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법식이 한글이었다 >
* * *
제국 상인이 머물고 있는 건물은 경매장에서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귀족도, 군인도 아닌 제국의 상인이 제맘대로 사용할 것 같지는 않고, 도시를 장악한 카니아 왕국 측이 대가를 받고 단기간 임대하는 것 같다.
우락부락한 남자들이 건물의 입구와 주변을 지키고 있었다.
건물 앞에는 노예를 운반하기 위한 마차가 몇 대 있었다.
경매장에 올 때 탔던 것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이쪽은 나무가 아닌 쇠창살이다.
크기도 약간 큰 것처럼 보였다.
노예 운반 마차 옆에는 일반 마차도 있었는데, 목에 쇠목걸이를 건 노예들이 지붕과 마차 앞 뒤의 공간에 차곡차곡 짐을 올렸다.
건물 앞에서, 콧수염이 빙글 몸을 돌려 루디와 노예들을 보았다.
“앞으로 너희들은 하루 두 번 식사를 받게 된다. 식사를 한 뒤에는 배설 시간을 줄 테니, 반드시 정해진 시간에 볼일을 보도록!”
“···.”
루디와 함께 온 노예들이 주춤하며 고개를 숙이자, 콧수염이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아, 오늘 오후에 노예 처형이 있을 테니 잘 봐두도록 해라. 말을 듣지 않는 노예가 어떻게 되는지 알아 둘 필요가 있겠지.”
콧수염이 히죽 웃고 몸을 돌렸다.
콧수염 옆에 서 있던 남자들이 루디와 노예들을 건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값이 싼 노예들은 1층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남녀가 각기 다른 방이었다.
“너희 고급 노예는 이쪽이다.”
남자들이 노예들의 쇠줄을 잡아당겨 2층으로 향했다.
루디가 들어간 곳은 창고같이 생겼지만 상당히 깨끗한 방이었다.
고급 노예 역시 남녀가 각기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루디는 여자들의 방이다.
무슨 일을 당하게 되는 건지 두려웠던 걸까.
목줄을 쥔 남자들이 방으로 들어오자, 여자 노예들이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었다.
남자들은 여자들의 몸을 빠는 것처럼 쳐다봤지만, 쇠줄을 목걸이에서 제거했을 뿐 별다른 행동은 하지 않았다.
한 명이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어차피 판매하는 건데 한 번쯤 맛을 봐도 좋겠구만.”
그 말을 듣자 다른 남자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건 생각만으로 끝나는 게 좋을 거다. 상품에 손을 댔다가는 채찍질을 맞고 쫓겨날 테니.”
“그러니까 그게 아쉽다는 거 아니야. 이것들이 입만 다물면 아무도 모를···.”
“그만둬. 진짜로 그랬다가는 채찍질만으로는 끝나지 않으니까. 상품을 흠집내면 배상금까지 물어야 할 거야. 그것도 엄청난 금액을!”
“쳇! 그냥 해본 말에 뭐 그렇게 열을 내는 거야?”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났다.
이곳의 주인은 노예상이지만 나름대로의 규칙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나마 최악은 아닌가.’
구석에 몰려 있던 여자들이 안도의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른다고, 여자들도 겁을 먹고 있었던 것 같다.
남자들이 나가고 잠시 뒤 식사를 받았다.
스튜와 어두운 색의 빵 한 덩어리였다.
빵이라니, 여기 와서 처음 먹어본다.
지구에서 먹던 것과 달리 딱딱하고 맛도 없었지만, 루디는 허겁지겁 빵조각을 뜯어 입에 넣었다.
빵이 질겨서 한참을 씹어야 했다. 다 먹을 무렵에는 턱이 약간 아팠다.
그 뒤에는 노예가 배변을 위한 나무통을 두 개 가지고 왔다.
한 사람씩 억지로 볼일을 보자,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노예가 통을 다시 가지고 나갔다.
그 뒤에는 한동안 아무도 오지 않았다.
자신들이 험한 일을 당할 염려가 없다는 점을 알게 되어 진정된 건지, 조용하기만 하던 여자들이 작은 소리로 드문드문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노예로 팔리면 어떻게 되는지, 외모가 반반한 노예는 어떤 일을 당하는지 등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 중에는 채찍질 당하다 죽은 노예에 관한 이야기나 혹은 주인집의 하인들에게 매일 유린당하다 들켜서 오히려 여자노예만 벌을 받았다는 소문도 있었다.
“가장 좋은 건 주인님의 첩이 되는 거래. 그러면 최소한 다른 사람은 건드리지 못하니까.”
한 여자가 그렇게 말하자 모두 조용해졌다.
오후가 되어 하늘에 노을이 질 무렵, 문이 벌컥 열리더니 노예관 남자들이 들어왔다.
