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24화 (24/201)

< 거짓말 >

* * *

“···저···유모님···그거 미안해여···내가 물 마도구를 쓰다가 조금 흘렀어요.”

“어?”

유모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유모는 흥건한 바닥을 한 번 내려다 보더니 다시 루디의 얼굴을 보았다.

“마도구를 아침에 가져온 게 아니었니?”

“아무도 가져오지 않았어요. 그거 내가 한 건데···.”

“···.”

유모가 더욱 이상한 표정을 짓는다.

그녀는 약간 곤란한 듯 한숨을 쉬더니 타이르는 것처럼 말했다.

“얘야,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 네 나이 또래는 마력 소유가 부럽겠지. 그건 당연한 거야. 하지만 그런 말을 잘못하면 큰일 난단다.”

유모는 손짓해서 루디를 부르더니 손을 잡았다.

“마력소유는 나라에서 굉장히 우대해주지. 진짜 마력 소유자가 귀족이나 왕족 눈에 띄면 그 가문 사람이 되는 일도 왕왕 있어요. 그만큼 중요한 사람들이란다.”

툭툭 루디의 손을 치면서 유모가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하지만 그래서 거짓말을 하다 들키면 그만큼 큰 벌을 받는단다. 마력 소유라는 말은 함부로 해서는 안 돼. 알겠니?”

“···.”

“물을 이렇게 낭비하면 조금 곤란하기는 하다만, 처음에는 실수 하는 법이지. 괜찮아. 그런 걸로 때리거나 하지는 않아요. 그러니까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단다.”

“···.”

루디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유모가 빙긋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끙, 소리를 내며 일어난다.

“물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확인해봐야겠다. 황궁 하인들이 갖다 주기는 하지만 자주 오지는 않으니까, 다음부터는 좀 아껴 쓰자.”

“···.”

루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유모의 뒤를 따라나갔다.

굳이 여기에서 왈가왈부하지 않아도, 사용하는 걸 보면 금방 알게 된다.

하지만, 생각보다 훨씬 마력 소유자가 적은 모양이다. 설마 평민이 마력 하나 있다고 왕족에 들어갈 수 있다고는 생각도 못했다.

마력을 들키면 생각보다 훨씬 골치 아플 것 같다.

유모는 음식 창고 뒤편에 나 있는 작은 문으로 향했다.

문이 있는 건 어젯밤에 보았기 때문에 알고 있었지만, 나가본 적은 없다.

상황에 맞지 않지만, 루디의 가슴이 약간 들썩거렸다.

어쩌면 건물 뒤편에서는 뭔가 기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전생의 한국에서는 공간이 조금만 있어도 텃밭을 가꾸는 사람이 많았다.

이곳에서는 먹을 것도 부족하니 야채 정도는 있지 않을까.

야채가 아니라도 좋다.

로즈마리나 타임 같은 허브도 괜찮아.

그런 게 있으면 차를 만들어 먹을 수도 있고, 요리에 향신료로 넣어도 된다. 잘은 모르지만 약용으로도 쓸 수 있으니, 어쩌면 야채보다도 좋을지 모른다.

중세에서는 애완용으로 뭘 기르는지는 모르지만, 토끼나 관상용 새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른다.

토끼는 새끼를 잘 낳아 수가 금방 불어난다고 하니 고기 얻기가 수월할 거고, 새는 알을 얻을 수 있다. 잘하면 계란 프라이, 못해도 메추리알을 먹을 수 있는 거다.

루디가 직접 토끼를 먹어본 적은 없지만, 여행 갔다 먹어본 친구 얘기로는 닭고기 같다고 한다.

‘닭고기라.’

생각만 해도 침이 주르륵 흘렀다.

하지만 쪽문이 열리자, 루디의 희망은 급속도로 쪼그라들었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이 오가느라 생긴 걸로 보이는 좁은 길 외에는 잡풀만 무성했다.

닭고기 닮은 토끼고기, 삶은 새알, 허브와 함께 구운 새구이, 향긋한 허브차···.

조금 전까지 루디의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살아있던 것들이 모두 물에 젖은 소금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인생, 정말 바라는 대로는 되지 않는구나.’

실망한 루디의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문 바로 옆에는 커다란 나무통이 두 개 놓여 있었다.

뚜껑은 무거워 보이는 원형의 나무판이다.

여느 뚜껑과 달리, 물통과 아물리는 부분이 없었다. 그냥 통 위에 둥근 판을 올려 놓는 형태다. 뚜껑 윗부분에 나무 조각이 길게 덧대어 있어서 손잡이를 대신하고 있었다.

유모는 두꺼운 뚜껑을 옆으로 밀어 통 안을 확인하더니 깜짝 놀랐다.

“물이 안 줄었잖아. 마도구가 안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고.”

“마도구는 다 쓴 다음에 원래 있던 곳에 두어써여.”

