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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42화 (42/201)

< 와토린구 공작을 닮은 아이 >

* * *

사방은 아직 캄캄한데 벌써 불을 줄이는 시간이 된 것 같다. 마 전등과 초를 관리하는 하인이 복도를 돌아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시간인가.’

마도구는 황궁의 건재함을 과시하는 가장 좋은 도구다.

그래서 새해 연회가 열리는 이 시기에는 특히 마 전등을 많이 켜 두었다.

타국의 모든 사람들이 보고 놀라도록, 제국 안 귀족들이 황제의 위엄에 눌려 절대로 반발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그들이 모두 잠드는 시간이 되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불을 줄인다.

시종장 레이놀드는 하인에게서 향유를 받고 몸을 돌렸다.

조용히 문이 닫히고, 방 안은 다시 고요함에 휩싸였다.

타닥타닥, 불꽃 흩어지는 소리가 끊임없이 오른다.

이 너른 방 안에 마 전등은 없다.

길게 늘어져 내려온 샹들리에와 벽에 꽂혀 있는 것은 마도구가 아니라 실제 불을 가지고 있는 초였다.

황궁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고귀한 핏줄이라는데, 황제의 방에는 마도구가 거의 없다.

방의 주인이 싫어하기 때문이다.

레이놀드는 긴 셔츠에 가운만 입고 있는 황제의 등 뒤로 다가갔다.

커다란 의자가 작아 보일 만큼 황제의 몸은 거구에 뚱뚱하다. 살덩이가 의자 밑으로 흘러 떨어질 것처럼 보였다.

레이놀드는 황제의 옷을 젖히고 그 살에 향유를 떨어뜨렸다. 황제의 어깨를 부드럽게 마사지하며 두드린다.

나이가 많아지면서 살이 불어난 황제는 여전히 검투장에서 노예와 칼을 겨루지만, 젊을 때 만큼의 기력은 이미 없다.

다른 사람은 그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타인의 눈에 황제는 여전히 폭발적인 힘과 마력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레이놀드와, 황제를 항상 상대하는 금색 목걸이의 노예들은 이미 예전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아무도 그걸 언급하지 않는다.

조용히, 아무도 모르는 것처럼 넘어갔다.

이번에도 며칠 동안 연회에 참석했다고 이꼴이다.

지친 듯 머리를 앞으로 떨구고, 마사지가 길어지면서 가끔은 코까지 고는 황제의 뒤통수를 보며, 레이놀드의 마음은 조금 서글퍼졌다.

어릴 때부터 보아온 단단한 등이 언제 이렇게 살에 파묻혔을까. 언제 이렇게 두리뭉실한 살로 변한 거지.

황제와 시종장은 두 개의 몸을 가지고 태어난 하나의 영혼이라고 자신에게 가르쳤던 전대의 시종장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사람도 고목 마르듯 늙어가는 전대 황제의 모습을 보고 마음 아파했을까.

한참을 마사지 하여 굳은살을 푸는데, 문득 황제가 고개를 조금 들었다.

“레이, 화가 났느냐.”

“···.”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황제는 자는지 깨어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조용히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화 내지 마라. 너마저 내게 차갑게 굴면 내가 비빌 데가 없구나.”

“화나지 않았습니다, 폐하.”

“꼬박꼬박 폐하라고 깍듯이 말하는구나.”

“시종이니까요.”

“그 아이를 내몬 것이 그리 화가 났느냐.”

“···.”

레이놀드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루디의 작은 몸에 생긴 상처를 떠올리자 이마에 주름이 생겼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 아이는 나디아 마마께 필요하다고. 겨우 정신이 안정되어가는 데 그 난리를···. 당분간은 또다시 엉망입니다.”

“이유가 있었어.”

“글쎄요, 당신께서 하는 일에는 항상 이유가 있지요.”

“···반지가 반응했다.”

“!”

자기도 모르게 황제의 어깨를 주무르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죄송합니다.”

“크크, 괜찮아. 레이, 예전처럼 이 앞에 앉아봐라.”

“폐하, 지금은 십대 시절의 망나니가 아닙니다. 저도 당신도, 훌륭한 어른이에요. 훌륭한 황제는 신하에게 무리한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딱딱한 말은 마라. 가끔은 괜찮잖아.”

황제가 몸을 의자에 기대앉자, 레이놀드도 어쩔 수 없이 어깨에서 손을 뗐다.

그가 황제의 앞으로 가자, 턱으로 근처에 있는 의자를 가리킨다.

레이놀드가 그 자리에 앉자, 황제가 손에 가득 끼워진 반지 중 한 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 반지는 황가에 대대로 내려오는 보물이다. 마력이 강한 사람에게 반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레이놀드가 아는 한 반지가 미력에 반응한 일은 그다지 많지 않다.

가장 최근에 반응한 것은 엔리코 황자에게였다.

황태자에게는 반응하지 않았다.

“반지가 반응했다는 말이 정말입니까.”

레이놀드가 묻자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히죽 웃었다.