“자, 나가자.”
“서둘러! 처형 구경이다.”
남자들이 여자들을 다그쳐 밖으로 내몰았다. 모두 줄줄이 밖으로 끌려나간다.
루디도 여자들의 끄트머리에 붙어 따라갔다.
다른 방에 있던 노예들도 모두 밖으로 나오고 있었는데, 남자 노예들은 대부분 목걸이에 쇠줄을 걸고 있었다.
노예관 남자들은 노예들을 건물 뒤편으로 데려갔다.
거기에는 이미 노예들이 모여 둥글게 원을 그리고 서 있었다.
루디는 키가 작다는 이유로 가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이라고 해서 처형을 보지 못하게 하는 일은 없었다.
처형 당하는 노예는 한 명이 아니었다.
모두 다섯 명이다.
노예들은 손을 뒤로 묶인 채,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었다.
한데 그 중 한 명이 이상한 목걸이를 하고 있다.
루디가 지금까지 본 노예는 모두 두꺼운 쇠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색깔이 칠해져 있거나 폭이 좁은 것도 있었지만, 어느 것이나 모두 두꺼운 쇠로 만들어졌다.
실제로 다섯 명 중 네 명은 그런 목걸이를 하고 있다.
하지만 마지막에 무릎을 꿇고 시선을 내린 노예의 목걸이는 다른 것과 달리 매우 얇았다.
그리고 보석이나 유리, 혹은 돌가루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
어쩌면 저 목걸이는 쇠로 만든 게 아닌지도 모른다. 사기나 흙을 구워 만든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이상한 점은 그 목걸이에 글자가 적혀 있다는 것이다.
루디는 멍하니 노예의 목걸이를 보았다.
거기에 적혀 있는 건, 그의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분명 한글이다.
‘이게 무슨···.’
노예의 목걸이에는 서툰 한글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전기 충격기 ; 혈액 인증 ; 작···]
뒤에 글자가 더 있었지만 이쪽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문득 경비대장과 유모가 언급했던 ‘코레아 왕조’라는 말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것은 ‘코리아’라는 단어가 잘못 전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저 노예가 하고 있는 마목걸이 말이야, 굉장히 비싸잖아. 정말로 버리는 거야?”
살짝 고개를 돌려 확인해보니, 아까 여자 노예를 몰래 맛보자고 말하던 남자였다.
그때 그를 말렸던 사람이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자네는 마도구에 대해 아는 게 없군. 저건 이제 못 써. 이미 발동한 거라 주인이 없으면 풀지 못하는 거야.”
“아니, 그래도 노예가 죽으면 풀릴 거 아니야.”
“안 된다니까. 노예가 죽든, 목이 잘리든, 일단 발동한 마도구는 작동시킨 사람이 없으면 절대로 안 풀린다구.”
“그러면 저걸 녹이거나···.”
“멍청하긴. 마도구가 불로 녹인다고 녹나.”
“아깝잖아.”
“어쩔 수 없지.”
두 사람이 하는 소리를 귓등으로 들으며, 루디는 뚫어져라 마목걸이를 보았다.
하지만 마법식이 한글이라니, 너무 이상하다.
그때, 미련을 못 버리고 남자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젠장, 나도 저 마법식만 읽고 쓸 수 있었으면.”
“그러면 코레아 왕조로 태어나든가.”
“···.”
루디는 자기도 모르게 번쩍 고개를 들었다.
설마, 여기 사람들은 한글을 몰라? 고대언어처럼 소수의 사람만 배우고 있나? 한데 ‘그러면 코레아 왕조로 태어나’라는 말은 뭐지?
자기도 모르게 그런 걸 물어볼 뻔 하다가, 루디는 얼른 눈을 돌렸다.
괜히 이상한 질문을 했다가 주의를 끌면 곤란하다.
그 사이 도끼를 든 남자가 처형당할 노예들의 뒤편에 가서 섰다.
그중 가장 오른쪽에 서 있는 노예에게 다가가더니 거칠게 바닥에 쓰러뜨린다.
노예가 손을 뒤로 묶인 채 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목걸이에 걸린 쇠사슬이 쩔렁쩔렁 소리를 내며 노예의 몸 위에 쏟아졌다.
다른 남자가 쇠줄을 바짝 위로 잡아당기자, 목걸이가 턱까지 기어 올라갔다.
노예가 발버둥치려 했지만, 도끼 남자가 그의 등을 손목과 함께 발로 눌렀다.
콧수염이 모여 있는 노예들의 얼굴을 죽 둘러보고 말했다.
“이 노예는 주인의 물건을 훔쳤다. 도둑질을 한 노예의 벌은 죽음이다.”
콧수염이 고개를 끄덕이자, 노예의 등을 밟고 있던 남자가 도끼를 하늘로 치켜들었다.