길게 말하면 역시 발음이 샌다.

루디가 혀 짧은 소리로 대답하자, 유모가 당황한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얘야, 그렇게 물이 많이 흘렀는데···. 이상하잖니. 물통에는 물이 그대로고, 마도구에서는 그렇게 물이 많이 나올 리 없고.”

루디는 입을 다물었다.

‘아, 이것도 실수였구나.’

전등이나 난로처럼, 물 마도구도 보통은 루디가 낸 것보다 훨씬 적게 물이 나오는 모양이다.

‘그래서 마도구를 아침에 가져온 게 아니냐고 물었던 거구나.’

어제 밤부터 사용하지 않았다면 저 정도도 나오지 않는 걸까.

‘대체 얼마나 성능 안 좋은 거야?’

저 정도로 성능이 떨어진다면 마도구를 사용할 게 아니라 수로를 건설하는 게 더 낫지 않나.

루디는 쭈뼛거리며 유모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마도구는 어젯밤에 내가 그 통에 넣었는데, 조금 전에 물 쓰려구 하다가 빼써여. 그리구나서 물 꺼내다 흘려서···.”

어린 아이가 무거운 뚜껑을 밀고 마도구를 넣었다는 것도 말이 안 되지만, 거기서 마도구를 꺼내 되돌려 놓는 건 더 말이 안 된다.

그래도 아마 평범한 마도구가 갑자기 특별하게 됐다는 것보다는 받아들이기 쉬울 거다.

유모는 입을 딱 벌리고 루디를 보다가 중얼거렸다.

“맙소사! 너, 정말로 마력 소유였구나. 등불도, 난방도 네가 한 거니?”

“···네.”

“하지만···.”

유모는 귀신 보는 것처럼 루디를 보더니 머리를 크게 저었다.

“말도 안 돼. 한꺼번에 몇 개씩이나 마력을 넣는 사람이 있다니, 내가 마도구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들어본 적도 없다. 더구나 이렇게 작은 아이가···.”

‘아, 이런.’

갈수록 태산이다.

이곳 사람들은 마도구 하나에 마력 붓는 것도 굉장히 힘든 모양이다.

지뢰가 너무 많아서 어디로 가야 할 지 모르겠네.

마음이 답답해져서 안구에 습기까지 차올랐다.

기억하는 한 울었던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어린 몸이라 그런지 눈이 마음대로 눈물을 뽑아낸다.

유모가 깜짝 놀라더니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에구구, 하며 앓는 소리를 내면서 유모가 말했다.

“괜찮다, 얘야. 너를 탓한 게 아니란다.”

“···.”

“하지만 어째서 너 같은 마력 소유가 이런 곳에 온 거니? 그 정도로 재능이 있으면 당연히···.”

갑자기 유모가 입을 다물었다.

뚫어지게 루디를 보더니 중얼거렸다.

“황금 머리, 초록 눈동자···. 엔리코님이랑 닮았지만, 결국에는 비마마와 닮은 거지. 그래, 그런 거야.”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이 되더니, 유모가 사방을 둘러보았다. 루디의 귀에 입술을 대고 작은 소리로 물었다.

“시종장님은 네가 마력 소유라는 걸 알고 계시니?”

“아니요.”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자, 더욱 목소리를 낮췄다.

“괜찮다. 나한테는 사실대로 말해도 돼. 시종장님이 거짓말 하라고 하디?”

“아니요.”

“똑똑한 아이구나. 그래, 그렇게 해야지. 아무에게나 말해서는 안 되지. 한데 네가 이곳에 올 때 시종장님 외에 누구를 만났니?”

“부라도프 님 밖에···.”

루디의 대답에, 유모가 기쁨을 참지 못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녀가 뭘 착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유모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숨죽여 말한다.

“그래, 얘야. 한 가지만 더 묻자. 비마마가 너를 엔리코 황자님으로 착각하면 어떻게 하라고 하시디?”

“그냥 그런 척 하라고.”

“그렇지!”

유모가 벌떡 일어나다가 다시 허리를 잡으며 몸을 굽혔다.

아, 이제 그녀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알 것 같다.

유모는 시종장이 루디를 비마마의 아들로 삼으려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뛰어난 마력 소유자는 귀족이나 왕족에도 영입한다고 하니, 그 방법의 하나로 공주의 아들이 되는 거라고 추측한 게 아닐까?

노예 상태로 마력만 착취하는 게 더 나을 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하면 가문의 피와는 상관없는, 단순한 노예로 끝나고 만다.

황족이나 귀족 안으로 그 피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자식을 낳았을 때 가문의 일원이 되는 게 중요할 것이다.

그래야 다음, 다다음 대에 가문 안에서 마력 소유자가 태어날 테니까.

‘뭐, 착각하고 있다면 그대로 놔둘까.’

