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13화 (13/201)

< 노예 >

* * *

노예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달랐는지도 모른다.

사회자가 낙찰되었다고 말하는 순간, 깊은 구멍 속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좁은 벽으로 사방이 막혀 있는 것 같다.

어둠에 잡아 먹히는 것처럼, 순식간에 주변이 암흑으로 물들었다.

자기도 모르게 몸이 흔들렸던 모양이다. 상반신이 기우뚱 앞으로 기울어졌다.

루디는 바닥에 엎어지기 직전에 간신히 몸을 바로잡았다. 두 손을 단단히 잡고 단상 바닥을 쳐다본다.

‘진짜로 노예가 되었구나.’

온몸의 힘이 스르르 빠져나가 땅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경매장 진행요원 한 명이 제국 상인에게 다가가 뭔가를 건네주었다.

납작한 나무판인 것 같다.

진행요원은 제국 상인에게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한 뒤, 루디가 있는 단상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아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에 나무판이 달린 목걸이를 걸었다.

루디의 목에도 목걸이가 걸렸다.

아이들의 몸에 비해 줄이 너무 길어서, 나무판이 배꼽 근처에서 달랑 거렸다.

나무판에는 간단한 그림과 숫자가 적혀 있었는데, 아마 구매자와 낙찰된 노예가 같은 문양의 나무판을 가지게 되는 것 같다.

나무판 뒷면에는 낙찰 금액으로 보이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제국 상인이 단상 구석에 있는 책상으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거기에는 빼빼 마른 남자가 앉아서 잉크와 펜으로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아마 나무판의 글자는 그 남자가 적어 넣은 모양이다.

책상 위에 나무판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제국 상인이 다가가자, 빼빼 마른 남자가 종이에 적힌 걸 보여준다.

그 내용을 확인한 제국 상인이 고개를 끄덕이고 끼고 있던 반지의 윗면을 종이에 꾹 눌렀다.

사인 대신 사용하는 인장인 것 같다.

낙찰 받은 다른 사람들도 그쪽으로 가서 서류를 확인하고 각자의 인장을 누르고 있었다.

멍하니 그 장면을 보고 있는데, 경매장 진행요원이 아이들을 잡아 끌었다.

“너희들은 이리 와라!”

진행요원이 아이들을 끌고 단상 밑으로 내려갔다.

루디도 뒤따라간다.

곧바로 새주인에게 인도되는 게 아닌 모양이다.

진행요원은 경매장 천막 뒤쪽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깄다.

거기에는 앞쪽에서 본 것과 비슷한 철장이 죽 늘어서 있었는데, 통로가 굉장히 좁았다.

겨우 한두 사람 지나갈 정도의 틈밖에 되지 않는다.

철장의 문에는 나무판과 비슷하게 생긴 문양이 그려진 판이 걸려 있었다.

진행요원은 목걸이를 확인하고, 같은 문양이 있는 철장에 아이들을 한  명씩 넣었다.

루디는 가장 큰 철장에 들어갔다.

거기에는 이미 같은 문양의 목걸이를 하고 있는 노예들이 있었는데, 남자도 여자도 하나같이 아름다웠다.

다른 철장과 달리 공간이 넉넉하다.

아마 비싸게 구매한 노예만 들어가는 철장이었던 것 같다.

바로 옆에도 같은 문양의 나무 판을 단 철장이 있었는데, 그쪽은 저렴한 노예를 넣는 철장인 모양이다.

넓은 철장에는 외모가 출중하지는 않아도 건강해 보이는 남녀가 들어가 있었다.

다른 구매자의 철장에 여자들이 많은 것과 달리, 그곳에는 남자들이 더 많다. 게다가 우락부락한 부류가 대부분이었다.

루디가 들어간 철장과 옆의 공통점이라고 하면, 두 곳 모두 나이가 스물이 채 안되어 보이는 사람만 있다는 것이었다.

루디를 보자, 철장 안의 노예들이 약간 놀라는 것 같았다.

나이가 너무 어려서인것 같다.

하지만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루디는 철장 안을 둘러보다 구석에 시선을 주었다.

철장 구석에는 대소변을 보는 통과 더러워 보이는 천이 몇 개 놓여 있었다.

높은 가격에 구매된 상품이라서일까. 먼저 있었던 천막보다는 조금 상황이 나아진 것 같다.

한두 시간 정도 지나자, 루디를 이곳으로 데려왔던 진행요원과 모르는 남자들이 커다란 나무통을 들고 왔다.

그 안에는 스프인지 스튜인지 모를 것이 들어 있었다.

