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8화 (8/201)

< 노예상에 팔렸다(주인공이름; 정진영 = 루디) >

* * *

큰일 났다. 큰일 났다. 정말로 큰일 났다.

병사의 손에 끌려가는 정진영의 머릿속은, 폭풍치는 바다 한가운데 둥둥 떠다니는 조각배 같았다.

그것도, 노는 잃어버리고 바닥에는 구멍이 난 조각배다.

조금 전까지 마음 속에 스며있던 유모의 죽음과 슬픔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생각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는지, 뇌 속에 있는 세포를 총동원해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도망은 할 수 없다.

병사가 한 명도 아니고 둘이나 있으니 슈퍼맨이라도 되지 않는 이상 도망은 꿈도 못 꿀 것이다.

못은 아까 병사에게 잡히면서 떨어뜨려 버렸다.

몸을 지킬 무기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진영은 난폭한 아이에게 휘둘리는 장난감 인형처럼, 병사가 잡아끄는대로 한참을 끌려갔다.

혹시라도 폭동이나 전투 같은 게 벌어져 도망 기회를 잡을 수는 없을까 생각했지만, 거리는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단 하룻밤 사이, 외벽 안은 유령 도시처럼 변해 있었다.

이른 아침이라는 것을 감안해도 너무 사람이 없다.

아주 드물게 건물 안에서 거리를 지켜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질질 끌려가면서 눈을 올려 보면, 마주치기 전에 눈동자가 사라져 버렸다.

적병이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다들 겁을 먹은 거다.

이대로 끌려가 귀족, 그것도 와토린구 공작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발각되면···.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냥 죽이면 운이 좋은 거다.

어쩌면 귀를 자르고 코를 자른 뒤에 화형 시켜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와토린구 공작의 처참한 모습을 보면 가능성이 있었다.

‘숨겨야만···.’

절대로 공작의 아들이라는 건 비밀로 해야 한다.

정진영은 이를 꽉 앙다물었다.

병사에게 팔을 잡혀 끌려가느라 어깨가 빠질 것처럼 아프다.

이쪽이 아이라는 걸 전혀 배려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잡아 끌었기 때문이다.

최대한 어깨뼈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연약한 신체에는 아무래도 큰 부담이 되었다.

조금 더 가면 틀림없이 탈구하고 말거라 생각했을 무렵, 병사가 걸음을 멈췄다.

도착한 곳은 제법 넓은 광장이었다.

공간을 에워싸는 것처럼,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병사는 그중 가장 큰 건물로 정진영을 데려갔다.

가운데가 터널처럼 뚫려 있는 5층 건물이었다. 한국의 아파트처럼, 똑같이 생긴 창이 나란히 줄지어 뚫려 있다.

그 안 어딘가에서, 흐느끼는 여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때때로 가냘프지만 날카로운 비명 소리도 울려 퍼졌다.

병사가 정진영을 잡은 채로 건물의 왼쪽 입구로 들어갔다.

어두침침한 건물의 층계를 올라간다.

제대로 걷지도 못한 채, 반쯤은 질질 끌려서 계단을 오른다.

병사가 멈춘 곳은 삼층의 어느 문 앞이었다.

나무문 너머로, 뭔가가 부딪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병사가 뒤를 보더니 히죽 웃으며 동료와 시선을 나눴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대강 짐작이 갔다.

사람을 죽이는 게 일상인 군인, 거기에 고국에서 멀리 떨어져 적국을 막 점령한 정복자다. 지금 이들은 아마 인간의 가장 추악한 면만 지니고 있을 것이다.

‘조심해야 해.’

정진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병사가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십인대장님! 신고 받은 아이를 데려왔습니다.”

잠시 방안에서 작은 여자의 비명과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다 잠잠해졌다.

문 안에서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라.”

병사가 문을 열자마자, 반쯤 벗은 여자가 고개를 숙이고 빠른 걸음으로 나왔다. 날이 아직 추운데 맨발이었다.

정진영은 몸이 작기 때문에, 스쳐 지나가는 여자의 얼굴을 아래에서 올려다 볼 수 있었다.

여자의 얼굴 한쪽이 잔뜩 부어 있었다.

여자는 정진영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복도로 나갔다.

병사가 짐짝 다루듯 정진영을 안으로 밀었다.

정진영은 앞으로 고꾸라지듯 방 안에 들어갔다.

아침해가 커다란 창으로 들어와 방안을 비추었다.

그리 크지 않은 직사각형의 공간이었다.

구석에 침대가 놓여있고, 다른 쪽 벽으로 작은 탁자가 있었다.

탁자 위에는 먹다 남은 것으로 보이는 스튜 그릇이 있다.

갑자기 맹렬하게 배가 고팠다.

꾸르륵 소리가 나자, 창 옆 벽에 기대 서 있던 남자가 낮은 소리로 웃었다.