“나도 놀랐다. 그 아이를 보자마자 반응하더군. 그 아이가 어리다 보니 연회를 보고 놀랐던 게 아닐까 싶어.”

“맙소사!”

레이놀드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반지가 마력에 반응하는 것은 맞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마력은 보통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는다. 감정에 급격한 변화가 있을 때 마력이 몸 밖에 표출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걸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황제의 마력 반지는 그걸 감지할 수 있는 특별한 물건이었다.

“그렇다면 상당한 마력소유일 테지요. 조금 놀란 것만으로 마력이 새어 나온다는 건 분명 엄청난···.”

가슴이 흥분으로 두근거렸다.

아직까지 황제만큼 강한 마력을 타고 난 황자는 없다. 오히려 쭉정이처럼 마력이 있다는 흉내만 낸 황자만 줄줄이 태어났다.

그래서 황제는 계속 초조하다.

아무에게도 황가의 보물을 넘겨줄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항상 황제가 몸에 붙이고 다니는 반지조차도 지금의 황태자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이대로는 대대로 내려오는 마도구를 그대로 황가의 보고에 넣어두는 수밖에 없다고, 황제는 계속해서 후사를 걱정하고 있었다.

‘만일 강한 마력 소유를 수중에 넣을 수만 있다면···.’

레이놀드는 침을 삼키며 주먹을 쥐었다.

아직 기대하기에는 이르다.

레이놀드는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며 황제에게 시선을 주었다.

마력 반지가 대단한 것은 맞지만 만능은 아니다. 상대의 마력이 어느 정도인지 세세히 알 수는 없었다. 단지 상대의 마력이 일정 수준을 넘는다는 사실만 알 수 있다.

레이놀드가 알기로는 세 단계 정도가 있다.

무엇보다도, 반지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누구라고 확정 지을 수도 없다.

그 방에 있는 누구도 마력 소유가 될 수 있었다.

레이놀드는 그런 가능성을 생각하면서 입을 열었다.

“그 아이가 아닌 다른 사람일 가능성은···아, 그래서 검투를 하게 했군요.”

레이놀드가 눈을 크게 뜨자,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고 웃었다.

“그 아이가 싸우기 전부터 반지가 가장 윗단계를 알리더군. 그 단계까지 올라간 건 내가 반지를 끼고 처음이었다.”

황제가 의자 옆에 있는 작은 테이블에서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다. 몸을 의자에 깊숙이 파묻으면서 황제는 물끄러미 술잔을 바라보았다.

황금으로 만든 술잔이 촛불에 어른거리며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황제의 얼굴에 음산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지금까지 원하는 건 뭐든지 가졌지. 내가 가질 수 없는 건 없었다. 딱 한 가지만 빼면 말이야.”

“···.”

마력 소유의 자식을 말하는 걸까.

레이놀드가 가만히 있자, 황제가 다시 한 모금 목을 축였다.

“착각하지 마라, 레이. 마력 소유 따위는 이 세계 끝까지 추적해서라도 가질 수 있어. 그건 단지 시간이 걸릴 뿐이지, 이 세상에 태어나있기만 하다면 가질 수 없는 건 아니야.”

레이놀드는 약간 놀라서 황제의 얼굴을 보았다.

“황자님들 이야기가 아니었습니까.”

이상하다. 그가 알기로 황제가 원해서 이루지 못한 것은 없다.

황제가 음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코레아 왕조의 공주다. 그녀만이 내가 가질 수 없는 유일한 것이었다.”

“아!”

레이놀드는 쓰게 웃었다.

“와토린구 공작 부인 말씀이군요.”

공주라고 하지만, 실제로 공주의 작위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그것은 그저 세상 사람들이 부르는 별명 같은 것이었다.

코레아 왕조가 왕국을 이루고 있던 것은 아주 한참 전의 일이다. 그들은 이미 멸망한지 오래되어 지금은 다른 왕국에 기생하듯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와토린구 공작 부인은 그런 코레아 왕조의 후손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문장을 가진 여성이었다. 그래서 모두 그녀를 공주라고 부른다.

황제는 그녀를 바랐지만, 강제로 밀어붙일 수는 없었다.

코레아 왕조는 서로가 사이좋은 것은 아니고, 오히려 물어뜯는 관계라고 할 수 있지만, 맹약에 들어 있는 가문이 불이익을 당하면 모두가 마법식의 주문을 거절한다.

현재 마도구에 마법식을 새길 수 있는 것은 그들뿐이다.

그 때문에 맹약을 맺고 있는 코레아 가문에는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다.

황제 역시 그녀에게 구혼한 다른 남자들처럼 스스로 다리를 움직여 찾아가고, 꽃과 보석을 바치며 사랑을 구걸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결국 선택한 것은 와토린구 공작이었다.

“폐하, 그녀가 청혼을 거절했던 일을 아직도 마음에 두고 계십니까?”

“자네는 그녀를 보지 못해서 몰라. 그녀는 단지 문장을 가진 여자가 아니다. 그녀의 검은 머리는···.”

문득 말을 멈추고 황제가 한숨을 쉬었다.