여자들이 차마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자, 근처에 서 있던 노예관 남자들이 윽박지르며 억지로 앞을 보게 만들었다.
노예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도끼가 내리쳐졌다.
퍼석, 소리와 함께 목이 잘렸다.
콧수염이 다시 입을 연다.
“두 번째 노예는 섬기는 주인의 몸에 상처를 입혔다.”
다시 노예의 목이 잘렸다.
사방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져, 눈을 깜박이는 소리조차 들리는 것 같다.
세 번째 노예의 죄목은 시키는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네 번째 노예는 도망치려고 했기 때문에 먼저 다리가 잘리고, 그 뒤에 머리가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유일하게 마목걸이를 하고 있던 남자의 차례가 되었다.
콧수염이 사방을 둘러보고 입을 열었다.
“이 노예는 주인을 지키는 호위 노예였다. 하지만 그의 주인은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지. 너희 중에는 훗날 마목걸이를 하게 되는 자가 있을 것이다.”
콧수염의 시선이 루디와 고급 남자 노예들을 향했다.
“잘 보아두는 게 좋을 것이다. 마목걸이는 주인 이외의 사람은 풀지 못한다. 주인이 사망하면 목걸이는 영원히 그 목에 감겨 있게 되지. 그러면 그 노예는 어떻게 될까?”
콧수염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여자는 그래도 사정이 조금 나은 편이다. 힘없는 계집들이야 다른 주인의 목걸이를 하고 있어도 써먹을 데가 있을 테니까. 하지만 남자의 경우는 다르다. 만일 무기라도 다룰 줄 안다면 그야말로 처분 곤란한 사고뭉치지.”
콧수염이 힐끔 사형당할 노예를 보았다.
“저 자의 죄는 주인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마목걸이를 한 노예는 다른 사람과 달리 버둥거리거나 울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눈을 내리 깔고 있을 뿐이다.
도끼 남자가 억지로 마목걸이 노예의 머리를 잡아 위로 올렸다.
문득 노예의 시선이 정면에 있는 루디를 향했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의 눈에 놀란 빛이 어렸다.
“···.”
루디는 재빨리 시선을 내렸다.
그가 자신을 본 적이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뭔가 알아차린 것 같았다.
누군가가 그 노예의 시선을 보지 않았을까. 그래서 자신에게 주목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움 때문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살짝 시선을 올려 마목걸이 노예의 모습을 살폈지만, 그는 다시 시선을 내리 깔고 있었다.
“훗날 마목걸이를 하게 된다면, 전신의 힘을 다해 자신의 주인을 보호하는 게 좋을 것이다.”
콧수염의 말을 끝으로, 도끼남자가 마목걸이 남자를 바닥에 엎어뜨렸다.
도끼가 마목걸이 남자의 목을 자르기 직전, 우연인 것처럼 그가 머리를 위로 치켜 올렸다.
그의 눈동자가 루디의 모습을 잡고, 아주 조금이지만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그 직후, 남자의 머리가 데구르르 굴러 루디 쪽을 향했다.
루디는 두 손을 꼭 잡고 고개를 숙였다.
처형이 끝났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목에서 빠져나온 마목걸이가 피 웅덩이 속에 묻혀 붉게 물들어간다.
루디는 노예들이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움직이기 시작하자, 피웅덩이 근처로 다가갔다.
목걸이 뒷면의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목걸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전기 충격기 ; 혈액 인증 ; 입력 “너에게 내리는 고통을 느껴라”]
“너에게 내리는 고통을 느껴라”라는 말은 침략당한 디코콰리아 어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전기회로와 비슷하게 생긴 그림이 작게 그려져 있었다.
가만히 그것을 내려보고 있는데, 콧수염이 다가왔다.
“특이한 아이구나. 이런 걸 보고 울지도 않고.”
“주인님!”
루디가 고개를 숙이자, 콧수염의 말이 머리 위에서 내려왔다.
“이걸 갖고 싶다면 네가 가져가도 된다. 저 마목걸이는 이제 아무 가치도 없으니까.”
“···.”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의도를 알 수 없어서 가만히 있자, 콧수염이 몸을 약간 굽히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이자는 너와 아는 사이였을까? 네가 하인이었다는 말은 나도, 주인님도 믿지 않는다. 하지만 네가 귀족이었다 해도 우리에게는 상관없는 이야기. 유품으로 받고 싶다면 그걸 가져가라. 새 주인을 만날 때까지는 용서해주마.”
“!”
콧수염은 몸을 쭉 펴더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루디는 피웅덩이에 있는 목걸이를 들었다.
도끼 남자가 근처에 있었지만 제지하지 않았다.
죽은 노예의 머리를 몸에 붙여준 뒤, 사람들이 모두 들어갈 때까지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마법식이 한글이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