시종장이 거짓말을 시키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쓸데없이 다른 곳에 가서 떠들지도 않을 거다.

이렇게까지 홀대 당하는 처지에 말할 사람도 없는 것 같고, 잘됐다.

루디는 고개를 약간 내렸다.

전생에서 초등학교 다닐 무렵에는 어머니가 조금 극성이었다.

태권도, 웅변 학원부터 시작해서 다른 아이들이 다니는 건 웬만하면 다 했던 것 같다.

그 중에는 연기 학원도 있었다.

아역배우들이 다니는 요란한 학원은 아니고, 이름 없는 사류 연극 배우가 허름한 건물에서 동네 아이들 모아 놓고 간단한 연극을 공연하는 곳이었다.

제대로 허가나 받고 하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비체계적이었다고 기억한다.

일주일에 두 번 가고, 몇 달에 한 번은 작은 연극을 공연했다.

그다지 재능은 없어서 항상 나무나 별, 토끼 역할이었지만, 그것도 몇 년 하다 보면 나름대로 몸에 붙는다.

원장인 사류 연극 배우는 실력이 없는 대신 열의로 그걸 메꾸는 유형이라, 나무 역할을 하는 루디에게도 매우 관심을 갖고 연기 지도를 했다.

그가 항상 하는 말이 “나무의 심정을 느껴 봐”였다.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그 시절의 경험이 이세계에서 도움이 될 거라고는, 정말로 꿈도 못 꿨다.

아이의 심정이 되어보자.

루디는 고개를 내린 상태에서 살짝 시선을 올려 유모를 보았다.

“비밀로 해주세여. 나, 알려지케 되면···여기를 떠나게 될 꺼 가타 무서워서···.”

“물론이지. 황후 마마가 알게 되면 분명 너를 데려가려고 할 게다. 그래, 분명히 그럴 거야. 자기가 낳은 공주와 혼인시키려고 할 게 분명해.”

유모가 입을 굳게 다물더니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놔둘 수는 없지. 정 혼인해야 한다면 여기에도 공주님은 있으니까.”

“···아! 공주님!”

루디는 당황해서 몸을 돌렸다.

아기가 잠이 들었기 때문에 그대로 두고 왔지만, 너무 오래 혼자 놔둔 것 같다.

게다가 난로 근처다. 아무래도 위험하겠지.

서둘러 건물 안으로 들어가 아기 곁으로 가자, 공주는 언제 깼는지 조용히 누운 채 자신의 머리카락을 먹고 있었다.

“공주님, 이건 먹는 게 아니에요.”

루디가 머리카락을 입에서 빼내자,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화가 난 것 같다.

하지만 이미 머리카락이 토막 나 입 속에 남아있었다.

빨리 빼내지 않으면 목으로 넘어가 버린다.

어쩌면 이미 잔뜩 뱃속에 들어가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아···.”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기의 입에 손가락을 넣어 벌리자, 공주의 눈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당연히 입도 그렇다.

이가 없는 쪽으로 손가락을 넣었지만, 잇몸으로 물어도 아픈 건 아프다.

“아파요, 공주님. 진짜 손가락 끊어지겠어요. 그만 좀 놔주세요.”

루디가 우는 소리를 했지만, 공주가 그의 사정을 봐줄 리 없다.

오히려 턱을 갈듯이 잇몸을 움직였다.

아프다. 진짜로 아프다.

아기 주제에 힘은 왜 그리 센지, 손가락이 끊어질 것 같았다.

도움을 청하려고 주변을 둘러 보았지만, 유모는 이미 비마마의 곁으로 가버린 뒤였다.

비마마가 깨어나려는지 침대 위의 이불이 조금 움직였다.

루디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손으로 아기의 입을 벌리려고 했지만, 공주가 놔주지 않는다.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날 것 같다.

아기들이 손에서 놓지 않는다는 기적의 공갈 젖꼭지, 어딘가에서 팔고 있지 않을까? 만일 있다면 꼭 사고 싶다.

간신히 공주에게서 벗어난 뒤에는 어제 하던 재고 확인을 마저 했다.

혹시 자신이 모르는 음식 재료가 남아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런 의외의 일은 생기지 않았다.

음식 창고에 있는 것이 다였다.

점심 시간을 한참 지난 시간이 되었을 때, 황궁 하인이 음식을 약간 가져왔다.

스프와 빵 한 덩어리, 향료를 넣어 불에 구운 고기 약간이었다.

양은 딱 비마마가 먹을 정도였다.

유모와 루디는 물론이요, 황족인 공주가 먹을 분량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유모는 아무 말도 못하고 조용히 음식을 받았다.

황후의 괴롭힘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역시 자급자족할 체계를 갖춰야겠구나.’

안 그러면 가장 풍요롭다는 황궁에서 아사하겠다.

< 거짓말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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