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41화 (41/201)

< 더러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

* * *

정신이 잠시 나갔던 모양이다. 깜박깜박, 오래 된 백열전구의 불빛이 나갔다 들어왔다 하는 것처럼 중간의 기억이 끊겨 있다.

어두운 복도를 지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낯선 천정이었다.

루디는 멍하니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어째서 자신이 여기에 있는지 잠시 동안은 알 수 없었다.

움직이지 않는 머리를 억지로 기울여 옆을 바라보려는 순간, 누군가의 머리가 불쑥 천정과의 사이에 들어왔다.

“!”

커다란 사람이다.

한 순간 곰인줄 알았다.

너무 놀라 자기도 모르게 딸꾹질이 나왔다. 움직일 수도 없을 만큼 힘든데 갑자기 딸꾹질이 나오니, 이런 상황에서도 조금 웃겼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의 남자가 가만히 그를 보더니 작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피를 많이 흘려서 크게 다친 것 같지만, 하나하나의 상처는 얕다. 괜찮아. 조금 쉬면 금방 나아질 거다.”

남자의 몸에서 약초 냄새가 났다.

어쩌면 의사일까.

아무렇게나 입은 듯 보이는 옷차림과 덥수룩한 머리를 보면 전혀 의사처럼 보이지 않지만, 남자의 손에는 붕대처럼 보이는 긴 천이 들려 있었다.

“나는 파블로다. 황궁 의국에서 일하고 있지.”

남자는 작은 루디의 몸을 솜씨 좋게 조금씩 올려서 약초를 붙이고 넓은 붕대를 칭칭 감았다.

지금 보니 얼굴에도 뭔가가 붙어 있는 것 같다.

얼굴은 가만히 둔 채 시선을 내리자 약간 도톰하게 올라온 천이 보였다.

코 속으로 진한 약초 향기가 들어왔다.

어쩌면 남자에게서 풍긴다고 생각했던 약초 향기는 자신의 몸에서 나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디를 내려다보고 남자가 씨익 웃었다.

“얼굴에도 약을 붙여 놓았다. 미남이 됐구나.”

파블로라는 남자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말했다.

“이 아이, 당분간은 움직이지 않게 하는 게 좋습니다. 상처가 얕다고는 해도 어리니까요. 무리하면 큰일 날 거요. 게다가 여기저기 많이 베였으니 꽤 아플 겁니다. 지금도 비명 지르지 않는 게 용하네요.”

“하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게 가능할련지, 원. 나도 모르겠소. 이 아이 있는 곳에는 워낙 사람이 없으니까요. 뭐, 어떻게든 되겠지만.”

투덜거리는 건 부라도프의 목소리다.

파블로가 약간 굳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놈의 황궁은 어떻게 된 건지, 이렇게 어린 아이에게 칼자국이 뭡니까.”

“그런 말 하면 큰일 납니다. 당신은 적이 많다는 걸 잊지 마세요. 정말, 말조심해요.”

“···.”

“아직도 다른 의사들에게 괴롭힘을 받고 있습니까?”

“항상 똑같아요. 지난번에는 황제폐하의 말을 진찰했소. 사람을 돌보기보다는 말이 더 내게 어울린다더군.”

“···.”

이번에는 부라도프가 입을 다물었다.

파블로는 길게 한숨을 쉬더니 머리를 흔들었다. 덥수룩한 머리에서 비듬이 날아와 떨어질 것 같다. 조금 더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디아그라 비마마는 어떻습니까.”

“글쎄, 저 아이 덕분에 조금 나아졌는데, 또 모르지요. 오늘 험한 일을 겪었으니.”

“···이 아이, 나디아 마마 처소에 있는 아이였습니까?”

“그래요.”

파블로가 다시 머리를 들이밀어 루디의 얼굴을 보았다.

곰 같은 얼굴이 자꾸만 코앞에 다가오니, 매번 놀라게 된다. 안 그래도 아파 죽겠는데 놀랄 때마다 피부가 당겼다. 그만해줬으면 좋겠다.

“비마마는 여전히 약을 쓰고 있니?”

파불로의 질문에 루디가 작게 네, 라고 대답하자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 약은 위험하다고 말했는데···.”

파블로가 비마마의 약을 처방한 의사인 것 같다. 그리고 아마 매일 밤 먹는 그것은 그다지 좋은 약이 아니다. 어쩌면 중독성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물어봐야지 생각했지만, 조금 졸리기 시작했다.

아, 그렇지. 나디아 마마는···.

혀 꼬부라진 듯한 자신의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생각만 한 줄 알았는데 입 밖으로 말이 나왔던 모양이다.

“나디아 마마는 처소로 돌아가셨다.”

부라도프가 대답한 걸 보면 그런 것 같다.

계속 눈을 뜨고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어쩌면 잠깐 동안은 자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있다.