“도련님, 배가 고픈가?”

남자가 창을 등지고 걸어와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가만히 정진영의 얼굴과 몸, 팔 다리를 보아 내려간다.

오싹해졌다.

이 남자의 눈초리가 엄청 무섭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뱀 같았다.

남자가 침을 묻혀 정진영의 얼굴을 문질렀다.

더러워.

얼굴이 찌푸릴 뻔 했지만 억지로 참으며 고개를 숙였다.

남자가 정진영의 손을 잡아 올렸다. 빛에 비추더니 혼잣말처럼 말했다.

“예쁜 손이네. 피부도 하얗고.”

정진영을 데려온 병사가 입을 열었다.

“십인대장님, 어떻습니까?”

십인대장은 대답하는 대신 턱짓으로 탁자를 가리켰다.

“너, 저 그릇 좀 가져와라. 우리 도련님이 배가 고픈 것 같으니까.”

“예.”

병사가 씩씩하게 대답하더니 얼른 스튜 그릇을 가져왔다.

십인 대장이 빙긋 웃으며 그릇을 내밀었다. 오목한 그릇에 고기조각으로 보이는 것이 둥둥 떠 있었다.

“도련님, 힘들었구나. 이제 걱정 마라. 우리에게 맡기면 모두 잘 될 거예요. 어리긴 하지만 가문명 정도는 기억하고 있겠지?”

정진영이 고개를 젓자, 히죽 웃으며 그릇을 내밀었다.

“배고프겠네. 자, 한 입 먹을까?”

“···.”

어제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 뒤로 먹은 거라곤 약간의 물과 딱딱한 빵을 핥은 것뿐이었다.

배고프다.

엄청나게 배가 고팠다.

정진영은 접시를 두 손으로 잡고 허겁지겁 입에 흘려넣었다.

숟가락이 없어요, 따위의 사치스러운 생각은 나지도 않았다.

뒤가 어떻게 되든 일단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게 중요한 거다.

거의 다 먹었을 때, 십인대장이 다시 물었다.

“자, 도련님, 이제 배도 슬슬 찼을 거고, 조금 이야기를 해볼까?”

“···.”

그릇을 바닥에 내려놓고 두려운 척, 아니, 척이라기보다는 실제로 두렵구나.

어쨌든 정진영은 얌전히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서서 최대한 아이처럼 보이려고 노력했다.

십인대장이 뱀같은 눈초리에 웃음을 싣고 입을 열었다.

“우리는 무서운 사람이 아니에요. 뭐, 조금 나쁜 행동을 하기는 했지만서도.”

십인대장이 거짓말 냄새 풀풀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귀족 도련님들은 따로 좋은 장소에 보내주고 있는 거지. 거기에 가면 과자도 있고, 저렇게 멀건 스튜보다 훨씬 맛있는 게 있어요. 도련님도 과자 같은 거 좋아하겠지?”

다정하게 설득하는 목소리였다.

진짜 아이라면 홀딱 넘어가서 나발나발 다 말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자, 도련님 이름은 뭐? 아버지 이름은?”

정진영은 침을 꿀꺽 삼키며 머리를 저었다.

“나, 나, 도련님 아니에여. 엄마가 성 하인이라···성에 있었어여.”

“···.”

십인대장이 살피는 것처럼 정진영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정진영은 시선을 살짝 피하고 몸을 약간 움츠렸다.

십인대장이 정진영의 손을 잡아 햇빛에 비춘다.

그리고 부드럽게 웃는다.

“이렇게 예쁘게 손톱을 다듬은 거 보면 필시 고급 하인이었겠지. 엄마는 어떤 일을 했지?”

네 살 짜리였다면 이런 질문에는 정직하게밖에 대답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진영은 하인이 할 만한 일을 떠올리며 대강 늘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너무 자세하지 않도록, 아이가 말할 법한 정도만 이야기한다.

“엄마, 빨래하고, 여자들하고 같이 일했어여. 어···침대도 깨끗하게···음···.”

주절주절 말하자 십인대장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 불쑥 물었다.

“아, 도련님 이름은? 이름이 뭐라고 했지?”

“···루디.”

네 살 짜리 아이였다면 절대로 진짜 이름을 댔을 거다.

정진영도 습관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댈 뻔했다.

그러지 않고 곧바로 루디라는 이름이 튀어나온 건 항상 입에 붙어 있는 단어기 때문이다.

루디는 전생에 기르던 고양이 이름이었다.

처음에는 진영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려고 했지만, 유모가 코레안 왕조의 것이냐고 물은 뒤로 생각을 바꿨다.

가급적 흔하고 평이한 이름이 좋다. 주목받지 않는, 평민 같은 이름.

전생의 고양이가 냥순이나 얼룩이 같은 이름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십인대장이 벌떡 일어섰다.

“쳇!  이 녀석은 귀족이 아니야.”

