답을 하면, 거기에 따라 의자가 진실과 거짓을 판별하는 겁니다. 자 그러면 다음 질문을 해보죠. 시종장, 당신은 여성입니까?"

시종장이 재미있다는 듯이 입술을 올리며 대답했다.

"네."

갑자기 사방이 어두워졌다.

방 전체에 검은 암막 커튼이 내려온 것처럼 캄캄해지더니 바닥이 흐물흐물해졌다.

그저 영상일 뿐이지만 느낌 탓인지 정말 바닥이 허물어지는 것 같다. 음, 진짜 느낌뿐이겠지, 아마.

바닥은 마치 액상화되는 것처럼 꿀렁꿀렁하더니 이내 용암처럼 어두운 노란빛으로 물들어갔다.

볼록, 볼록, 둔탁한 노란 물이 터진다. 방 전체가 용암이 흐르는 길목에 놓인 것 같았다.

상황후가 깜짝 놀라며 몸을 비틀거리자, 태상황제가 재빨리 그녀의 팔을 잡았다.

묘하게 두 사람 사이가 끈적한 것처럼 보였다. 근래에 사이가 좋은 모양이다.

그 옆에서 리리샤와 타이라가 비명을 질렀다. 용암 흐르는 바닥에서 도망치려는 것처럼 발을 동동 구른다.

루디가 손을 뻗자, 리리샤가 얼른 그 손에 매달려왔다.

번쩍 안아 올리는 순간, 이번에는 벽에서 티라노사우루스의 얼굴이 불쑥 들어왔다.

기기기기, 소리가 나는 것처럼 천천히 얼굴을 움직여 사람들의 모습을 하나씩 노려본다.

사람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주로 여자들의 목소리다.

리리샤가 두 손으로 루디의 목을 꽉 끌어안으며 얼굴을 목덜미에 묻었다. 목이 졸린다. 이러다 황후한테 목이 졸려 죽겠다.

리리샤의 등을 가볍게 쓸어 안심시키는 동안, 티라노사우루스가 작은 손을 흔들며 벽에서 뛰쳐나왔다.

한 마리가 아니다. 처음 한 마리가 들어온 것을 시작으로, 여러 마리의 티라노사우루스가 방안으로 들어와 날뛰기 시작했다.

진짜처럼 보이지만 물론 영상이다. 아마 공룡 영화 어딘가에서 불러온 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방안은 이내 아수라장이 되었다. 조금 전까지 가만히 있던 관리들까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는다.

하지만 바닥은 용암이 흐르는 땅이다. 아니, 땅처럼 보인다.

관리들은 주저앉았다 다시 벌떡 일어나거나 어쩔 줄 몰라 하며 제자리에서 우왕좌왕 몸을 움직였다.

시녀들 중에는 기절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효과가 너무 지나쳤나 보다. 심지어 3D 영상이다. 루디의 눈에도 진짜처럼 보였다. 그냥 어두운 배경 정도로 그치는 건데 잘못했나 보다.

루디가 조금 당황해서 중얼거리는 가운데, 가장자리에 있던 몇 사람이 순식간에 구석으로 몰리며 몇 명이 넘어졌다.

누구는 넘어지고 누구는 주저앉아, 어느새 방안에 서 있는 사람은 태상황제와 보리스뿐이었다.

아, 남작 부인도 있구나. 그녀는 눈을 뜬 채 반쯤은 기절한 것처럼 보였지만. 어쨌든 서 있었다.

시종장은 여전히 의자에 앉은 상태로,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의 머리통을 집어삼키려고 하는 티라노사우루스를 올려다보았다.

티라노사우루스의 입속에 삼켜진 시종장이 중얼거렸다.

"이건 정말 대단하군요."

루디 근처에서 타이라가 바닥에 주저앉아 부들부들 떨며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우, 우, 하면서 운다.

루디는 리리샤를 안은 채 그 곁으로 다가가 고개를 약간 숙였다.

"괜찮으냐?"

타이라가 그를 올려다보더니 입술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폐, 폐하! 소, 소, 소, 소첩은 붉은매 부족의 막내딸 타이라라고 하옵니다. 오늘 이,렇게, 흑, 흑, 뵈, 뵙게, 되, 어, 만강 무지로소입니다."

"...."

상황에 안 맞는 자기소개는 둘째치고, 말도 이상하다.

대체 이런 말은 누가 가르친 거야.

그런 마음을 담아 서 있는 남작 부인을 바라보자, 티라노사우루스를 피해 몸을 비틀면서도 남작 부인이 작게 대답했다.

"그 말은 아마도 황궁에 오기 전에 배운 것 같습니다."

루디의 몸에 자신의 얼굴을 꾹 누르고 있던 리리샤가 목을 더 꽉 끌어안으며 말했다.

