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화 (3) >
부스럭···
침대에서 일어난 오소리는 화장대에 앉아 가만히 얼굴을 쓸어내렸다. 열이 남았는지 입술이며 볼이며 가을 단풍처럼 온통 붉게 피었다.
‘아닌데가, 아닌데?’
그 목소리, 그 눈빛, 그 손길.
눈앞에서 그 세 가지를 마주친 순간 오소리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걸.
“일어났어?”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더니, 오명숙이 성큼 다가와 그녀의 이마에 손을 드리웠다. 미지근한 것 같기도 하고. 뜨거운 것 같기도 하고. 중얼중얼.
“열이 내린 건가? 괜찮아?”
“응 괜찮아.”
“배고프지? 죽 갖다 줄게.”
“이따 먹을게.”
오소리는 침대 옆 선반에 놓인 대본을 손에 집었다.
펼쳐 든 대본에는 깨알같이 적힌 글씨들이 가득했다.
“그럼 먹고 싶으면 말해. 데워줄게.”
신신당부하고 방을 나온 오명숙은 일단 안도의 숨부터 내쉬었다. 그런 뒤 또 걱정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오소리가 이래저래 딴생각에 빠진 것 같아서 걱정이었는데, 급기야 감기몸살까지.
“하······.”
다시 한숨 뒤에 테이블에 앉았다.
노트북 화면에 수포 카페의 메인 화면이 걸려 있다.
‘우리 수포들 미안하다.’
수포 회원의 한 사람으로서 이시현의 연애는 원치 않지만.
‘상대가 우리 소리라면··· 크.’
이 또한 받아들일 운명.
결심하고 일어선 그녀는 선반에서 꿀에 절인 도라지가 담긴 유리병을 꺼냈다.
따뜻한 물에 타는 이때. 초인종 소리가 적막을 흔들었다.
인터폰을 보니 눈꼬리가 날카로운 여자가 현관 앞에 서 있다.
“선생님 오셨어요?”
오소리의 연기를 봐주고 있는 권현옥 선생님.
과일 바구니가 앞으로 슥 나온다.
“소리 아프다며?”
“뭘 이런 걸 사와요.”
“소리 자?”
“아니요 일어났어요. 들어가 보세요.”
챙 넓은 모자를 벗고, 권현옥은 사뿐사뿐 걸음으로 방으로 향했다.
“소리야, 자니?”
안에 들어갔는데. 오소리가 대본을 쥐고 흐느껴 울고 있는 게 아닌가.
“소리야 왜 그래?”
“이 씬이 너무 슬퍼서.”
“무슨 씬?”
놀란 권현옥이 대본을 빼앗듯 가져갔다.
주인공 성수가 이혜리의 주변을 맴도는 씬.
남모르게 주위를 맴돌면서, 지켜주고 바라봐주는, 그 시선을 몰랐던 이혜리는 나중에야 알고서 깨닫게 된다. 그동안 자신이 쓸쓸한 혼자가 아니었음을. 그가 항상 곁에 있었음을.
“소리야.”
눈은 충혈되고, 입술은 파르르 떨고, 콧물까지 훌쩍거리고.
권현옥이 오소리를 달래는 동안 오명숙은 밖으로 나와 거실 달력 앞에 섰다.
‘내일이 토요일.’
오소리가 이시현에게 주말에 대본리딩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근데 아직 답이 없고.
‘안 되겠어. 약속을 잡아야지.’
전화기를 손에 쥐고, 번호를 꾹꾹 누른다.
**
-저기··· 남수혁 전화번호 맞아요?
소곤소곤 목소리에 남수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가끔 있는 일이다. 번호를 바꿔도 귀신처럼 알아내는 팬들.
“후······.”
일단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전에 같으면 이 상태에서 냅다 고함을 질렀을 거다.
아니야! 남수혁 아니라고! 전화 잘못 걸었다고! 다시 전화하지 말라고! 그냥 하지마!!
“어떻게, 알았어?”
하지만 이번에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묻는다.
연습실 거울에 비친 얼굴에는 따뜻한 미소까지 새겨졌다. 그런 뒤 콧잔등을 긁으며 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데.
