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물고 물리는 싸움(9)
'몇가지 준비를 해야겠다.'
'또 말인가? 연합이 언제 또 쳐들어 올지 모르는데. 심지어 놈들은 우리 본진의 위치도 알고 있는 놈들이다.'
'그렇게 큰 준비도 아니야. 몇명만 있으면 돼.'
나는 리하르트에게 몇가지를 새로 지시했다. 그는 갑작스러운 지시에 놀란듯 보였지만 강행시켰다.
'대체 뭘 어쩌려고 그러지?'
'계속되는 전쟁을 위한 밑작업.'
아마 이브는 못할 것이다. 아직 이브는 혼자서 완벽한 타인을 연기할 정도의 자아를 갖추지 못했으니까. 그건 사실 나도 마찬가지다. 숙련된 배우라도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처음부터 완전한 타인이라면 어떨까.
"부르셨다고요?"
곧 내가 호출한 몇몇이 게이트를 넘어 리하르트가 있는 마계의 본진으로 넘어왔다.
가면을 벗은 오윤아, 그리고 뒤에 시립한 상위종들은 오윤아의 유닛인 청산족 출신들이었다.
'한가지 해결해줘야 할 일이 있어.'
"어떤 일이죠?"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대놓고 하는 공작이지.'
나는 쓰게 웃으며 그녀에게 임무를 알려주었다. 이브의 말대로, 지금 우리 군단은 생물체가 이룰 수 있는 극한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 이상 표본을 수집하고 몸을 개조하고 진화하는건 무의미하니 다른 방향으로 비틀어 진화하고 성장한다.
마치 과거 이브가 파멸균과의 싸움에서 자신의 능력과 지식을 한계의 한계까지 쥐어 짜 승리를 거둔 때처럼.
치졸하고 더러워도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결국 중요한건 살아남는거니까, 나는 대의를 우선하기로 결정했다.
'지금부터 너희는 얼굴을 바꿔가며 연맹과 카사라스의 전장에서 활동해줘. 인간의 모습으로는 용맹히 연맹의 적에 맞서는 의용군으로, 카사라스의 모습으로는 기존의 시스템에서 벗어난 정체불명의 유랑자 집단으로.'
자세한 설정을 부여해 주었다. 모두 지금 내가 몸을 이끌고 직접 활동하고 있는 연맹의 정보나, 이브가 습득한 카사라스의 정보를 엿듣고 알아낸 정보들이었다.
"대, 대체 그런 짓을 해서 뭘 하시려고요? 아! 이이제이?"
'그럴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지.'
나는 탄식하는 오윤아의 모습에 희미하게 웃었다. 내 의도대로 두 집단을 움직이게 만드는 일종의 핫라인을 만드는 과정이 될수도 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브도 함부로 어느 한쪽을 전면적으로 침범하기 힘들어질수도 있다. 무너뜨리기 직전일 때 내가 반대편을 움직일테니까.
"저도, 한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나요."
그때 오윤아가 내게 먼저 말을 꺼냈다.
'들어보고.'
"정복할 세상을 하나 추천드리려 하는데."
'청산족의 고향?'
나는 그녀의 의도를 바로 알아차렸다. 애초에 처음부터 말이 나왔던게 그것들이니 모르기도 힘들다.
'게임은 마지막 페이즈에 접어들었고, 유닛들은 더 이상 서로를 죽이지 않아도 돼.'
"그들은, 복수를 원해요."
그녀도 어딘가 착잡하다는 반응이었으나, 청산족 출신들은 달랐다. 오윤아가 혼수상태던 사이 번성하던 그들은 다른 유닛들의 공격을 받아 모든걸 잃고 가까스로 살아남았다던가. 군단의 상위종이 되어 무수한 경험을 쌓은 그들은 평범한 상위종 이상으로 강해졌다.
그들은 그렇게 쌓은 강함으로, 복수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태우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가용 가능한 병력이...'
'생산은 계속 하고 있잖아.'
보급관인 리하르트는 비효율적으로 소모되는 자원을 거의 이브만큼이나 싫어했지만, 나는 오윤아의 제안을 받아주기로 결정했다.
내가, 나의 군단이 가진 강점이 바로 이것이니까. 이브는 몇 가지지 못한, 자율적으로 성장과 사고가 가능한 서브마인드들.
강도연과 같은 사례도 있는 이상 투자 가치는 충분했다. 우리 군단이 마계 다음으로 손뻗치는 순간이었다.
'심지어 그들은 아직 연합과 접촉하지도 못한 것으로 보이니 최대한 빨리 충분한 병력을 투입, 일을 끝내지.'
"감사합니다."
'그러니 그곳은 걱정 말고 임무에 집중해. 너희가 우선적으로 해줄일은 카사라스 지원이다.'
나는 자세한 내용과 모든 데이터를 군체의식을 통해 그들의 뇌리에 전송했다. 전체적인 내용은, 지금 이브의 맹공과 연맹의 반격으로 큰 위기에 빠진 카사라스를 지원하라는 것이었다.
*
"이게, 이게 말이..."
"지원이 더 필요하다. 지금 자랑스러운 우리의 고향인 로나스가 함락당하게 생겼다!"
어지러운 현장. 라스는 주변 카르코스들이 고함을 치는 와중에 반쯤 멘탈이 나간채 자리에 앉아있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틀어진건가.'
