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진정한 군단(4)
게임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연관된 집단들의 성장은 가속화된다. 군단이 처음에는 각종 생물종들을 흡수하여 진화하고, 그 다음에는 각종 학문과 시스템등을 흡수하여 또다시 진화하는 것과 같다.
결국에는 게임에 참여한 플레이어나 유닛의 범주를 넘어선 기존 세력간의 치열한 경쟁과 성장까지 가속화되었다. 애초에 그것이 게임의 진정한 의도였고, 예정된 흐름이었다.
[예상치 못한 전혀 다른 방향으로 성장할 수도 있지.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변수.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결과를 뒤틀어 버릴 수 있는 변수가]
"저 해골바가지의 성장도 그런 것이라고?"
메시지를 본 신우가 자신의 화면에 보이는 해골을 보며 말했다.
그걸 지켜보던 그는 잠시 멈칫했다. 과연 신우에게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생각하기 위해서.
'어차피 비틀리기 시작했다. 이제 한치 앞도 몰라. 이브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는 미래는 이제 없다.'
그가 변수에 집착하는건 당연했다. 그것이 유일한 희망이었으니까. 실제로 그 변수는 지금 잘 구르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 이들은 물론 이브까지 한단계 더 성장시킬 수 있을거라 믿었다. 이브는 적이 강해지면 그만큼 더 강해질 수 있으니까.
[이제 확실한건 아무것도 없다. 넌 그것만 알고 있어라]
가면을 만지작 거린 그는 결국 이 한마디만 전하게 되었다. 신우의 눈빛이 묘하게 바뀌었다. 이미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는 이상, 못알아 들을리 없으니까.
[저 해골이 부리는 놈의 군단과 싸울 셈인가?]
"우리가 애써 피해도 저쪽에서 먼저 올게 뻔해."
그는 어차피 원론적인 이야기 밖에 못할 주제에서 화제를 돌렸다.
본래 계획은 병력을 보충하고 일대를 장악하며 근방의 마족세력을 치는 것. 하지만 칼타스가 파견한 아스랄드라는 변수가 새롭게 등장하여 계획을 어그러뜨리고 있었다.
"계획을 바꾸자. 놈을 먼저 잡는게 맞는 것 같아. 놈은 혼자서 단숨에 언데드 군단을 소환해 부릴 수 있는 존재...그 기동력은 우리도 따라잡기 벅차."
신우는 아스랄드의 강점을 알아보았다. 군단마저 가지지 못한 강점이었다.
대규모의 병력은 그 규모 때문에 은밀한 행동이 불가능하는 등 약점이 잡히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자신의 마력과 땅에서 순식간에 병사들을 일으키는 아스랄드의 능력은 반드시 경계해야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 놈을 공격하면 조금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까 싶은데."
"상관없지. 어차피 우리는 그 어떤 아군도 만들지 않을거니까."
리하르트의 의문에 신우가 고개를 저었다. 그 말대로 군단은 태생부터가 다른 생물과 공존이 불가능한 존재였다.
무엇보다 마계 자체를 먹어치울 생각이었으니까. 어차피 지구연합군은 이곳에 온 정복군일 뿐이었다. 쫓아내기만 하면 된다는 소리였다.
"군단병들을 동원해. 놈과 맞붙는다."
직전에 지구연합군의 주둔지 하나를 밀어버린 신우는 이번에는 마족들을 향한 전쟁을 선포했다. 어느 정도 덩치를 키운 지금, 주위 눈치 볼 필요도 없다는 강한 자신감이 그 바탕이었다.
"이번엔 전력을 다해야겠지."
히죽 웃은 리하르트가 전역에 흩어져 정찰 및 사냥활동을 하던 군단병들을 불러모으는 한편 둥지의 생산량도 배로 늘렸다.
수십만에 달하는 크고 작은 생명체들이 일제히 땅을 가로지르는 모습은 분명 장관이었다.
"가자."
휴식하던 강도연도 오윤아를 비롯한 상위종들을 이끌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어느새 수십개로 늘린 화면을 통해 이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
'본래보다 그 결속이 훨씬 강해지기 시작한 연합군과 더붙어, 어쩌면 정말로 미래를 통제할 완벽한 크랙의 역할을 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계는 분명 과거 군단이 점령한 에덴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친 세상이었다. 그런 곳에서 점차 세력을 넓혀가는 하이브마인드 신우의 군단에게서 그는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
"어쩌면 이제 인간놈들도 알아차렸을지도. 저 괴물들이, 자기들은 물론 우리까지 먹어치우려는 미친 괴물들이라는 것을."
"그럼 문제되는 것 아니오?"
칼타스의 말에, 마침 곁에 있던 놀들의 왕은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본인의 의도는 아니었다. 플레이어인 연합의 간부, 렉스의 말을 그대로 전한 것 뿐이었다.
"그, 놈들이 그 괴물들을 이용하려 할 수도 있잖소."
"당장에 놈들이 인간놈들의 기지 하나를 날려버린게 바로 직전이다. 감히 그럴 수 있을까. 오히려 지금 상황이 굉장히 애매해졌다."
조심스레 전하는 그의 말에 칼타스는 고개를 저었다. 군단이 등장하고 세력을 키워가는 타이밍이 너무 절묘했다.
지구연합군과 마계가 한창 대치하고 있을 때 등장한 덕에, 초장에 밟아버리는데 실패했다. 그리고 그 뒤로는 급격히 성장해버려 이제 견제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단순히 아스랄드의 행동에 자극을 받은건지, 아니면 철저히 계산된 행동인지."