정말 잤는지 아닌지는 몰라.

십여 분쯤 흐른 건지, 아니면 그저 몇 초 동안이었는지도 잘 모른다.

‘이런 게 비몽사몽이라는 건가.’

피부의 아픔도 이제는 조금 무디다.

남자가 붙여준 약초가 조금씩 효과를 보이고 있는 것 같다.

파블로가 루디의 눈꺼풀을 뒤집어보더니 말했다.

”졸리면 자도 된다. 깨어 있으려고 할 필요는 없어. 물이 들어가지 못하게 조심하고 붕대는 이틀 정도는 풀지 마. 시간이 되면 며칠 뒤에 다시 오너라. 아, 그리고 비마마 처소에 있는 유모에게 말이다, 약은 가급적 안 쓰는 게 좋다고 좀 전해줬으면 좋겠구나. 아주 급할 때만 써야 해.”

파블로가 옆으로 이동하고 찰박찰박 물소리가 울렸다.

억지로 눈을 뜨고 쳐다보자, 파블로가 금속 대야에서 손 씻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너머로 두 남자가 멀찍이서 파블로를 쳐다본다. 파블로가 손 씻는 모습을 손가락질하며 비웃고 있는 듯하다.

‘왜 손 씻는 걸 보고 웃지?’

문득 두 남자 너머 천정 구석 쪽에서 파지직거리는 작은 불꽃이 보였다.

‘불새구나···. 괜찮아, 이제 괜찮아···.’

루디의 말이 닿았는지, 파직거리는 불빛이 작게 한 번 튀었다가 다시 조금 떨어진 곳에서 튀었다.

모습을 숨긴 채 날아다니는 모양이다.

그것이 마치 기뻐서 퐁퐁 뛰어다니는 것처럼 보여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고마워.’

느린 머리로 불새의 동그란 눈을 생각하다 잠이 들었다.

깨어났을 때 그는 부라도프가 모는 작은 마차에 실려 있었다.

보통은 마부가 따로 있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부라도프가 말고삐를 잡고 있다. 그게 약간 생소해 보였다.

몸이 흔들려서 조금 아프다. 하지만 자기 전보다는 많이 덜해졌다.

‘그 곰 같은 의사의 약은 정말 잘 듣는구나.’

중세 시대라 의료 쪽은 형편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다.

어느새 하늘의 어둠이 조금 옅어졌다.

공주님은 울지 않고 잘 있을까.

‘유모가 보지 않는 곳에서 이상한 걸 주워 먹고 있는 건 아닌지···.’

요즘 들어 벌레랑 싸우려 들어서 정말 걱정이다.

한겨울이 되면서 풀벌레는 거의 없어졌지만 대신 집안에 벌레들이 생겼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바퀴벌레랑 비슷하게 생긴 커다란 검은 벌레다.

바퀴인 것 같아 보이지만, 바퀴라고 인정할 수는 없다. 절대로 지구의 바퀴가 여기에도 있다고는 인정 못해.

‘···문제는 그게 아니라, 벌레랑 싸워서 이기면 먹으려 하는 거지···.’

벌레랑 씨름할 때의 공주님은 어쩌면 바이킹이나 야만 전사가 된 느낌인지도 모른다.

느리게 그런 생각을 하다 조금 웃었다.

리리샤 공주가 벌벌 기어 다니기 시작한 뒤로 계속 비슷한 걱정을 하고 있는 것 같다.

“···.”

겨우 몇 시간 안 본 것 같은데 굉장히 보고 싶어졌다.

아무 데도 정 붙일 곳 없는 이곳에서 리리샤 공주가 있는 저택만이 따뜻한 공기가 흐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연한 보라색의 하늘에서 파직거리는 불빛이 보였다.

불새가 마치 공주 뿐 아니라 자신도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작은 스파크를 일으켰다.

실내에 있을 때보다 알아차리기 어렵지만, 루디의 눈에는 왠지 더 잘 보이는 것 같다.

“깨어났구나.”

부라도프가 마차를 몰면서 고개를 뒤로 돌렸다. 다시 앞을 보면서 부라도프가 말했다.

“며칠 뒤에 다시 오마. 그 옆에 있는 약초가 오늘 네 상처에 붙여 놓은 것이다. 필요하면 붙이거라. 며칠 뒤에는 못 올지도 모른다 말하니 파블로가 주더구나.”

부라도프가 약간 웃었다.

“네가 앞으로 전투 노예 교육을 받을 거라고 말하자 굉장히 화를 냈다. 하지만 폐하의 명령이야. 그 상처가 다 낫기 전에 아마 교육이 시작될 게다.”

부라도프의 말이 끝날 무렵 나디아그라 마마의 저택에 도착했다.

저택의 담 너머로 염소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제 일어나야지 싶어 몸을 일으키자, 부라도프가 혀를 차더니 번쩍 그를 안았다.

