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칠거나, 아니면 부드럽거나 (6) >
전화번호부에서 이름 좀 지운다고 이렇게까지 욕이라니.
이러다 이 자식 숨넘어가는 거 아닌가 싶지만··· 어찌 됐든 이런 나를 바라보는 시선들 속에서 한바탕 쏟아진 찰진욕을 실컷 듣고서야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아 그 자식 입 한번 더럽네.”
커피 한 잔 마시며 통화를 엿들은 강 실장이 빈 잔을 내려놓고 혀를 내둘렀다. 반면 무표정해서 더 무서운, 최재환이 한숨 한번 쉬고 얘길 꺼냈다.
“이경이가 그쪽이랑은 말이 통할 거라고 해서 이렇게 마주 앉아 있는 겁니다.”
“··· 예.”
회색 정장 남자가 눈을 들지 못하고 턱만 끄덕인다.
여전히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현실이 아닌 꿈을 꾸고 있는 듯한 얼굴이다.
지난번 음악뱅크 대기실에서 봤을 때나 지금이나 내 눈에는 중고차 딜러처럼 보이는데, 이 양반이 송이경이 KSH 엔터에 몸담고 있을 때 담당 실장이었단다. 그리고 지금은 큐티즈 관리 실장이고.
“난 솔직히 하승진이 왜 이렇게까지 난리인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우리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이쯤하고 끝냈으면 좋겠어요.”
담담한 어투와 달리 최재환의 눈빛은 확고했다.
이건 부탁도, 제안도 아닌 경고라는 시선.
그 따가움에 큐티즈 실장이 이맛살을 접은 채 풀 죽어 있는 이지은을 돌아보며 읊조렸다.
“하 개자식. 어디 할 짓이 없어서 애들한테··· 너는, 하승진한테 휴대폰을 받았으면 그렇다고 얘기를 해야지.”
“애한테 너무 뭐라고 하지 마세요. 얘들이 뭘 알겠어요.”
굳이 편을 들어주고 싶은 건 아니지만 사실이 그러니까.
그래도 내 말이 위안이 됐는지, 이지은이 한 움큼 깨물고 있던 붉은 입술을 열었다.
“선배님이 함께 잘해보자고 했어요. 그러면 실장님도 빨리 승진하고, 우리가 성공하면 나중에 서로 윈윈할 수 있다고 해서.”
연습생 시절부터 챙겨줬다는 얘기.
밥도 사주고, 가끔 옷도 사주고, 휴대폰도 사주고.
어느 순간부터는 수시로 문자를 보내왔다는 얘기.
점점 심하게 간섭하기 시작했다는 얘기.
그래서 부담스러웠다는 얘기.
“하······.”
아이가 하승진과의 일을 조곤조곤 얘기하는 동안 큐티즈 실장은 자기 탓이라며 한숨만 연거푸 뱉었다.
이러다가 좀 더 있으면 제 머리 뜯는 모습을 구경하겠다 싶은데, 가만히 보고 있던 최재환이 답답함을 못 이긴 눈으로 흘겨본다.
“대체 뭐하신 겁니까? 애들 옆에 계시면서.”
“할 말이 없네요. 그저 소속사 선배니까 애들한테 잘해주는 거라 생각했는데··· 이 정도일 줄이야.”
그래, 매니저가 모든 일상을 알 수는 없는 법이지.
하나도 아니고 다섯이나 되는 걸그룹 멤버의 일거수일투족을 들여다보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그건 매니저가 할 변명이 아니잖아.
최재환도 심정적으로는 이해하면서 지금의 상황에 제법 화가 난 얼굴인데.
아무튼 그건 둘째치고, 나는 잔뜩 위축된 어린 녀석을 눈에 담았다. 코끝이 빨개진 모습에 절로 눈이 찌푸려진다.
“선배에게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지은이 얼굴 보니까 안쓰러워서 저도 맞대응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번 일은 이쯤에서 마무리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나중에 따로 찾아뵙고 사과할 의향도 있고요.”
내 말을 이어받아 최재환이 얘기를 마무리한다.
“명이가 곧 방송 앞둔 것도 있지만, 이번일 문제 생기면 큐티즈 애들까지 다칠 수 있다고. 시현이가 한사코 말려서 저 지금 여기 앉아 있는 겁니다. 만약 시현이가 그날 화장실에서 다치기라도 했으면 어쩔뻔했습니까?”
