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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23화 (23/201)

< 이 세계의 마도구 수준은… >

* * *

몸이 작으면 여러가지로 불편하다.

어른이면 쉽게 할 수 있는 것도 아이에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고난이도의 행위가 된다.

예를 들면 아기 목욕 같은 거.

어젯밤에는 공주의 목욕을 시키지 못했다.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이 밀어닥쳐서 그럴 경황이 없었다. 피곤하기도 했고.

하지만 사실은 먹는 것만큼이나 시급한 일이다.

아기 몸은 온통 발진으로 붉은 데다 염증까지 이곳저곳 생겨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아플 것 같은 몸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어서 깨끗하게 해주고 싶었지만 제대로 닦을 수 없었다. 똥오줌이 말라 비틀어져 있다고 박박 닦을 수는 없잖아.

자신의 몸이 조금만 더 커도 뭔가 제대로 해볼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의 작은 몸으로는 무리였다.

그렇다고 오물이 묻은 몸을 그대로 방치하는 건 더욱 나쁘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결과, 루디가 내린 결론은 물에 들어가서 빨리 씻고 나온다, 였다.

물에 닿으면 많이 아프겠지만 따뜻한 물로 씻어내는 게 최고다.

그러지 않고는 달라붙어 있는 똥을 벗겨 내기도 힘들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네 살 짜리 아이가 아기를 목욕 시키는 건 아무래도 힘들다.

난이도가 별 다섯 중에 별 여섯 개야.

유모에게 부탁할까도 생각했지만, 중세에는 목욕을 금기시했다는 이야기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공중 목욕탕도 있었다는 걸 보면 실제는 어떨지 모른다.

그래도 지금까지 아기 목욕을 시키지 않았던 걸로 미루어 볼 때 도움 받는 건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다.

괜히 말을 꺼냈다 강렬한 반대에 부딪치기라도 하면 곤란해진다.

유모가 없을 때 강행하는 게 더 나을 것이다.

하지만 아기 목욕은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쳤다.

통 속에 아기를 데리고 들어가는 것부터 힘들었다.

루디가 찾아낸 건 아이가 한 명 들어가 발을 뻗으면 꽉 찰 정도 크기의 나무통이다. 야채 같은 걸 담는 통이 아니었을까 싶다.

높이도 낮아서, 루디가 앉았을 때 겨우 목 정도 오는 정도였다.

이 정도면 충분히 목욕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의 다리는 짧다. 통을 넘어가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아기를 안고?

균형조차 잡기 어렵다.

산악 등반하는 기분으로 간신히 아기와 통 안에 들어갔을 무렵에는 뭔가 대단한 걸 성취한 것 같았다.

물 온도는 적당한 것 같다.

약간 뜨거운가 싶지만, 이 정도도 안 되면 감기에 걸릴 거다.

원래 이 시대의 건물이 다 그런건지, 아니면 이 저택이 부실시공인지, 벽으로 바람이 숭숭 들어온다.

그 때문에 난방을 했어도 중앙의 난로에서 먼 음식창고 쪽은 추웠다.

루디는 아기를 안은 채 나무통 바닥으로 몸을 내렸다.

갑자기 물에 닿으면 아기가 놀란다.

루디는 완전히 앉지 않은 채 등을 통에 대고 몸을 지탱했다.

감기에 걸릴까 싶어 아기는 그의 셔츠를 입은 상태였지만, 루디는 홀딱 벗고 있다.

몸이 덜덜 떨렸다.

따뜻한 물에 엉덩이가 닿자 조금 살만 해졌다.

공주를 감싼 셔츠 자락과 함께 아기 발이 물에 닿았다.

물 속에 잠기는 게 처음인지 아기의 몸이 잔뜩 굳었다.

“···흐에···흐에···에엥···”

아기 입이 삐죽삐죽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겨우 발이 물에 닿았을 뿐인데, 벌써부터 아기는 겁에 질려 통곡 직전이다.

루디는 당황해서 아기 등을 손으로 가볍게 쓸었다.

등을 통에 댄 채 손을 움직이려니 힘들어 죽겠다. 아기 몸무게를 지탱하는 허벅지에 경련이 이는 것 같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우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공주는 아슬아슬하게 참고 있었다.

여러 번 쓰다듬는 동안, 셔츠 자락이 점점 물에 젖어왔다.

물에 젖은 천이 둥둥 물 속을 떠다녔다.

루디는 옷 속으로 손을 넣어, 물을 조금씩 아기 다리에 묻혔다.

천천히···아기가 놀라지 않도록···천천히···.

아기가 울지 않는 걸 확인하면서, 루디는 자신의 허리를 조금 더 밑으로 내렸다.

하아, 엉덩이가 따뜻한 물에 들어가니 이제 겨우 살 것 같다.

아기도 허벅지까지 물에 잠겼다.

공주가 흠칫 놀란다.

루디는 옷 속으로 손을 넣어 아기의 등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잔뜩 말라 툭 튀어나온 척추 뼈가 손바닥으로 느껴졌다.