-에이. 수혁이 오빠 아니네.
“하하. 나 남수혁이라니까.”
-하. 아저씨가 수혁이 오빠면요, 소리부터 질렀을걸요? 야! 끊으라고! 이렇게요. 에이··· 어디서 노티 나는 목소리로 오빠 흉내를 내고 있어.
“······야?”
전화가 끊겼다.
“대체 내 이미지가 얼마나 똥망이길래.”
어이가 없어서, 남수혁은 연습실 거울을 힘없이 마주 봤다.
“아니 대체 어디서부터 뭘 변하라는 거야?”
입꼬리를 올려보고, 눈도 크게 떠봐도, 어제의 남수혁 오늘의 남수혁이다. 내일도 그대로일 테고. 신경질적으로 콧바람을 내쉬고 대본을 매만졌다.
[미스터 미스터리]
“정말 해보고 싶었는데.”
대충 몇 장 넘기던 남수혁이 움찔했다.
“야, 나 남수혁 맞거든!”
또다시 울린 휴대폰을 받자마자 열 받아서 소리를 빽 질렀다. 그런데 뜻밖의 목소리가 신경질적으로 받아쳤다.
-너 남수혁인 거 알고 전화했거든?
“너 누구야?”
-가수라는 놈이 사람 목소리도 하나 못 알아듣고. 나야 우혁이.
“웬일로 전화했냐?”
누군지 알았으니, 연습실 거울에 등을 기대고 퉁명하게 묻는다.
-너 뭐하냐 요즘에. 정말 계약해지야?
이게 염장 지르려고 전화했나.
“그러는 너희는, 재계약하는 거냐?”
또다시 퉁명하게 물었더니 바로 퉁명한 대답이 들렸다.
-우리도 갈라서.
“진짜?”
예상 밖의 얘기에 당황해서 남수혁은 턱 끝을 북북 긁었다.
이게 사실이라면 대한민국이 들썩일 일이니까.
-내가 이런 거로 농담하겠냐. 어디 가서 얘기하지마. 5월에 발표할 거니까.
진짜인 모양이다.
그런데 특별할 것 있나. 어차피 그쪽이나 이쪽이나.
“뭐하러 전화한 거야?”
-부탁 좀 하려고 전화했어.
“무슨 부탁?”
남수혁은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물었다.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파일철 위에 대본을 툭 던지고.
-곡 좀 줘.
“뭐?”
-니 곡 좀 달라고.
“무슨 곡?”
-니네 2집 때부터 자작곡 수록했잖아. 다음 앨범 것도 있을 거 아니야.
“미친 소리 하네. 끊어!”
**
홍보부서, A&R파트, 기콘부 팀원 전원이 빈자리를 채운다.
서른 명 남짓한 직원들이 갑작스러운 회사의 변화를 콘트롤하기 위해 회의실에 모였다.
“남수혁은 완전히 활동 정지죠?”
“예. 남수혁은 이번 앨범에서도 빠집니다.”
음반사업팀 직원이 손가락 사이 연필을 굴리며 말했다.
“수혁이 이 녀석 반성하는 것 같더니만.”
마케팅팀 직원이 책상 위 손가락을 두드린다.
“다른 애들 자작곡 수록하는 건 문제 없지?”
“예, 문제없는데··· 남수혁이 그래도 애가 재능은 있었는데. 지난번 실었던 자작곡도 나쁘지 않았고요.”
A&R파트 직원은 안타까움에 찌푸린 이마를 긁적였다.
“그때 이후로 계속 작곡하고 있었어?”
“글쎄요. 그건 모르겠네.”
남수혁 관련한 얘기에 시간이 줄줄 샌다. 밖에 쏟아지는 비처럼.
하지만 블랙보이에서 남수혁을 배제한다고 일이 간단히 끝나는 게 아니다. 5인조가 4인조로 바뀐다는 것은 기존의 콘셉트부터 마케팅 방향까지 전부 달라지니까.
“그럼 남수혁 건은 대충 정리됐고. 이제 이시현 얘기하죠.”
서류가 펄럭이는 소리.