"소첩도 만나 뵈어 만강 무지로소입니다, 폐하!"

"...."

아니, 그 말 정말 이상한 거니까. 제대로 된 단어들이 아니야.

루디는 남작 부인을 보았다.

"황후와 타이라의 언어 공부 시간을 한 시간 정도 늘려 주게. 그리고 이상한 말은 쓰지 않도록 봐 줘."

"알겠습니다, 폐하."

루디는 타이라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고 작게 말했다.

"진실의 의자 오프."

그 순간, 방안을 가득 메우고 뛰어다니던 티라노사우루스와 사방에서 들끓던 용암이 사라졌다.

사람들이 멍한 표정으로 아무것도 없는 방을 둘러보았다.

"하하하하하하하."

태상황제가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이건 정말 걸작이구나. 이 의자, 황제가 사용하고 나면 내게 보내다오."

아무래도 진실의 의자는 태상황제의 마음에 쏙 들은 모양이다. 태상황제는 다리의 힘이 돌아오지 않은 상황후를 부축하며 방을 나갔다.

시종들이 들어와 기절한 사람들을 밖으로 나르고, 하인들이 방안의 어수선한 부분을 치웠다.

루디의 지시에 따라 시종이 다시 의자를 엎어 놓았다.

켈러 가문의 당주와 만날 때는 당연히 이런 장난 같은 영상으로는 안 된다. 그때는 제대로 된 거짓말 탐지기가 되어 줘야겠지.

리리샤는 여전히 루디의 품에 안겨 있고 싶어했지만, 그런 일이 가능할 리 없다. 결국 공부 시간이 되었다는 남작 부인의 재촉을 받고 방을 나갔다.

방이 조용해지자, 루디는 의자 밑판의 글자 일부분을 작은 칼로 살살 긁어 지운 뒤 그 위에 새로 주문을 적어 넣었다.

[ ; TRUE 일때 무반응 , FALSE 일때 지옥도 영상 재현 & 전기 충격 ]

그리고 이틀 뒤, 드디어 켈러 가문의 당주가 알현하는 날이 되었다.

***

준비된 알현실은 제일 작은 곳 중 하나였다.

작다고는 해도 현대 지구의 생활을 기억하는 루디가 볼 때는 상당히 크고 화려하다.

너른 공간의 바닥에는 융단이 깔려 있고, 사방 벽에는 마 전등이 일정한 간격으로 여러 개 붙어 있었다. 천장에는 크리스털로 장식된 샹들리에가 여러 개 늘어져 있다.

어린 루디에게 위엄을 더하기 위해서인지, 황궁의 곳곳은 매일같이 더욱더 화려하고 장엄하게 꾸며지는 중이다.

루디가 들어가자, 방 가운데에 켈러 당주가 혼자 서 있었다.

켈러 가문의 당주는 루디가 들어가자 우아한 동작으로 절을 하고 허리를 굽혔다.

켈러 당주는 매우 차가운 느낌을 주는 남자였다. 입술이 얇아서 더욱 그런 느낌을 주는 것 같다. 그다지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예법에 맞는 인사를 나누고 루디가 앉자, 켈러가의 당주도 의자에 앉았다. 당연히 그가 앉은 곳은 진실의 의자다.

몇 마디 의례적인 대화를 나누다, 켈러 당주가 일전의 무례에 대해서 말을 꺼냈다.

"저희 가문의 철없는 젊은이가 폐하께 무례를 저질렀다는 점을 알고 저의 마음은 고통에 찢어지는 듯하였습니다. 그 마음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운을 뗀 켈러 당주는 구구절절 사과의 말을 읊으면서 근처에서 대기하던 시종에게 시선을 주었다.

알현실에는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들어오거나, 검품하지 않은 물건은 반입할 수 없다.

황제에게 진상할 물건이 있는 경우에는 실물이 아닌 목록으로 전했다.

하지만 황제에게 직접 보여야 할 물건이 있는 경우에는 시종에게 미리 보이고 맡기게 된다.

저 상자도 마찬가지로 이미 시종이 검품을 마친 물건일 것이다.

시종이 작은 상자를 들고 루디와 켈러 당주의 옆으로 다가왔다.

"폐하, 저희 가문의 죄를 이것으로 씻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저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하여 죄인의 미천한 것을 가져왔나이다."

켈러 당주의 말이 끝나자, 시종이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작은 상자 안에는 붉은 융단이 깔려 있었다. 폭신하게 올라온 붉은 천 가운데에는 사람의 손가락과 혓바닥으로 여겨지는 것이 들어 있었다.

속이 메슥거린다.

루디는 감정이 표정에 나오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켈러 당주의 얼굴을 보았다.