너무 말라서 조금만 힘을 주면 파삭 부서져버릴 것 같다.

코가 시큰해졌다.

루디는 훌쩍훌쩍 코를 들이마시고 작은 소리로 아기를 달랬다.

“괜찮아요. 무서운 거 아니야. 이건 그냥 물이라는 거죠. 아직 염증 있는 부위에 닿지 않았으니 아프지도 않지요? 자, 자, 입 삐죽은 금지! 울면 어머님이 일어나 또 난리가 날 거예요, 공주님.”

그가 자꾸 말을 걸어서인지, 공주는 울음 직전에서 멈춘 채 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물에 떨어질까 두려워 매달리는 것 같다.

목이 졸렸다.

“뭔 힘이 이리 장사인지···.”

루디는 중얼거리면서 한손으로 따뜻한 물을 조금씩 아기 몸에 끼얹었다.

조금 적응한 뒤에 다시 몸을 밑으로 내려 바닥에 앉는다.

루디의 몸이 완전히 바닥에 닿으면서 아기도 엉덩이까지 물에 잠겼다.

염증 있는 곳이 물에 닿자 아픈 것 같다.

드디어 우렁찬 울음소리가 빼애액! 허공으로 울려 퍼졌다.

아기 울음소리가 요란한데도 비마마는 깨어나지 않았다.

어쩌면 수면제 같은 약을 먹은 건지도 모른다고, 그제야 생각했다.

그 뒤는 힘들었다.

어쨌든 씻고 나가려는 루디와 사생결단하고 벗어나려는 공주님.

누가 승자인지도 모르겠는 시간을 보내고 목욕을 끝냈을 때 남아 있는 것은 흥건히 바닥을 적신 물바다였다.

음식 창고가 거의 비어있는 상태라 좋았다고 생각했다.

어느새 캄캄하던 창문 밖은 훤히 밝아져 있었다.

루디는 공주와 함께 중앙의 벽난로 앞에 드러누웠다.

바닥에는 마도구 방에서 찾아낸 천을 깔았다.

모처럼 깨끗하게 목욕한 뒤에 더러운 양탄자 위에 눕고 싶지는 않아서, 없는 힘을 쥐어 짜내 들고 온 것이다.

이제 더 이상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아기도 지친 모양이다.

말라붙은 눈물 자국을 그의 가슴에 대고, 쌕쌕 숨을 쉬며 잠이 들었다.

공주에게는 마지막 남은 그의 셔츠를 입혔다.

‘노예 옷을 누가 세탁해주지는 않겠지?’

비마마 옷 같은 거야 누군가가 수거해서 세탁할지 모르지만, 노예의 것까지 해주지는 않을 거다.

이몸으로 빨래까지 할 생각을 하니 한심해졌다.

유모가 내려온 것은 피곤에 절은 루디가 깜박깜박 잠이 들 무렵이었다.

계단 하나 내리고 아이고, 다시 계단 하나 내려온 다음 하이고, 소리를 내며 유모가 천천히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루디는 잠이 든 공주님을 조용히 바닥에 내려놓은 뒤 계단으로 향했다.

마도구 발동시킨 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 조금 난감하다.

마력 소유인 것을 알게 되면 유모가 어떤 반응을 할지도 약간 걱정이었다.

아래층에서 올려다보니, 유모는 허리를 잔뜩 구부린 채 오직 계단만 뚫어지게 쳐다보며 내려오고 있었다.

잘못해서 계단을 구른 적이라도 있는 걸까.

마지막 계단 두 개를 남기고서야 유모가 안심한 듯 그를 보았다.

“간밤에는 잘 잤는지 모르겠구나. 춥지 않았니?”

유모가 눈에 주름을 만들며 웃는다.

“밤에는 조금 추웠지만, 괜찮았쪄요. 오늘은 내 맘대로 마도구 방에서 물건을 꺼냈는데 괜찮나요?”

아, 또 혀가 씹혔다.

조금 부끄러웠다.

이놈의 혀, 언제 길어지는 거야.

유모는 잘 듣지 못했는지, 아니면 아이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한 건지, 거기에는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아이 발음에 신경 쓰는 건 루디 혼자 뿐인지도 모른다.

“괜찮다. 괜찮아. 여기에 있는 건 뭐든 네 맘대로 써도 된다. 다른 곳에서야 어떤지 모르지만, 여기에는 비마마뿐이니까. 아무도 네가 노예기 때문에 뭐라 하지 않아요.”

유모는 힘든 듯 숨을 쉬면서 마지막 계단을 내려오더니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오늘 따라 힘이 들었나 보네. 왠지 집이 더운 것 같구나.”

유모는 허리에 손을 짚고 안쪽으로 향했다.

“비마마 께서 흥분한 날에는 먹는 약이 있단다. 신경을 가라앉히고 잠이 잘 오게 하는 건데, 차에 조금 타서 드시게 하지. 어디에 있는 건지 너한테도 가르쳐 줄테니 혹시 잘못해서 먹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네.”