“가만있어라. 괜히 움직여서 상처가 벌어지면 곤란하지 않니.”

약초가 든 가방에 황제가 준 칼이 들어 있는 것 같다. 약간 묵직한 주머니가 루디의 배 위에 놓였다.

항상 거리를 약간 두는 듯한 느낌의 부라도프가 오늘 따라 유난히 자상하게 군다.

다친 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려나.

그게 묘하게 낯간지러워 루디는 고개를 살짝 내렸다.

부라도프는 그를 안고 성큼 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괜찬나여?”

“응? 아, 들어가는 거 말이냐. 오늘은 시종장께서 안에 계시니 괜찮다. 제대로 호위도 동반하고 계실 테니까.”

그런가. 나디아 마마를 데리고 온 뒤에 그냥 가버린 건 아니구나.

왠지 조금 마음이 안심이 된다.

유모와 나디아 마마만 있다고 생각하면 약간 마음이 불안했었다.

건물로 가까이 가면서 희미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하다. 여기에 저렇게 울 사람이 없는데 대체 누가 울고 있는 걸까. 게다가 목소리가···.

“···어!”

루디가 당황해서 눈을 깜박이는데 저택의 문이 열렸다.

시종장과 함께 온 듯한 호위였다.

문이 열리자마자 악을 쓰며 우는 소리가 확 커졌다.

공주의 목소리다.

거의 목이 쉰 것 같은데 여전히 악을 쓰며 운다. 쇳소리와 바람 소리가 섞여서 듣기가 괴로울 정도다.

‘설마, 내가 나간 뒤부터 계속 울고 있었나.’

루디가 내려달라고 말하려고 입을 연 순간이었다.

갑자기 공주의 작은 몸이 벌벌 기어오더니 부라도프의 다리에 머리를 박았다.

“공주님!”

루디가 깜짝 놀라 말하자, 리리샤 공주가 부라도프의 다리를 붙잡고 벌떡 일어서더니 손을 위로 뻗었다.

“······우에에에에에엥···루···루···.”

유모가 달려와 공주를 떼어내려고 했지만 부라도프의 다리를 꽉 잡고 안 놓는 모양이다.

“공주님! 그러면 안 됩니다!”

유모와 악을 쓰며 우는 공주의 목소리에 귀가 멍멍해졌다.

“부라도프님, 저 쩜 내려주세여.”

루디가 말하자, 몸을 어린 공주한테 잡아 뜯기듯 하고 있는 부라도프가 한숨을 쉬며 허리를 구부렸다.

루디가 내려서자 아무것도 모르는 공주가 와락 달려들었다.

붕대로 칭칭 감겨 있는데 용케 알아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주님, 아파요.”

진짜로 아프다. 살이 다시 벌어졌는지 붕대에 피가 배어나왔다.

하지만 루디는 찢어진 살을 파고드는 공주의 손가락을 떼어내지 않고 그대로 안았다.

“우에에에에에엥···에엥···.”

어쩌면 이리도 잘 울까. 그야말로 온 몸으로 악을 쓰며 운다.

“외로웠나요, 공주님?”

“우에에엥···루···루···우에···.”

“괜찮아요. 이렇게 돌아왔잖아요. 우와, 이 콧물 좀 봐.”

루디가 웃자, 리리샤 공주가 얼굴을 루디의 몸에 부볐다.

콧물이 붕대에 묻어 공주와의 사이에 끈적한 실을 만들어냈다.

“공주님···.”

코가 시큰해졌다.

오늘 한 번도 울지 않은 것 같은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진다.

오늘 검투장에서 느낀 건 더러움이었다.

이 세상만 더러운 게 아니다.

진흙에 닿으면 몸에 그것이 묻는 것처럼, 루디는 자신이 뭔가에 오염되었다는 사실을 안다.

광란의 검투장, 그 안에서 오늘 루디의 뭔가가 변했다.

그것이 뭔지 정확하게는 자신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까지 지니고 있던 뭔가가 깨졌다는 사실만은 알 수 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르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의 자신은 그 달라진 모습으로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

더러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한 것이든, 그저 장난으로 타인을 죽였든, 사람이 죽은 사실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한 번 몸에 닿은 더러움은 영원히 남는다. 절대로 없어지지 않아.

그래도 괜찮아, 살아라.

공주를 보고 있으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없으면 이 아이는···.’

아무도 없는 이 세계에 단 하나 그를 필요로 하고 원하는 존재.

나디아 마마가 자신의 아들을 루디에게 투영하는 것과는 다르다.

리리샤 공주가 보는 건 그저 루디 한 사람의 존재뿐이다.

살인자든, 괴물이든, 리리샤 공주에게는 상관없어.

그저 루디가 루디이기 때문에 원한다.

어른들이 가만히 지켜보는 가운데, 루디와 리리샤 공주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 더러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