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진정한 군단(5)
"으하핫! 이상한 수작질에도 결국 한계는 있을텐데, 한번에 궤멸시키면 되는 것 아닌가!"
'...'
비록 이브가 다루는 군단병들처럼 즉각적인 임기응변이나 대처는 불가능하지만, 동시다발적으로 작전을 실행하는 능력은 충분하다.
더 많은 데이터와 실험 결과를 원하던 리하르트는 전장을 실시간으로 확인하며 격한 반응을 보였다.
적진 한가운데를 데스웜이 뚫고 나와 대열을 흐트러지게 만든 사이, 놈들이 미처 막지 못한 강도연이 엄청난 에너지와 함께 빼곡하던 해골병들 사이로 낙하했다.
데스웜 이상으로 지면을 울리고 충격파를 터트리는 강력한 일격.
데스웜으로 시작해 연달아 들어간 이 일격으로, 군단병들은 취약한 원거리 포격을 덜 받으며 해골병들과 충돌했다.
[흐...그래. 이정도는 되어야지!]
아스랄드가 웃어대더니 지팡이를 휘둘렀다. 데스웜의 몸통을 관통한 파멸적인 위력의 광선이 그 거체를 결국 반으로 잘라버렸다.
동시에 해골병들 사이사이에 있던 수만마리 해골마법사들이 일제히 마법을 폭격했다. 하늘을 가로질러 달려드는 군단병들에게 우박처럼 쏟아지는 푸른 화염구들. 짧은 사거리가 문제지 화력은 충분하다.
하지만 이번엔 군단병들도 적절한 지원을 받고 있었다.
땅과 하늘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배치되어 있던 상위종들이 동시에 멈춰서더니, 조금의 오차도 없는 시간과 동작으로 일제히 자신들의 베리어를 최대한으로 공명시켰다.
'다중결합마법ㆍ중첩공명식ㆍ전방 방어막'
중심에서 모든 출력을 끌어올린 오윤아가 이 진법의 핵이 되어, 이미 레이나가 오래전 완성시켜 둔 군단식 공명 마법을 시전했다.
비록 모든 포격을 막지는 못하더라도, 절반 이상의 포격이 하늘에 여러개 펼쳐진 검붉은 방어막에 막혀 지상에 도달하지 못했다.
[마법까지 쓴다라. 아무리 생각해도. 너희를 단순한 짐승무리라고 생각할 수 없다. 왜 말하지 않는거지? 충분한 지능이 있을텐데!]
그 광경을 본 아스랄드가 기가 차서 헛웃음을 터트렸다. 마족인 그의 상식으로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대였으니까.
그리고, 분명 소통이 가능할 지능을 가진 상대가 문답무용의 살육만 반복한다는 것도 믿기지 않았다.
'뭐라는거야 해골바가지가.'
강도연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달려들었다. 일단 전혀 알아들을 수도 없었거니와, 그녀에게 마족과 대화한다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없었다. 애초에 자신 휘하의 군단병들에게 상대와 소통하는걸 금지시킨건 신우도 마찬가지였다.
[크,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
아스랄드는 단신으로는 강도연을 밀어낼 수 없다고 판단해 빠르게 검기를 다루는 해골기사들을 불러들여 그녀를 막게했다.
제아무리 강도연이라도 수십마리가 동시에 껌딱지처럼 들러 붙는걸 단숨에 깨버릴 순 없었으나, 초단위로 한때 대륙의 기사단장급 실력을 가진 고위급 해골기사들이 그녀의 손과 날개에 박살나고 있었다.
'저 수정구, 이번에도 역시나.'
그 격렬한 전장의 한가운데에서 강도연은 가면 너머로, 아스랄드의 한쪽 손에 들려 있는 수정구를 노려보았다.
[역시 이 세계의 신비로운 귀물인 이것을 노리느냐. 이번에는 방심하지 않는다. 극과 극은 결국 통한다던가. 이 신묘한 수정구 역시 너희들 처럼 집단의 힘을 공명시켜 극대화 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그녀의 시선을 눈치 챈 그가 히죽 웃었다.
지금 성공적인 기습으로 사방에서 덮쳐드는데 성공한 군단병들이 단숨에 적들을 짓밟지 못하는 것도, 저 수정구가 해골병들의 마력을 공명시켜 말도 안 되게 강화하고 있는 탓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게 전부가 아니다]
아스랄드가 다시 한번 땅을 찍었다. 퍼져나간 그의 마력이 전장에 즐비한 시체들을 자신의 충성스런 부하들로 다시 한번 일으켰다.
"아, 역시 그렇게 나오는군."
둥지에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리하르트가 코웃음을 쳤다. 해골병들의 거센 저항에 쓰러졌던 군단병들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분명, 대규모 군단이 서로 맞붙은 이 전장의 상황을 단번에 뒤바꿀 강력한 한수였다.
'대응 방법은 없나?'
"원리는 파악하는데 성공했다. 마법도 결국은 하나의 프로세스, 형상력을 스며들게 만들어 강제적으로 몸을 움직이게 만드는 '명령어'나 마찬가지다. 이럴 경우를 대비해서 심어둔 감염균들이 있긴한데 형상력에 취약한 감염균들은 강제적으로 스며든 힘에 모두 사멸했다."