천천히 걷던 유모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아니, 웬일로 난방이 되고 있지?”

유모가 당황한 듯 루디를 돌아보았다.

“얘야, 혹시 밖에서 사람이 왔었니? 아니, 그렇다면 나를 좀 불러주지 그랬니. 이것저것 필요한 것도 좀 있는데.”

“···어···그게···.”

유모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벽난로 쪽으로 다가갔다. 뭔가 좀 기쁜 것 같다.

“하이고, 이번 건 화력도 좋구나. 그동안은 간신히 벽난로 주변만 덥힐 수 있었는데, 어쩌면 뛰어난 마도구사가 황궁에 온 건지도 모르겠다.”

“···.”

나름대로는 화력을 많이 낮춰 놓은 건데, 이게 센 거면 얼마나 더 성능을 떨어뜨려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니, 그 이전의 문제려나.

비마마 처소기 때문에 괴롭히려고 일부러 낮은 성능의 마도구를 가져다 놓은 건지, 아니면 실제로 황궁에서 사용하는 마도구의 보편적인 성능이 그 정도로 낮은 건지, 그것부터 알아야겠다.

유모는 벽난로 속을 들여다보더니 기쁜 듯 루디를 보았다.

“얘야, 아무래도 네 덕분인 것 같다. 시종장님이 너를 보내면서 신경 써준 게 아닌가 싶구나. 정말 잘 됐다. 작년 겨울에는 너무 추워서 정말 고생했지 뭐야.”

“···저···.”

“아, 다른 마도구는···. 아니, 너는 잘 모르겠구나. 내가 가서 봐야겠다. 등하고 물 마도구도 교체해줬으면 좋겠는데···.”

“유모 님!”

“그래, 그래, 조금만 기다려다오. 마도구만 좀 확인하고 네 얘기를 들어주마.”

유모는 아프다고 투덜거리면서도 바쁘게 움직였다.

루디가 말할 틈을 주지 않는다.

음식창고 앞에 놓여 있는 [전등]을 보고 유모가 기쁜 듯 미소지었다.

“저것도 왔는가 보네.”

가까이 다가가더니 제국어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들어라, 빛의 정령아! 내 너에게 부탁하느니, 네 몸을 태워 어둠을 물리치고 밝은 빛을 나누어 다오.”

길다. 게다가 촌스러워.

저런 식으로 명령어를 만들면 본래의 [전등]이라는 것과는 의미가 멀어진다.

당연히 효과도 좋지 않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루디가 점등할 때는 전깃불을 켤 때처럼 순식간에 밝아졌지만, 이번에는 발동이 되는 건지 아닌지 모를 만큼 느리다.

처음에는 반응하지 않는 것 같던 마도구에서 점차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많이 느리다.

빛은 조금씩 밝아지다가, 와토린구 공작가의 지하에 있던 빛 정도에서 멈췄다.

‘···.’

지하 통로에 있던 빛은 비상구 정도의 밝기였다.

그때는 지하에 있는 거라 약한 빛의 전등을 설치한 거라고 생각했지만, 다른 모양이다.

이 세계에서 [전등] 마도구는 원래 이 정도의 빛 밖에 내지 못하는 거였다.

뭐, 주문이 저런 식이라면 당연한가.

하지만 유모는 정말 기쁜 듯 했다.

전등이 제대로 작동되는 걸 확인한 뒤, 불을 끄는데도 주문은 비슷하게 매우 길고 촌스러웠다.

“···.”

루디는 힐끔 자고 있는 아기의 모습을 보았다.

약하게 한숨을 쉬고 고개를 들었다.

아주 잠깐, 실상이 이렇다면 마도구를 발동하지 말 걸 그랬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곧 생각을 바꿨다.

여기에 있는 사람, 특히 아기에게 이 환경은 너무 가혹하다.

지구의 아파트와 이 건물은 전혀 달라서, 벽으로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거야.

보기에는 두꺼운 벽돌이 촘촘히 잘 붙어 있어서 틈이 없을 것 같은데, 꼭 제주도 하루방처럼 바람이 그대로 들어오는 거다.

아기도 아기지만, 현대인으로 살아온 루디 자신도 이런 곳에서는 견뎌내기 어려워 보였다.

‘어차피 겨울이 되면 난방은 해야 했을 거야.’

물도 마찬가지다.

이 건물 안에는 수도가 없다.

근처에는 우물도 없어 보였으니, 천상 누군가가 물을 배달해줘야 한다.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유모는 물을 매우 아껴가며 썼을 거다.

음식 창고 안으로 들어간 유모가 낮은 비명을 질렀다.

“무, 물이! 물이!”

아, 바닥에 흥건한 물을 보았구나.

아껴서 모아둔 물을 바닥에 쏟은 걸로 착각한 것 같다.

루디는 어깨를 으쓱한 뒤 음식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유모가 손과 무릎을 바닥에 대고 엎어져 있다.

“유모 님···.”

유모가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를 보았다.

< 이 세계의 마도구 수준은…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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