십인대장이 혀를 찼다.

“모습이 그럴싸해서 좀 기대했는데, 꽝이다. 여섯 일곱 살만 해도 거짓말이 아닐까 의심해보겠지만···”

십인대장이 힐끔 정진영을 내려다보았다.

“거짓말하기에도 너무 어리군. 이 녀석은 노예상에 넘겨 둬라.”

병사가 주저하면서 말했다.

“저, 하지만 너무 어려서 받아주지 않을 텐데요.”

“노예상이 거절하면 뭐, 제국으로 보내는 숫자 채우기라고 대답해둬.”

“예, 알겠습니다.”

병사가 꾸벅 고개를 숙이자, 십인대장이 히죽 웃었다.

“그 아이는 너희 둘 몫이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대장!”

병사들이 신나게 대답하고 방을 나섰다.

정진영도 함께 밖으로 나갔다.

올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병사들이 걷는다.

속절없이 끌려가면서, 정진영의 몸이 자기도 모르게 떨렸다.

일단 살아나기는 했는데, 앞으로는 어떻게 되는 걸까.

광장을 막 지나가 골목으로 들어갈 때였다.

광장 구석에 십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소년이 묶여 있는 게 보였다.

노란색의 긴 머리카락은 쥐가 물어 뜯은 것처럼 곳곳이 잘라져 있었다.

소년은 화려한 금실이 장식된 옷을 입고 있었다. 목부분에 화려한 접시처럼 생긴 프릴이 나와 있다.

하지만 본래 화려했던 의상에는 오물이 잔뜩 묻어 있었다.

정진영을 끌고 가던 병사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아, 저놈은 너희 나라의 귀족님이시다. 저 귀족 도련님은 내일 이곳에서 돌에 맞아 죽는 걸로 결정됐지. 너는 운이 좋구나.”

“···.”

정진영은 질질 끌려가면서 몇번이나 소년에게 시선을 주었다.

지나가던 병사가 이유 없이 소년을 발로 차며 욕을 퍼부었다.

소년은 더 이상 애원할 기운도 없는지 가만히 엎드려 부들부들 떨기만 할 뿐이었다.

병사가 정진영을 끌고 간 장소는 외벽의 성문 밖이었다.

성문 밖에는 커다란 천막이 여러 개 서 있었다.

병사들은 정진영을 그중 가장 작은 천막으로 끌고 갔다.

발소리를 들었던 건지, 아니면 누군가 기별을 한 건지, 병사가 가까이 가자 천막 안에서 남자가 한 명 나왔다.

4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단정한 모습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야비한 느낌을 주는 남자였다.

아마 그가 노예상인 모양이다.

병사들이 노예상에게 정진영을 쭉 내밀었다.

“이봐, 한 놈 데려왔다.”

“곤란합니다, 병사님!”

노예상이 얼굴을 찌푸리며 과장되게 한숨을 쉬었다.

“이런 어린 아이를 어쩌라고···. 이런 아이는 돈이 되기는커녕 밥만 축내다 그냥 죽어버려요.”

“그런 소리 하지 말고! 십인 대장이 허락한 거야.”

“하지만 지난 번에도 다 죽어가는 여자를 데려오셨잖습니까. 그 여자도 이틀 뒤에 죽어버렸어요. 이러면 저희가 너무 손해를···.”

“아, 진짜! 십인대장이 허락한 일이라니까 그러네. 경매에 내놨다가 안 팔리면 제국에 넘기라고 하셨다구.”

옆에 있던 병사도 그 말을 거들었다.

“어차피 제국에 보낼 포로가 모자라니 이런 놈으로라도 숫자를 채워야지.”

노예상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더 이상은 곤란해요.”

“알았어, 알았어.”

노예상은 싫은 듯한 표정으로 천막안으로 들어갔다가 작은 나무 조각을 들고 나왔다.

손가락보다 약간 작다.

거기에는 작대기가 세 개 그어져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병사가 나무 조각에 그려진 줄을 보고 투덜거렸다.

“뭐야, 제일 싼 거잖아. 최소한 작대기 둘은 줘야지.”

“그건 정말 곤란해요. 이런 아이는 하품도 안되는데, 이번만 특별히 드리는 거예요.”

“정말 짠내 나는구만.”

병사들이 투덜거렸지만 노예상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병사들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나무조각을 챙겨 돌아갔다.

노예상이 정진영의 턱을 잡고 얼굴을 위로 향했다.

햇빛에 그의 얼굴을 이모저모 비춰보더니 중얼거렸다.

“뭐, 경매에 한 번 내놔볼 만은 한데. 너무 어리군. 두 살 정도만 많았으면 좋았을 텐데.”

“···.”

아무래도 앞으로는 노예가 될 것 같다.

앞날이 캄캄하다.

< 노예상에 팔렸다(주인공이름; 정진영 = 루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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