리하르트는 빠르게 전장의 상황을 분석했다. 아군의 시체까지 적의 군세로 들어가면 일단 숫자로는 이기기 힘들다.
"남은 방법은 저 '사령술'이라는 마법의 프로세스를 역산하여 구조를 파악하고 해제하는건데 사실상 불가능하다. 프로세스를 구성하는 각종 주문, 즉 코드를 모르니까."
'결국 힘으로 찍어 눌러야 한다고?'
"보고서에도 올렸지만, 결국 가정했던 129가지의 뻔한 경우의 수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러니 대응할 수 있다."
리하르트는 생산을 쉬지 않는 둥지를 조작하고, 새롭게 보내는 후속부대의 명령어를 수정했다.
"그 마력이 무한하지는 않을텐데, 군단장과 싸우면서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내 계산에 따르면 우리는 지금부터 34시간 46분 정도를 버틸 수 있는데."
결국은 소모전으로 귀결된다. 하지만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군단의 특장점은 언제나 소모전이었으며 리하르트가 이브가 자신에 맞춰 발달시켜 온 군단운영시스템 자체를 손보면서 추구한 것도 이 마계라는 행성에 특화된, 이런 소모전의 강점을 늘리는 것이었다.
'숨겨둔 한 수는, 뭐 없나?'
현재 시선에 보이고 있는 아스랄드는 자신의 군대가 조금씩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하자 한껏 기세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
[정말 징글징글하게 많구나!]
계속해서 강도연을 견제하느라 바쁜 아스랄드는 사방에서 몰려 오는 군단병들의 모습에 치를 떨었다.
리하트르의 예측대로 부릴 수 있는 언데드들도 한계가 있어 영원히 숫자를 늘리는건 불가능했다.
[대체...]
그는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계에서 손에 꼽는 마족이었던 그가 보기에도, 자신의 언데드 군단이 이렇게 '처절하게' 싸워 본 경험은 없었다.
언제나 자신의 군단은 죽음의 화신이자 공포의 대상 그 자체였고, 자신을 상대하던 인간들은 크게 두려워 하며 신성의 힘에 기대어 저항하는게 전부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게 반대였다.
돌격병 역할을 맡은 군단의 1번대에 속한, 비틀보다 큰 중형의 대형 거미는 전신을 딱딱한 갑주로 두른채 독니와 앞에 달고 있는 4개의 다리를 마구 휘두르며 전위를 맡은 해골병들을 마구 부숴나갔다.
그 뒤에서는 덤프만한 크기를 가진 1번대 대형종 크롤러가 전위에서 활약하던 해골기사를 몸무게로 찍어눌렀다. 기존에 채굴형 군단병으로 쓰던 마계땅강아지 베이스의 군단병을 개조해 특유의 억센 상체, 4족 보행에 꼬리까지 달게 한 완벽한 돌격병이었다.
지금은 같은 군단병들의 시체를 일으켜 방패삼아 막아내고 있지만, 저 돌격병들을 완전히 막으려면 결국 원거리 화력지원이 필요하다.
하지만 궁수들과 마법사들은 지금 하늘을 가득 채운 수만 마리의 비행종을 막는 것도 벅찼다.
[...]
하늘의 스팅레이가 꼬리에서 사출한 독침이, 아스랄드의 얼굴을 스쳤다.
'생명체가 맞긴 한 것인가? 놈들의 사체에선 혼백이 남긴 생기를 흡수할 수가 없다. 마치 영혼이라는게 존재하지 않는 것 처럼. 그게 가능한가? 분명 심장이 뛰고 피가 흐르는 살아있는 놈들인데!'
저 멀리서 진형을 갖춘 거대한 짐승들의 모습이 보였다.
1번대 스위퍼, 리하르트가 설계한, 심장을 동력기관으로 대체해야지만 몸을 유지할 수 있는 또 다른 초대형종.
기존의 초대형종이 덩치 큰 소의 형태를 하고 있다면, 스위퍼는 거대한 전갈이었다. 집게대신 대신 양 손에 달린 거대한 갑각의 칼날이 좌우로 청소하듯 휘둘러지면 지상의 그 무엇이든 베고 찍어버린다.
곧 대놓고 측면을 우회한 스위퍼들이 일제히 돌격하기 시작했다.
[버티면, 버티면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내, 내가 살아있는 놈들에게 질리가 없다]
아스랄드는 수정구를 움켜쥐었다. 결국 그가 생각한 방법도 버티기, 즉 소모전이었다. 이길 자신은 여전히 있었다.
지금 자신이 상대하는 군단이 한반도보다 큰 땅에서 에너지를 추출하며 수많은 병력을 끝도 없이 쏟아내고 있다는걸 모르니까.
"버티는 것도 우리가 더 잘할 수 있지."
그러나 그때쯤 리하르트가 준비시킨 새로운 병력이 허공에 나타나났다.
"현장 보급 및 안정화를 위해 마련한, 4번대 부유형 보급체 서플라이."
몸 안에 부유기관을 내장한 비행선 크기의 이 거대한 비행종은 마치 거대한 해파리를 닮았다. 갑각에 감싸인 몸체 밑으로 수백개의 촉수를 늘어뜨린 이 해파리는 고도를 낮추더니 자체적으로 가진 비대한 소화기관을 이용해 지상의 시체를 먹어치우며 생성한 양분과 에너지를 현지의 군단병들에게 공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