“··· 잘 알겠습니다. 회사에 가서 대표님하고 상의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한숨 한번에 큐티즈 실장 어깨가 축축 처지는 것 같다. 근데 한편으로는, 이렇게 해서 정말 끝날까 싶기도 하고.
“그럼, 마무리하고 연락 주세요.”
강 실장이 에휴, 숨을 내쉬고 일어났다.
나도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는데··· 우리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이지은이 안쓰러워서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이런.
맑은 눈동자에 쓸데없이 눈물이 고여 있다.
그게 못내 안쓰러워서, 나는 또 어설픈 위로를 건넸다.
“니 잘못 아니야.”
**
「2001년 2월 21일 수요일」
“하··· 하.”
최재환은 촬영장에 이시현을 남겨두고 홀로 청담동 회사로 돌아왔다. 그리고 사무실 문을 열었을 때부터, 안은 이미 전화벨 소리로 난장판이었다.
부장실에 들어온 그가 미처 숨을 고르기도 전에, 조 부장이 매서운 눈을 부릅뜨고 닦달했다.
“너 하승진 일 제대로 처리한 것 맞아?”
“KSH에서 연락 왔습니까?”
터진 숨을 삼키고 되묻자, 조 부장이 책상에 위에 놓인 종이를 손에 집어 들이밀었다.
“자 봐!”
「작년 여름 혜성처럼 등장한 A배우. 잘생긴 외모와 빼어난 노래 실력까지 겸비한 그는 소속사의 전폭적 지원으로 현재 사전제작 드라마의 주연을 맡아 촬영이 한창이다. 하지만 너무 갑작스러운 성공이었을까. A배우가 촬영현장에서 안하무인격 태도를 보여서 관계자들이 크게 당혹스러워하고 있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A배우는 선배 배우들에게도 예의 없이 구는 거로 유명한데, 최근에는 곧 방영 예정인 사전제작 드라마 주연인 B배우에게 폭언과 욕설을 하는 모습을 현장에 있던 관계자들이 보고 아연실색했다는 후문이다」
최재환은 말도 안 되는 글로 가득한 종이에서 겨우 눈을 떼고 조 부장을 마주했다. 늘 보던 이마 주름이 평소보다 더 깊다는 생각이 문득 스치는데.
“오늘자로 증권가에 도는 찌라시란다.”
“이 새끼들이 진짜.”
“그거뿐인지 알아? 다른 것도 있어.”
“예?”
이번에는 성 팀장이 대신 말했다.
“성추행이요. A배우가 B배우 소속사 걸그룹 멤버를 성추행했다는 찌라시예요. 그것 역시 누가 봐도 시현 씨가 타깃이고. 지금 기자들 확인 전화 오고 난리예요.”
“하··· 환장하겠네.”
헛웃음만 연거푸 뱉다가, 최재환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거 말 안 되는 거 아시잖아요.”
“그게 지금 중요하냐? 찌라시가 괜히 찌라시야? 아니면 말고 아니야!”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입에 문 조 부장.
그러더니 담뱃불을 붙이다 말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얘기 안 한 거 있어?”
의미심장한 시선에, 최재환은 되려 조 부장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지금 무슨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날 시현이 저와 계속 함께 있었고, 제가 집에 데려다줬고, 아린이도 같이 있었고. 그리고 전후 사정은 엊그제 부장님에게 다 얘기했고.”
얘기를 잠깐 멈춘 그가 이번엔 성 팀장과 권 팀장을 한 번씩 보고는 다시 말했다.
“그리고, 이시현 몰라요?”
잠시 적막이 흘렀다.
그러다 성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고, 차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우리야 시현 씨 잘 알죠. 시현 씨가 그럴 리 없다는 건 우리 모두 아는 거고. 그리고 사실이었다면 경찰서를 가야지, 왜 이런 짓을 해.”
“뭔가 노림수가 있는 거야. 우리가 그냥 넘어가 준다고 했는데도, 오히려 일을 더 키우고 있어. 김성호 대표가 우리한테 덤빌 수준이 아닌데··· 대체 뒤에 누가 있는 거지?”
홍보부 권 팀장이 안경을 들썩이며 중얼거린다.
평소 나긋나긋한 성격이지만 핵심을 잘 잡는 사람이다.
