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아이는 누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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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락사락, 종이 넘기는 소리가 시종장의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디코콰리아와 카니아 왕국의 전쟁은 이제 거의 마무리 된 것 같다.
아직 전후 처리가 다소 남았지만, 디코콰리아 왕족의 왕위 계승자는 어느 수준까지는 모두 잡아 들였고, 왕과 왕비, 왕태자는 사형되었다.
왕족을 임신한 여자도 대부분 파악한 모양이다. 그 여자 중 일부는 노예로 제국에 오게 되었다.
카니아 왕국에서 보내기로 약속한 노예의 수를 채우려면 아직 한참 남았다. 앞으로도 노예의 이송은 계속된다.
종이를 넘기던 레이놀드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가장 신경을 썼어야 할 와토린구 공작가의 어린 후계자가 여전히 행방불명이다.
와토린구 공작가는 다코콰리아 이전 왕조의 피를 잇고 있었다. 그냥 놔두면 훗날 무슨 일의 불씨가 될 지 모른다.
‘게다가.’
레이놀드는 한숨을 쉬었다.
아는 사람만 아는 일이기는 해도, 디코콰리아 이전 왕조는 코레아 왕조와 연관이 깊은 혈통이다.
와토린구 공작가는 그중에서도 가장 전 왕조의 피가 짙은 가문이었다.
거기에 더해 죽은 와토린구 공작의 아내는 코레아 왕조.
공작 부부의 자식은 태어날 때부터 부모의 강한 마력과 코레아 왕조의 특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하아.”
시종장이 된 뒤 두통이 끊이지 않는다.
레이놀드는 손으로 이마를 누르며 얼굴을 찌푸렸다.
‘전혀···그 황태자는···.’
이번 전쟁의 책임자는 황태자다.
황태자가 직접 전장에 서지는 않지만, 총책임자로 그쪽에 가 있었다.
황태자는 아직 제대로 된 전쟁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이번 전쟁은 큰 위험 없이 황태자에게 전장을 경험해보게 할 좋은 기회였다. 그래서 보낸 것인데 일처리를 보면 한심할 뿐이다.
‘그만큼 폐하께서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하셨건만.’
전쟁의 목적이야 여럿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주안점을 두었던 일 중 하나가 바로 와토린구 공작의 유아를 확보하는 일이다.
카니아 왕국과도 이미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와토린구 공작가 내부에 내통자도 있다. 급습은 제대로 성공했다고 보고서에 적혀 있었다.
그저 안전하게 포위해서 유아를 확보하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는데, 그걸 망쳐버린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 황제의 분노가 두려워, 황태자는 아직까지 제국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아주 무능한 것은 아닌데, 황태자는 결코 비범하거나 특별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단적으로 말하면 평범하다.
차라리 성격이 포악하거나 제멋대로라면 나을 것이다.
그러면 거기에서 생기는 추진력이라도 있지.
하지만 황태자는 성격조차도 보통이어서 평범하게 선하고 평범하게 악하다.
일국의 왕이라면 그것으로도 그럭저럭 잘 해 나갈 수 있겠지만, 제국의 황제로는 아무래도 약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부친도, 모친도,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닌데 어쩌다 저렇게 평범한 아들이 태어났을까.’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로든, 황제와 황후는 보통에서 벗어나 있다. 단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평범한 것보다는 낫다.
레이놀드는 한쪽에 서 있는 부라도프에게 시선을 보냈다.
“황제께서는 이미 보고서를 확인하셨나?”
“똑같은 내용의 보고서가 조금 아까 들어갔습니다.”
“별 말씀은 없으시다던가?”
“와토린구 공작가의 유아를 왜 아직도 못 찾았느냐고 물어보셨다 합니다.”
“역시···.”
황제도 화가 난 것 같다.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 황태자에 대한 불만을 토하는 것은 좋지 않다 생각하고 질문으로 바꾼 거겠지.
레이놀드는 책상 한편에 놓여 있던 다른 보고서를 들었다.
황제의 노예로 들어온 루디의 행적을 조사한 것이다. 정기 보고서와 함께 디코콰리아에서 보내왔다.