남자들이 철장을 돌아다니며 나무 그릇에 한 국자씩 퍼서 노예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옆의 철장도 그 나무통에 있는 음식을 받았다.

상했는지 역한 냄새가 풍겨왔다.

루디가 들어있는 철장에 배급된 음식은 그것과는 다른 통에 들어있는 것이다.

건더기가 약간 있는 스튜였는데, 이것 역시 상했는지 냄새가 조금 이상했다.

하지만 먹어보니 상했다는 느낌은 거의 없었다. 아마 이제 막 상하려는 참이었던 모양이다.

아주 조금이지만 운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를 마칠 무렵에는 사방이 캄캄해졌다.

같은 철장의 여자들이 구석에 있는 천을 꺼내 펼쳤다.

몇 명씩 몸을 붙여서 웅크리고 천을 덮는다.

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 한 명이 손짓으로 그를 불렀다.

루디가 다가가자 천을 조금 들어준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여자들이 약간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발음이···.”

“귀족 집의 도련님이니?”

여자들이 묻는다.

고개를 젓자, 여자들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여자들이 자리를 잡고 눕자, 약간 거리를 두고 남자들이 한데 모였다.

남자들 역시 한데 모여 천을 덮는다.

경매장의 사람들이 가끔 철장 밖 통로를 순찰하며 돌아다녔다.

이곳에서 약간 먼 철장에서 노예끼리 싸움이 난 모양이다.

경매장 남자들이 철장을 두드리며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자야지.’

이런 상황에서는 감기 하나만 걸려도 죽을 수 있다.

최대한 잘 자고, 먹을 수 있는 건 뭐라도 먹으며 체력을 보존해야 한다.

억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데, 함께 천을 덮고 자던 여자 한 명이 소리 없이 울기 시작했다.

슬픔이 전염된 건지, 또 한 명이 코를 훌쩍거린다.

눈을 감은 채 울음소리를 무시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새벽녘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점심 무렵이 되자 다시 똑같은 식사가 나왔다.

하지만 다른 철장에는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았다.

저녁이 되어서야 다른 철장에 식사가 배급되었다.

루디가 있는 철장에 또 한 명의 노예가 들어왔다.

이틀 뒤에는 두 명이었다.

열흘 정도가 지난 뒤에야 제국 상인이 노예를 인수하러 찾아왔다.

제국 상인은 부하를 여러 명 데리고 있었다.

한 명은 목에 쇠목걸이를 하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은 자유민인것 같다. 목에 아무것도 없었다.

제국 상인 옆에는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장부를 들고 딱 붙어 서 있었다.

콧수염이 제국 상인을 제외하면 가장 높은 사람인 것 같다.

경매장 사람이 노예를 한 명 한 명 밖으로 낼 때마다, 콧수염이 자신의 장부와 목걸이, 가격을 확인했다.

루디의 차례가 되었다.

그가 밖으로 나가자, 문득 제국 상인이 손짓을 해 멈췄다.

“혹시 배가 아프지는 않느냐?”

제국 상인이 묻는다.

루디는 공손해 보이도록 두 손을 앞으로 잡고 대답했다.

“괜짢슴니다.”

그 순간, 장부를 쳐다보고 있던 콧수염이 번쩍 고개를 들고 그를 보았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일제히 루디를 향했다.

“···.”

그저 질문에 대답했을 뿐인데, 뭔가 잘못했을까. 어쩌면 주인의 말에 노예가 직접 대답해서는 안되는 거였을까.

루디는 멈칫했지만,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알 수 없었다.

콧수염이 호오, 라고 감탄하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주인님, 상당히 좋은 구매를 하셨군요. 설마 제국어를 할 줄 알다니, 정말 놀랍군요. 주인님은 알고 계셨습니까?”

콧수염의 말에 제국 상인이 유쾌한 듯 배를 흔들며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하! 아니, 나도 몰랐다. 이 아이의 카니아 어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 이 아이는 내 질문에 모국어가 아니라 완벽한 카니아 왕국어로 대답했으니까. 처음에는 카니아 애가 잘못 잡혀온 줄 알았을 정도였다.”

제국 상인이 손가락으로 턱을 문지르며 말했다.

“하지만 설마하니 이렇게 완벽한 제국어를 구사할 줄이야. 그야말로 예상을 뛰어넘는구나.”

제국 상인이 일부러 푸테그린 제국어로 질문을 했던 모양이다.

전혀 몰랐다.

보통의 언어와 약간 억양이 다르다고는 생각했지만, 어차피 이세계의 언어다.

루디에게는 이곳의 언어나 제국어나 모두 똑같이 프랑스어 같은 감각으로 들렸다.