마케팅팀에서는 최근 촬영한 이시현 화보와 콘셉트 관련한 출력물을 내놓았고, 음반사업팀은 괜찮은 노래를 추려온 시디를 준비하고, 광고팀은 프로젝터를 켤 준비를 끝냈다.
“지금 최 팀장님 올라오라고 해주실래요?”
홍보부 권 팀장이 회의실 스피커폰에 대고 말했다.
잠시 뒤 최재환이 들어오자 그를 향해 시선이 몰렸다.
호기심, 궁금증, 신기함, 의아함 같은 시선들이 덕지덕지 붙자 최재환이 굵은 목젖을 꿈틀거린다.
“왔어?”
어설픈 미소를 띤 권 팀장과 악수를 하고, 그가 자리에 앉았다.
“그럼······.”
권 팀장은 턱을 쓸어내리며 머뭇거렸다.
시작을 해야 하는데 속 시원하게 얘기를 꺼내기가 어렵다.
앞으로 이시현의 모든 일정과 기획은 최재환이 빠진다. 잔인하지만, 회사는 하루빨리 최재환이라는 존재를 이시현에게서 지워야 한다.
문제는 두 사람이 만들어온 시너지, 그리고 관계.
“제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기다리기 지루했는지 최재환이 검붉은 입을 먼저 열었다.
“하루 만에 이렇게 난리가 날줄은 몰랐는데··· 저 그만둡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시현이는 그대로 있을 거라는 겁니다. 제가 나가도 변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이 하시는 일에 최선을 다해주세요. 그리고 죄송하네요. 저 때문에 일거리만 늘어서.”
짧고 굵게 끝낸다.
구구절절 이유라든지 사정을 얘기할 필요도 없다.
떠난 사람들이 해왔던 걸 다들 봐왔고, 이해하고 있으니까.
궁금한 건 나중에 담배 한 대 피우면서.
“좋아. 일단 미스터 미스터리 OST부터 시작할까?”
권 팀장의 박수가 긴 회의의 시작을 알린다.
**
‘아. 휴대폰을 놓고 왔네.’
1층에서 6층까지. 나는 반복적으로 계단을 오르내렸다.
연습생들이 땀 흘리고 있을 시간이라서 연습실 대신 계단으로 숨었는데, 위에서 일어나는 회의에 대한 생각이 3. 촬영에 대한 생각이 7.
차 대표가 이렇게 서두르는 건 최재환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에둘러서 표현하는 거겠지. 그만큼 기대가 컸을 테니까.
뭐 내가 이것저것 복잡하게 따질 필요는 없을 거다.
오히려 지금은 내가 담담하게 있어야지 최재환이 편한 거다.
하. 모르겠다.
지금은 그냥 이렇게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가면서 대본을 떠올린다.
우연히, 성수는 이혜리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멀리 떨어져서 지켜본다. 그리고 그녀가 과거 자신을 유린한 남자들을 찾아내 관찰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조직폭력배, 기자, 국회의원.
그녀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 셋을 죽이는 것.
처음엔 놀라움과 안도감 같은 것 때문에 그녀를 지켜봤다.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있음을 알았으니 당연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겉으론 밝게 웃는 그녀가 여전히 고통 속에서 살고 있음을 깨달은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게 된다. 그건 바로 용서를 구하는 일.
과거 침묵했던, 그래서 유린당하고, 짓밟히고, 죽은 삶으로 살았던 소녀에게 바치는 속죄.
하지만···
또 다른 것도 깨닫게 된다.
슈퍼에 가는 이혜리의 모습을 보면서.
퇴근길 가로등 밑에서 길고양이를 쓰다듬는 그녀를 보면서.
점심시간 홀로 공원에서 햇살을 맞는 그녀를 보면서.
술 취한 남자가 그녀에게 시비를 거는 모습을 보면서.
덜컹덜컹.
어딘가에서 지하철 소리가 들린다.
소란스러운 사람들은 네온사인이 가득한 거리를 걷는다.
“이거 놔요.”
“아가씨, 우리 한잔하자고.”
“놓으라고요!”
“좋으면서 왜 그래?”
“놓으라니까!”