단 두 장.
보고서는 방금 전과 달리 간단한 것이었다.
각방으로 조사했지만 이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다만 와토린구 공작가의 성 안에는 하인의 어린 자식이 여러 명 살고 있었다고 적혀 있었다.
다음 장에는 루디와 와토린구 공작의 유아가 같은 사람일 가능성을 알아본 일이 적혀 있었다.
노예상에서는 공작가의 핏줄, 그것도 매우 상당한 신분의 아이라고 추정했지만 확실한 증거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약간의 심증을 바탕으로 판단한 것이다.
제국과 카니아 왕국과의 밀약을 모르는 노예상은, 귀족의 자식이라는 걸 알고 거래했다는 증거를 남기고 싶어하지 않았다.
하지만 루디의 외모는 너무 뛰어나다. 와토린구 공작도 아름답다고 소문이 나있었다. 그 가문 사람들은 원래 뛰어난 외모로 유명했다.
나이도 사라진 공작의 유아와 같다.
행동이나 지식도 여느 하인의 자식은 아니었다.
그것은 부라도프의 보고를 듣고 더욱 확실해졌다.
와토린구 공작가는 아주 먼 옛날부터 마녀들과 은밀한 연계가 있다는 말이 돌았다.
어쩌면 와토린구 공작은 제국에서도 종적을 알 수 없는 마녀들과 손이 닿아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외모를 바꾸는, 보통으로는 상상도 못할 이상한 주술을 썼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 1,2년 내에 마녀와 왕래가 있었다는 증거는 찾지 못했다고, 보고서에는 적혀 있었다.
몇 명 공작가 사람을 고문했지만 전혀 그런 기미는 없다고 한다.
‘그럼 그 아이는 공작가 사람이 아닌가?’
너무 지나치게 생각했던 걸까.
레이놀드가 손가락으로 이마를 문지르자, 부라도프가 걱정스러운 듯이 말을 걸었다.
“시종장님! 조금 쉬는 게 어떠신지요? 요즘 너무 과로하셨습니다.”
“글쎄, 나도 이제 나이가 있으니 아무래도 몸이 예전과 같지 않군. 하지만 괜찮네.”
이제 황제에게 가봐야 한다. 보고서가 들어왔으니 황제가 그를 필요로 할 것이다.
시종장의 임무는 황궁 안의 살림이지만, 황제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다시피 한 레이놀드는 참모 역할도 맡고 있었다.
그는 황제에게 가장 친밀한 시종인 동시에 유일한 친구다.
같은 배에서 태어난 형제도 믿지 않는 황제가 마음 속 깊이 믿는 유일한 아군이기도 했다.
레이놀드가 옷차림을 살피고 황제에게 갈 준비를 하자, 부라도프가 물었다.
“한데 나디아그라 마마의 치장은 어찌할까요? 그 상태로는 제대로 된 드레스 하나 마련하기 어려울 겁니다.”
“글쎄.”
머리가 아프다. 날카로운 것으로 쿡쿡 옆머리를 찌르는 것 같았다.
“이쪽에서 준비를 해두는 것이···.”
“아니, 그만두게. 우리는 이미 그녀에게 너무 관여했어. 더 손을 대면 황후께서 지나치게 노하실 거다.”
“하지만 너무 초라한 몰골로 나타나면 그것도 불경으로 죄를 받을 수 있습니다.”
“···.”
아마 황후는 그걸 노리고 있는 걸 거다.
황제가 말리지 않고 지켜보는 건 나쁜 버릇이 도진 거겠지.
황제 폐하는 아름다운 것에 자주 마음을 빼앗긴다.
하지만 그것이 꼭 상대에게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자신의 마음에 든 것을 애지중지하다 갑자기 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차갑게 버려진 사람이 망가져 괴로워하는 걸 가만히 지켜본다.
그 일련의 과정을 즐거워하는 건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레이놀드는 그 부분을 물어보거나 들춘 적이 없고, 황제도 굳이 말하지 않았다.
황제는 상대가 바닥 끝까지 침몰하면 다시 주워 사랑한다.
그걸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망가져 버려, 그 사람의 존재는 완전히 황제의 마음에서 멀어져 버리는 거다.