아군이 당하던가 말던가. 그는 지금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연맹에 침투시킨 자신의 모든 유닛들, 마치 알고 있다는 듯 모두 상대의 저격에 당했다.
이제 그의 정보망에 연맹 내부는 포함되지 않는다. 애초에 유닛들의 정보가 팔린거면 자신의 목숨마저 위험했다.
'카테고리 Z!! 이놈들은 유닛이 분명하다. 그리고 놈들이 유닛이라면, 단일세력으로 이정도의 규모를 갖춘 저 괴물들은 필연 모두를 죽이려 드는 현 순위 1위일 것이다.'
책상을 쾅 내리친 그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쉴새없이 반짝반짝이는 저 수많은 별들은 별이 아니었다.
모두 적이거나 적과 전투하는 아군의 함선이었다.
이브가 끌어모은 군단의 전 함대 병력이 몰려온 만큼 이미 이 행성 로제스의 하늘은 군단의 요새, 함선체와 비행종들로 빼곡했다.
"지금까지 몇이나 관측되었더냐."
"지상에 쏟아지고 있는 놈들의 숫자는 집계된 것만 4,155,708,087 개체. 이중 처리한 놈들만 절반 이상이지만, 놈들의 숫자에 끝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대로 지속되면, 이곳 로나스는 명운이 다한다."
라스의 곁에 있던 원로 타나스가 기사의 보고를 받고 어두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늘만 적들이 가득한게 아니었다. 끝끝내 상륙에 성공한 군단병들은 게이트를 열어젖혔고, 그곳을 공격하지 못하는 사이 마치 밀려오는 바닷물처럼 끝도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결단을 내려야 하오. 놈들은 행성 내부의 에너지마저 파먹는 끔찍한, 악성 종양과 마찬가지인 놈들이오. 만약 우리가 행성 코어에 제어장치를 심지 않았다면 이 로나스마저 놈들의 양분이 되어 우리를 공격했을 것이니."
타나스는 의결권을 가지고 있는 지도층인 카르코스들을 설득했다.
지금 이브는 그들의 완벽에 가까운 행성통제로 둥지 침식이 통하지 않아 살짝 당황한 상태지만, 결국은 당황일 뿐이다. 어차피 이브에겐 리하르트식 행성침식보다는 막무가내로 밀어붙여 행성 위 지배종들을 먼저 싹 쓸어버리는게 더 익숙했으니까.
"...의견에 동의하오. 하지만 책임 소재는 명확히 해야 할 것이오."
"유일한 희망은 지금 인간놈들과의 전선에 나가있는 본대가 귀환하는 것이오! 그렇지 못한다면! 당연히 가장 큰 목소리를 내던 이는 책임을 져야 하겠지!"
다른 카르코스들도 타나스의 의견에 동의했으나, 그 대부분이 누군가를 강력히 탄핵할 것을 바라고 있었다.
라스는 그들을 보며 이를 갈았다. 자신의 의견에 동조할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자신을 성토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라스는 목소리를 높일 근거와 힘이 없었다. 가장 강력한 패였던 연맹 내부의 정보책들도 모두 잃은 상태였다.
"...괴물놈들의 힘이 이정도일 줄은 몰랐던 우리의 방심이오."
라스를 비호하지 못한 타나스는 혀를 차며 밖을 내다 보았다. 이브가 진심을 담은 군단의 물결이 이 행성을 조금씩 뒤덮고 있다.
검은 뇌전의 폭풍을 몰고 다니며 미쳐 날뛰는 차지연을 비롯, 이브의 휘하로 들어간 서브마인드들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수억번 이상의 반복으로 완벽히 최적화된 생산공정과 대륙 사이즈의 뇌를 이용한 이브의 초지능이 합쳐진 완벽한 매크로 운영.
다양한 병종의 군단병들이 조합되어 엄청난 숫자로 몰려오면 도저히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
"멸절탄을 준비하라!"
결국 내린 최후의 방법이 이것.
패배를 인정하고 자기들의 본성에, 그동안 금기로 여기고 사용하지 않던 행성 파괴급 병기를 터트리는 것이었다.
"어서 철수한다. 철수!"
폭탄을 터트리기 전 대대적인 철수가 함께 이어졌다. 타나스는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타나스님."
"책임, 져야지."
라스가 흔들리는 목소리로 말했으나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어서 가게."
"하지만...땅이다!"
그리나 라스가 그를 설득하려던 그 순간, 거대한 진동과 함께 건물 전체가 뒤흔들렸다.
무언인지 감지한 그들이 빠르게 무너지는 건물에서 황급히 몸을 띄워올렸다.
"이 괴물놈들이..."
라스의 얼굴이 구겨졌다. 땅을 부수고 건물을 갈아버리며 땅에서 튀어나온 것은 단단한 갑각으로 몸을 감싼 거대한 지저생물 데스웜.
쩍 벌어진 입에서 번득이는 수많은 이빨들이, 공중에 떠오른 그들을 삼키기 위해 치솟았다.
'늦었다.'
라스는 삼켜지기 직전인 타나스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그대로 삼켜지기 직전.
"무슨!"
누군가가 나타나, 한줄기 섬광이되어 데스웜의 몸을 반으로 갈라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