아마 태어날 때부터 공작가의 적남으로 교육이 베풀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기억에는 없지만 일상에서 몇 개 국어를 섞어서 사용했을지도 모른다.

“이 아이를 판매한 상인도, 카니아 언어를 할 줄 안다는 사실은 알았어도 제국어까지는 아마 몰랐을 거다. 알았다면 가격을 더 붙였을 테니까.”

제국 상인이 히죽 웃자, 콧수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로 완벽하게 말할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판매할 수 있겠군요. 상당히 좋은 값을 받겠습니다.”

“그렇지. 정말 좋은 쇼핑이었다.”

제국 상인은 기분이 좋은 듯 배를 내밀며 건너편 철장 쪽을 바라보았다.

루디가 시선을 돌리자, 마지막까지 제국 상인과 경합을 벌이던 상인이 서 있었다. 그 역시 자신의 노예를 데리러 온 것 같았다.

‘아아, 왜 이 타이밍에서 일부러 제국어를 사용해 시험하나 했더니···.’

제국 상인은 이 이야기를 저 남자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남자는 제국 상인을 죽일 듯이 노려보다, 홱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났다.

아직 노예를 인수하지 않았지만 분을 이기지 못해 자리를 피한 것 같다.

“크크크큭.”

제국 상인이 음흉하게 웃자, 콧수염이 한숨을 쉬었다.

“주인님도 성격이 나쁘십니다. 지난번 일에 앙심을 품고 계셨나요?”

“눈앞에서 채가는데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수 있느냐.”

“하아.”

제국 상인의 말에 콧수염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뭐, 저 남자는 매번 우리가 미리 점찍어 놓은 걸 가로채곤 했으니 한 번 쯤은 당해보는 것도 괜찮겠지요.”

콧수염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자신의 뒤에 있는 남자들에게 손짓을 했다.

남자들이 가지고 온 쇠목걸이를 확인이 끝난 노예들의 목에 끼운다.

목걸이는 경매장의 것보다 조금 가는 것이었지만, 마찬가지로 쇠줄이 달려 있었다.

길게 늘어진 쇠줄의 끝은 다른 노예의 목걸이에 있는 고리에 끼워졌다.

자물쇠가 걸리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목걸이의 엎어진 C자형 고리는, 터져 있는 부분이 매우 작아서 쇠줄이 쉽게 빠지지 않게 되어 있었다.

순식간에 앞과 뒤 노예의 목걸이가 쇠줄로 연결되고, 다시 그 뒤의 노예에 연결되었다.

루디와 같은 철장에 있던 노예들에게도 목걸이가 끼워졌다.

하지만 색이 달랐다.

다른 노예들은 아무 색도 없는 철 목걸이인데, 루디와 같은 곳에 있던 노예들은 붉은 색이 칠해져 있었다.

붉은 목걸이를 한 노예는 그들끼리 목이 연결되었다.

다만, 루디는 너무 작기 때문에 목걸이를 했어도 다른 사람과 쇠줄이 연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제국 상인과 콧수염이 움직이자, 노예들이 한줄로 길게 통로를 걷기 시작했다.

걸어가면서 보니 생각보다 빈 철장이 많았다.

통로가 끝나는 지점에 이르자, 콧수염이 제국 상인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주인님, 그러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 그래, 수고 하게. 그 아이는 특히 죽지 않게 조심하고.”

제국 상인은 경매장에 계속 남아있는 것 같다.

콧수염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모처럼 얻은 상품을 쉽게 죽여버려서야 쓰겠습니까.”

콧수염이 힐끗 루디를 보았다.

“안 그래도 몇 군데에서 도련님의 놀이상대를 원한다는 요청이 와 있으니 특히 주의하겠습니다.”

콧수염의 말로 미루어보면, 당분간 죽을 염려는 없을 것 같다.

루디는 속으로 안심했지만, 동시에 약간 서글퍼졌다.

경매장 근처를 벗어나자, 사방은 단박에 조용해졌다.

이곳은 먼저 있던 곳과는 정반대의 방향이다.

구매측은 판매하는 구역과 전혀 다른 곳에서 머무는 모양이었다.

먼저 상인때와 달리, 콧수염의 부하들은 큰소리를 내거나 화를 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목줄을 교묘하게 흔들거나 잡아당겨 고통을 주는 방식으로 노예를 조종했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오히려 더욱 괴로운 것 같다.

처음에는 도망갈 틈을 노렸는지 약간 튀는 노예가 있었지만, 제국 상인의 노예관에 도착할 즈음에는 모두 얌전해졌다.

< 노예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