황후도, 수많은 비빈들도, 심지어 자식들까지, 황제의 그런 버릇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황제는 가학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황제가 나디아그라를 구석으로 몰기로 했다면 아무도 말릴 수 없다.
레이놀드는 한숨을 쉬고 부라도프를 보았다.
“나디아그라 마마에게 지급되는 금액을 누군가가 착복하고 있을 테니, 그걸 제대로 전달해주게. 그걸로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으면 다행이겠지. 만일 못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황제는 아직 나디아그라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여러 첩비 중에서도 그녀는 특별히 황제의 마음에 들었던 여성이다. 그녀의 순수하고 맹목적인 사랑은 외모와 함께 황제의 심금을 울렸다.
무엇보다 아직 그녀의 절망은 겨우 한 두 번에 그쳐있다. 앞으로도 그녀의 앞에는 수많은 절망과 희망이 반복해서 방문해갈 것이다.
그래, 황제는 분명 그녀를 죽이지 않는다.
레이놀드에게 바람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상처가 얕게 지나갔으면 하는 것이다.
황제나 황후가 뿌리는 작은 독에도, 그녀는 깊이 손상돼 회복되지 못한다.
그리고 분명 황제는 그걸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자신이 손을 내밀기만 하면 그녀가 다시 예전의 나디아그라로 되돌아올 거라고 믿는 구석이 있었다.
영원히 망가지면 황제는 그 분노를 황후에게 돌린다.
마찬가지로 황후 역시 그걸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정말 손이 많이 가는 사람들이야.’
레이놀드는 방을 나가면서 부라도프에게 당부했다.
“만일 나디아그라 마마의 처소에서 무슨 요청이 들어오면 최우선으로 그걸 처리하게. 그 늙은 유모나 비마마가 뭘 할 수 있나 싶긴 하지만, 상인을 부르겠다고 하면 어떤 사람이라도 상관 말고 들여보내.”
“알겠습니다.”
레이놀드는 여전히 쑤시는 듯 아픈 머리를 손으로 누르며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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뀌에에에에엑!
거위 울음소리가 요란하다.
“후에에엥···후에에엥···.”
더불어 아기 울음소리도.
거위가 먼저 살고 있는 새장에 닭이 들어갔을 때, 처음에는 서로 경계하는 듯 했다.
하지만 이내 무슨 협정 같은 거라도 맺었는지, 영역 다툼 같은 것도 없이 잘 지내게 되었다.
문제는 거기에 공주가 끼면서 생겼다.
동물을 처음 본 리리샤 공주는 거위와 닭이 좋다. 새장 옆의, 반 쯤 부서진 나무통에서 살고 있는 토끼도 좋다.
하지만 토끼도, 닭도, 거위도, 모두 공주를 싫어했다.
무작정 가서 목을 잡아 채 안으려고 하니 좋을 리가 없다.
그냥 싫다고 도망가면 상관없는데, 거위는 몸집이 작은 공주가 만만했던 건지 항상 포악한 모습으로 덤볐다.
날개를 펴고 위협하는 것 뿐 아니라, 부리로 물려고 한다.
루디는 염소에게 물을 주다 말고 한숨을 쉬었다.
리리샤는 루디의 뒤를 졸졸 쫓아다닌다. 그가 밖으로 가면 밖으로, 안에 있으면 안에서 뒤뚱뒤뚱 루디의 꽁무니를 쫓아 걷다가 넘어지곤 했다.
그리고 루디 근처를 사방팔방 돌며 문제를 일으켰다.
할 일은 태산인데, 돌쟁이 아기한테는 가만 있으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불새, 거위를 좀 조용히 시켜줄래?”
루디가 작은 소리로 말하자, 허공에서 공기가 살짝 흔들렸다.
그리고 이내 붉은 빛이 거위에게 쏟아진다.
거위가 깜짝 놀라 날개를 양쪽으로 펴더니 몸을 뒤뚱뒤뚱 흔들며 달아났다.
혼자 남겨진 공주가 히이잉, 운다.
“···쌔···쌔···.”