"저희 가문의 죄인, 뮐러의 것입니다. 그는 이미 가문에서 죄에 대한 합당한 벌을 받은 뒤 자결했습니다. 이것으로 폐하의 마음이 맑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허나, 부디 육친의 정을 생각하시어...."

켈러 당주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글쎄, 그는 그대의 가문에서 매우 귀중한 인물이라고 알았는데, 아깝게 되었군."

"폐하께 무례를 저지른 자를 어찌 가문에서 옹호할 수 있겠습니까. 제아무리 천재요 인재라 할지라도 가문 안에 두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글쎄,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다. 코레아 왕조 내에서도 마력소유는 점점 줄어들고, 문장을 가지고 있는 자조차 얼마 없다고 들었다.

그런 상태에서 정말로 천재라 불리던 청년을 완전히 포기한다고?

코레아 문장 소유의 여자 한 명을 위해 제국의 황제까지 손수 청혼하러 가는 형국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솔직히 믿을 수 없다.

애초에 저 손가락과 혓바닥이 정말로 그 청년의 것이 맞기는 한 걸까.

루디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뮐러라고 했던가? 그 청년이 내게 어떤 무례를 했더라도 제국의 황제에게 거짓말을 토하는 것보다야 덜 무례할 것이다."

켈러 당주가 약간 놀란 듯 말했다.

"설마, 그런 무례한 자가 있습니까?"

"글쎄, 아, 그대도 아마 마도구사였다고 들었네. 내가 얼마 전에 새로운 마도구를 하나 만들었지. 아직까지 이 세상에는 없는 것이라고 알고 있네. 그대에게도 보여주지."

"감사합니다. 꼭 한 번 이 눈으로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저의 보물이었던 딸의 이야기도 언젠가 폐하께 들려주고 싶습니다."

켈러 당주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나도 꼭 듣고 싶네. 우선 마도구를 보여주지. [진실의 의자, 구속]."

"윽!"

한국어로 말하자마자, 갑자기 켈러 당주가 눈을 크게 뜨고 몸을 비틀었다.

"폐, 폐하! 이것은 대체! 모, 몸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부디 풀어주십시오."

구속이라는 명령이 어떻게 되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하지만 켈러 당주의 모습을 보건대, 아마 온몸에 약한 전류가 흘러 마비가 되는 모양이다.

뭐, 지금 의자에 쓰인 마석은 황금색에 가까운 노란색, 전기의 성질을 띠고 있으니 당연한 이야기인가.

켈러 당주의 얼굴에서 땀이 비 오듯 흐른다.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놀라는 모습이 심상치 않다. 왠지 생각보다 훨씬 겁을 먹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든 진실의 의자라는 걸세. 자네가 말하는 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판별해 주지. 그럼, 내 물어보겠네. 그대가 말한 것처럼, 뮐러가 죽은 건 사실인가?"

"당연히 사실입니다, 폐하."

그렇게 말한 순간이었다. 켈러 당주의 몸이 크게 튀었다.

"끄아아아악!"

본래 거짓말 탐지기는 네, 아니요, 라는 답변으로 판별하는 거로 아는데, 이 판타지 세계에서는 평범한 대답으로도 판별할 수 있는 모양이다.

켈러 당주의 몸에서 파직 파직 전기가 일었다. 생각보다 전기의 출력이 큰 것 같다.

"거짓을 말하면 그렇게 된다네."

루디가 조용히 말하자, 켈러 당주가 숨을 헐떡이면서 공포에 질린 표장으로 더듬거렸다.

"폐, 폐하, 이것은, 이, 이것은."

확실히 이상하다. 놀랄 거라고는 예상했어도 켈러 당주는 너무 두려워한다.

"다시 한번 묻지. 뮐러는 정말로 죽었나?"

"...."

"대답을 하지 않아도 그 의자에는 그대를 두렵게 할 장치가 있다네."

"주,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이 상자에 있는 건 다른 사람의 것인가?"

"...."

"두 번은 묻지 않아."

"그, 그렇습니다. 폐하, 부디 용서를."

루디는 가만히 켈러 당주를 보다 정말 묻고 싶었던 질문으로 들어갔다.

"나의 어머니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었나?"

켈러 당주의 얼굴이 이번에는 흙빛이 되었다. 기절할 듯한 얼굴로 켈러 당주가 입을 열었다.

"폐하, 그, 그것은."

루디가 자리에 일어나 켈러 당주에게 한 발 다가가자,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그가 소리쳤다.

"그렇습니다! 그 아이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입니다. 하지만 와토린구 공작이!"

켈러 당주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루디를 쳐다본다.

루디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계속 말해."

켈러 당주가 절망적인 표정이 되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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