“내가 나디아를 좋아하는 이유를 알았다. 나디아는 그녀를 닮았어.”

“이런.”

레이놀드는 어깨를 움츠렸다.

황제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나는 와토린구 공작을 꽤나 질투하고 있었던 것 같아.”

“폐하답지 않으시군요. 공작도, 공작부인도 이미 세상에 없습니다. 그런 감정 따위는 이제 그만 버리세요. 잘못하면 판단을 그르치게 됩니다.”

“뭐, 그것도 이제 끝이야.”

황제가 히죽 웃더니 몸을 굽혀 레이놀드의 눈을 보았다.

“그 아이, 공작을 닮았더구나.”

“···.”

레이놀드는 와토린구 공작을 만난 적이 없다.

상당한 미남이라든가, 엄청난 마력소유라든가, 인망 있는 영주라는 소문만 들었을 뿐이다. 듣기로는 능력 있고 좋은 남자인 것 같았다.

코레아 왕조의 공주는 아마 현명한 여성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서 가장 행복할 수 있는 남자를 선택했다.

공주가 혼인해서 죽을 때까지, 와토린구 공작은 그 동안 관계를 가지고 있던 애인을 모두 끊고 오직 그녀만을 사랑했다고 들었다.

공주가 황제와 혼인했다면 지금까지 살아 있었을지는 몰라도 불행하지 않았을까.

“레이, 너는 그 아이가 나디아를 닮았다고 말했지만 그건 그저 머리카락과 눈동자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거다. 실제로는 와토린구 공작을 닮았어.”

“설마···!”

황제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공작의 유아는 아직 찾지 못했나?”

“흔적도 없습니다.”

“카니아에서 마음을 바꾼 건 아니고? 건네준다고 하다 아까워서 숨긴 건지도 모르지.”

“그쪽도 알아보고는 있지만 흔적을 찾을 수 없더군요. 하지만 루디는 공작의 후계자가 아닐 겁니다.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도 그렇지만, 그 아이의 몸에는 문장도 없었어요.”

“글쎄···. 공작의 가계는 마녀와 연관이 있으니 뭔가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아이, 공작의 후계자가 아니라 해도 아마 사생아 정도는 될 거야. 핏줄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닮았다.”

촛불이 황제의 얼굴에 그늘을 만들었다.

황제는 두어 모금 술을 목에 흘려 놓고 나지막이 웃었다.

“나를 거절했던 공주는 죽었다. 와토린구는 더 이상 받을 수 없을 만큼의 모욕을 받고 목숨을 잃었지. 그리고 그 두 사람의 아들은 행방불명···. 유일하게 공작의 피를 이은 것으로 보이는 아이는 내 손에 들어왔어.”

“···.”

“언젠가는 공주의 아이도 내 손에 들어오겠지.”

황제의 술잔이 빈 것을 보고, 레이놀드는 몸을 일으켜 탁자에 놓인 술을 따랐다.

“레이, 그 아이의 마음을 이곳에 얽어매 둬. 나디아에게 정을 느낀다면 계속 그 처소에 두고, 만일 공주에게 애정을 갖고 있다면 그 아이를 줘라. 뭐든 좋으니 그 아이의 마음을 여기에 얽매어 절대로 빠져 나갈 수 없게 해.”

황제의 얼굴 가득한 수염이 히죽 웃는다.

“그 아이가 내게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어라. 와토린구의 소중한 것은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내 것이 되게···.”

“···.”

레이놀드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거친 행동, 거친 말.

때로 황제는 황족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야만적인 행동을 한다.

젊었을 때는 그를 따라 다니며, 지금의 황태자가 했다면 당장 폐태자가 되었을 정도의 일도 한 적이 있다.

그래도 레이놀드는 계속 이 남자를 동경해왔다.

황제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레이놀드는 이 세상에 단 한명, 황제의 유일한 아군이다.

반지의 비밀은 물론이요, 마음 속 깊이 묻어 있는 암흑의 일까지 공유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 사실에 은밀한 기쁨을 느끼면서, 레이놀드는 조용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제 그만 취침할 시간입니다, 폐하.”

“그래.”

약간 취한 황제를 침대에 뉘이고 이불을 덮는다.

황제는 약간 멍한 눈으로 천정을 가만히 보더니 중얼거렸다.

“가끔 아버지가 꿈에 보인다. 어쩌면 나도 죽을 날이 멀지 않았을지 몰라. 하루 빨리 공작의 유아를 찾아라.”

“알겠습니다.”

황제가 눈을 감는 걸 보고 레이놀드는 조용히 방을 나왔다.

루디, 그 아이가 정말 와토린구 공작의 핏줄이라면···.

‘서둘러 마녀의 흔적을 찾아야겠군.’

마녀가 뭔가 했다면 그것은 마녀만이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안타깝지만 제국은 오래 전부터 마녀와 관계가 나빴다. 협조할 수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있는지 확신할 수는 없다.

그래도 마녀와의 연결이 있는 누군가를 찾아야 할 것이다.

< 와토린구 공작을 닮은 아이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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