비틀거리고, 실랑이하고, 이혜리는 술주정뱅이를 힘껏 밀어냈다.
“이 X!”
손을 높이 치켜든 술주정뱅이.
그때 모자를 푹 눌러쓴 성수가 그 앞을 막아섰다.
“대리운전 부르셨죠?”
“너 뭐야?”
“부르셨잖아요? 어디시라고 하셨죠?”
“이 자식이.”
이혜리가 서둘러 떠난다. 등 뒤에서 그녀가 멀어진 것을 느낀 성수는 순간 술주정뱅이를 노려봤다.
“술 처먹었으면··· 곱게 가.”
탁.
나는 계단을 오르던 걸음을 멈췄다.
비가 와서 세상이 어두컴컴하다. 철문 위에 비상등이 깜빡이는 것을 보며 생각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얼마나 계단을 오르내린 걸까.
‘후······.’
지금까지 나를 찾는 사람이 없는 걸 보면 회의가 아직도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휴대폰을 가져올 걸 하고 잠깐 후회하는데, 밖을 보니 외곽 주차장에 들어선 차들이 눈에 들어온다.
외부에서도 온 모양이고, 차 대표의 차도 보이고.
아무래도 최재환이 오늘 정신 좀 나가겠다.
일단 자리를 옮겼다. 차 대표까지 참여할 정도로 중요한 회의면 연습생들은 숙소로 돌려보냈을 테니까.
끼익.
좀 전까지 누가 있었는지 열기가 느껴진다.
땀 냄새도 좀 나고. 향수 냄새도 나네. 연습생이 아니었나? 걔들은 향수 못 뿌리는데. 근데 어디서 맡아본 냄샌데··· 일단 불을 켰더니 바닥에 뭔가가 놓여있는 게 보인다.
“미스터 미스터리?”
대본이 왜 여기에. 그리고 파일철.
손에 집는 순간 안에 담긴 종이가 촤르르··· 떨어졌다.
“악보?”
공부는 하고 있지만 아직 악보만 보고 감 잡을 정도는 아니다.
더구나 오선지도 아니고 그저 콩나물 대가리만 끄적여 그린 수준의 악보였다. 그래서 일단 가사와 제목을 살폈는데.
“오후의··· 빛깔?”
허.
순간 놀라서 헛숨이 나왔다. 적혀 있는 가사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내가 아는 노래가 맞는 것 같다.
‘신기하네.’
이 노래가 유별난 건 아니고. 작곡가가 신원미상의 얼굴 없는 작곡가여서 관심을 가졌던 기억이 있다. 히트작이 꽤 많았지 아마.
나는 악보를 손에 쥐었다.
이게 지에스에 있다는 얘기는, 작곡가가 지에스 소속이었나?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이게 어떻게 시작되더라.”
호흡을 크게 들이쉬고, 천천히 뱉고, 악보를 손에 쥐었다.
“그대의 곁을 따라가면 왠지 외롭지 않아서 늘어진 그림자가 닿을 때면 살짝 미소가 나와서”
가사 때문인지 슈퍼에 가는 이혜리의 옆 모습이 다시 떠오른다.
그 모습을 보면서 성수는 외로움을 덜 수 있었다.
“웅크려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왠지 가슴이 답답해서”
성수는 퇴근길 가로등 밑에서 길고양이를 쓰다듬는 그녀를 볼 때면, 흘러내린 눈물처럼 죄책감이 고여 가슴이 먹먹했다.
“너는 항상 오후의 햇살처럼 있어 줘 약속할게 비가 오지 않게 할게 그 어떤 누구 앞에서도 그 어떤 이유 앞에서도.”
나는 햇살 아래 눈 감고 있는 이혜리를 떠올리며 숨을 토했다.
‘오소리는 괜찮을까. 천상 내일 대본리딩 해야겠네.’
그 생각을 하다가 등 뒤의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언제 들어왔는지 남수혁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근데 왜 저렇게 멍한 얼굴인지.
“뭐라고?”
녀석이 뭐라고 중얼거린다.
“내 노래에··· 무슨 짓을 한 거야?”
< 변화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