밤마다 책을 읽어주면서 날개가 있는 건 새라고 가르쳤더니, 오늘은 거위를 보고 처음으로 그것이 새의 종류라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루디는 리리샤 공주의 머리를 쓰다듬고 말했다.
“그건 거위에요.”
“···쌔···.”
“거위.”
“···꺼이···.”
“잘 했어요.”
오늘 리리샤 공주는 유모에게 부탁해서 만든 간편 원피스에 호박처럼 생긴 속바지를 입고 있다.
“···마···마알···.”
리리샤가 이번에는 염소한테 관심을 가졌다. 신화에서 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그림으로 그려주었는데, 염소를 보자 말이라고 떠들기 시작했다.
그림이 나빴던 건지, 아니면 다리 네 개 있는 염소가 나쁜 건지···.
‘다리 네 개 있는 놈이 나쁜 거겠지.’
루디는 마도구에서 물을 마저 내 염소의 물통에 채운 뒤, 리리샤 공주의 손을 잡았다.
천천히 공주의 걸음에 맞춰 걷는다.
리리샤 공주는 앞으로 걸으면서도 고개를 뒤로 돌려 염소를 보고 말이라고 소리쳤다.
“···마!”
“말은 저것보다 훨씬 커요. 색도 다르고. 저건 염소예요.”
“···.여서···.”
염소가 왜 여서인지···. 그래도 대강 뜻은 통하니 일단은 되었다.
루디는 계속해서 리리샤 공주가 관심 갖는 물건마다 정확한 명칭을 가르쳐 주었다.
염소, 토끼, 돌, 바닥, 물, 수레···.
한 번 말이 터지기 시작한 리리샤 공주는 끊임없이 이것저것에 엉뚱한 이름을 붙인다. 그걸 교정하는 건 루디의 가장 중요한 일이 되어 있었다.
“자, 여기에 서 봐요.”
루디는 저택의 입구에 도착하자 리리샤 공주를 세우고 다른 손에 쥐고 있던 잉크병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잉크를 흘리지 않도록 반 이상을 덜어냈는데도 몸이 흔들릴 때마다 병 뚜껑까지 잉크가 올라온 모양이다.
마잉크가 흐르지 않도록 천을 얇게 잘라 병과 뚜껑을 합해서 돌돌 말아 놓았는데, 잉크가 약간 새서 천에 묻어 있었다.
“공주님은 불새랑 여기에서 좀 놀고 계세요.”
루디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불새가 포로로 공기를 진동시키며 공주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몸이 어느새 화려한 불꽃처럼 빛을 밝히고 있었다.
마음으로 명령을 내리는 건 여전히 시간이 걸리지만, 어느새 불새는 루디가 말을 꺼내면 그걸 정확하게 이행하게 되었다.
지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상당히 똑똑하다. 적어도 지금의 공주보다는 훨씬.
불새가 자신에게 오자, 공주는 이내 거기에 신경을 빼앗겼다.
리리샤 공주가 얌전하게 불새와 노는 것을 보고, 루디는 미리 준비한 나뭇가지 끝에 마잉크를 묻혔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넓은 공간에 마법주문을 적을 때에는 반드시 원이나 선으로 그 주문을 감싸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른 주문과 섞여 버리는 경우가 있었다.
마도구나 책, 한 장의 종이처럼 다른 것과 분리 되어 있는 물건에 한 개의 주문을 넣을 때는 상관없다.
하지만 하나의 공간에 각기 다른 주문을 쓸 때는 반드시 선을 그어 주문을 구별해야 했다.
오늘은 처음으로 실제 공간에 주문을 적는다.
약간 긴장한 상태에서, 루디는 마잉크를 적신 나뭇가지로 바닥에 주문을 적어 넣기 시작했다.
< 그 아이는 누구? > 끝
작가의 말
죄송합니다. 연재 시간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목표는 매일 24시-01시 사이 예요.
아직까지는 그저 노력하고 있는 중입니다.
조금 더 보기 편하실까 하고 줄 간격을 하나 씩 띄워봤는데 어떠실까 모르겠어요.
오늘도 많이 늦어서...죄송합니다.
좋은 새벽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