게다가 직전에 지구연합군을 공격하고, 곧바로 움직여 마찬가지로 연합군을 공격한 아스랄드의 언데드 군단과 충돌하려는게 기막힌 한수였다.
지구연합군은 정비도 할겸 자신들의 적을 대신 공격하는 군단을 내버려 둘 확률이 컸다. 여차하면 상처입고 승리한 쪽을 공격하면 되니까.
"게다가 그놈들, 지금 우주에 퍼진 놈들과 조금 다르오. 우리 내부에선 마계의 환경에 맞춘 변종이 발생한 것 아닌가 하고 크게 경계하고 있소. 놈들의 진화 속도는 상상을 초월하는데, 마침내 거기에 각 행성 맞춤의 변종들까지 등장하면."
"그래서, 내가 연합의 강화를 요구한 것 아닌가. 우리는 각자의 우물을 탈출한 이 신시대에 맞추어 완전히 하나로 뭉쳐 대응해야 하니까."
칼타스가 놀들의 왕을 노려보았다. 정확히는 그 뒤에 있는 렉스, 아니 그보다도 뒤에 있는 우주세력의 총통 미하일에게.
"각하."
"이미 시행하고 있다고 전하게. 우리는 연합에 참여한 다양한 종족 및 세력들과 정식으로 조약을 맺고, 서로의 힘을 공유하며 단결하기로. 하나의 적을 위해서 말이네."
렉스의 곁에 있던 미하일은 칼타스에게 말을 전했다. 실제로 그는 이미 칼타스의 주장에 동조하고 활동을 시작했다.
"그것으로 충분한가?"
"...지독한 전쟁의 시작. 한번 해봐야지."
미하일이 히죽 웃었다. 마계에 있는 새로운 군단은 사실 이제서야 첫발자국을 내디딘 셈이었다.
하지만 지금 연합군이 상대해야 하는 이브의 본대는 아니었다.
4개의 행성 전체를 완전히 자신의 둥지로 삼은 이브의 본대가 가진 폭발력과 생산력은 이제서야 귀퉁이를 먹어치운 이들과는 격이 달랐다.
"놈들은 끊임 없이 진화하고 강해진다. 그걸 알아야 한다."
미하일의 말을 끝으로 통신은 종료되었다. 칼타스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어, 어딜 가는..."
"네놈도 이제 돌아가라. 나는 볼 일이 있으니."
놀들의 왕을 내쫓듯 내보낸 칼타스가 향한 곳은 또다시 마왕성 지하였다. 적들을 인정하고, 더 큰 손해를 입기 전에 적절한 전력의 증강이 필요하다 판단한 것이었다.
손가락을 튕긴 그의 얼굴 옆에 스르륵 떠오른 화면에선, 지금 서로를 향해 달려가는 전투 직전인 두 거대 세력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명체의 시체를 자신의 부하로 부릴 수 있는 아스랄드가 질리가 없다. 하지만 저놈들이라면 모른다.'
아스랄드가 지구 연합군과, 군단병들의 시체로 이루어진 시체 군단을 이끌고 황무지를 횡단하고 있었다.
그 반대편에서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괴물들이 흙먼지를 날리며 망설임 없이 달려오는 중이었다.
[모습들이 많이 바뀌었군...하지만 이미 파훼한지 오래다. 너희의 병사는 곧 나의 병사로 다시 일어나 싸운다!]
화면 속 아스랄드가 분노에 찬 고함을 터트렸다.
그런 아스랄드를 향해 똑바로 직행하고 있는건, 하늘을 가득 채운 수많은 비행종들과 함께 하늘을 가로지르는 4장의 검은 날개였다.
[결국은 살아 숨쉬는 생물. 죽음 앞에 자유 없으라]
거리가 어느 정도 근접했을 때, 초대형종의 시체 위에 거만하게 앉아 진격하던 아스랄드는 안광을 태우며 마력을 움직였다.
그 순간 일대가 뒤흔들리더니 지금 돌진하는 수만의 시체 군단 곁으로 어마어마한 숫자의 해골병들이 몸을 일으켰다.
숫자는 분명 지금 땅과 하늘에서 사방으로 퍼져서 몰려오는 군단병들이 더 많았으나, 계속해서 돌격하는 아스랄드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자신의 부하들은 계속해서 늘어날테니까.
[하! 또 그것인가!]
한손엔 다시 가져 온 이 특별한 수정구를, 다른 손엔 지팡이를 든 그는 출력을 최대로 올리고 이곳을 향해 하나의 창이 되어 돌진하는 강도연을 보고 비웃었다.
함선도 떨구는 위력이지만, 막아낼 자신이 있었다.
[...이건 뭐지]
그러나 그 순간. 그는 일순간 쩍쩍 갈라지며 지진이라도 난듯 요동치는 땅에 당황했다.
그리고 들썩이던 땅이 이내 대규모로 터져나왔다. 수십톤의 무게를 가진 초대형종마저 기우뚱 거리며 넘어질 정도의 충격. 그 위에 있던 아스랄드는 가까스로 몸을 하늘로 띄워 올렸다.
이 일격만으로 짓밟히고 박살난 병력이 수천이 넘었다.
[어떻게]
당황한 아스랄드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군단의 병종, 6번대 초대형종 데스웜. 기존의 데스웜을 거의 그대로 가져 온 마계 토착생물 베이스인 이 거대 생물이 어느새 그의 옆에서 수많은 억세고 거대한 이빨이 돋은 입을 쩍 벌리고 바위를 부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