“올라가자.”
조 부장이 고개를 추켜들고 천장을 바라본다. 그리고 최재환의 목울대가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
[대표 김성호]
화려한 명패가 무색하게 김 대표는 초조함과 검버섯이 낀 얼굴을 연신 꾸벅거렸다. 전화를 끊고는 더 가관이다. 파르르 볼을 떠는 것도 모자라, 소파에 앉은 하승진에게 한달음에 다가왔다.
“왜 그랬어? 좋게 끝내기로 했잖아.”
귀를 후비고 있는 하승진의 모습에 김 대표가 확 찌푸린 얼굴로 다시 말했다.
“뭐가 문제야? 왜 굳이 이렇게까지.”
“싸가지없는 놈이 기어오르잖아요. 선배가 얘기하는데 따박따박 말대꾸에, 눈까지 치켜뜨고.”
또다시 같은 얘기.
김 대표는 빤질빤질한 그 얼굴을 보며 화를 명치 끝에 밀어 넣고 다시 말했다.
“그래. 너 화난 거 아는데 일단 마무리하고, 명이 끝나고 하자. 오늘 첫 방인데, 첫 방 기념 팬 미팅까지 하면서 굳이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냐?”
일요일에도, 월요일에도, 심지어 어제도, 김 대표는 설득하고 또 설득했다.
어떻게든 잘 마무리를 해야 했으니까.
그런데 일은 벌어졌고, 지금 막 차 대표의 경고성 전화를 받고 수명이 반은 줄어든 기분이다.
“여름 내내 고생했잖아. 드라마 잘될 거 뻔한데, 이리 튈지 저리 튈지 모르는 일에 굳이 뭐하러 신경을 곤두세워?”
“뭐하러··· 신경을 곤두세워요?”
김 대표의 말에 하승진이 삐딱해진 시선을 치켜떴다.
“내 말은 그러니까.”
“후배가 선배한테 빳빳이 고개 치켜들고, 대들고, 비아냥거리는데, 그럼 나보고 물먹고 가만있으라는 거예요?”
“그게 아니잖아!”
“됐어요.”
됐다는 게 무슨 뜻인가 싶어서 하승진을 다시 봤는데, 김 대표의 기대를 저버리는 표정이다.
“너 정말! 광고 몇 개 물 먹었다고 이러는 거면 지금 큰 실수하는 거야!”
올 들어 장기 모델로 있던 광고 몇 개가 계약 만료됐는데, 표면상으로는 신선한 모델을 채용한다는 게 이유였지만 그 뒤에 이시현이 자리를 꿰찬 일이 있다.
“내가 지금 광고 때문에 이러는 건 줄 알아요?”
“하··· 말을 말자.”
김 대표는 손을 내저었다. 답답해서 한숨만 나오는데.
도저히 이해가 안 돼서 다시 하승진을 붙잡았다.
“너 대체 어쩌자고 그러냐? 차 대표 전화 오고, MNC 국장한테 전화 오고, 나 돌겠다!”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하승진은 여전히 빳빳한 얼굴이고.
오히려 눈빛에 섬뜩함을 일렁이며 속삭일 뿐이다.
“내 앞에, 그 새끼 무릎 꿇게 만들 거예요.”
「‘명이’ 첫 방 기념 하승진 팬 미팅」
대기실 화장대 거울 앞에서, 하승진은 그 어느 때보다 밝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오늘 마침내 사전제작으로 촬영된 드라마 ‘명이’가 방영된다.
한여름에 산과 들을 내달리면서 촬영하느라 고생하고 또 고생한 드라마였다. 땀띠 때문에 수시로 잠을 설친 기억이 선명하다.
“팬들 많이 왔냐?”
“당연하죠.”
매니저가 미소를 빙그레 보인다. 그러자 하승진은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가다듬었다.
대기실 밖에서 뭉쳐 들리는 소리들, 스태프들의 외침, 멀리서 들리는 팬들의 목소리··· 다시 눈을 뜬 그가 매니저를 향해 넌지시 물었다.
“김 대표 왔냐?”
“아니요.”
“참내.”
하승진은 콧바람을 들썩이고 다시 물었다.
“야, 지에스 반응 어떠냐?”
“초상집··· 일 겁니다.”
매니저가 머뭇거리며 대답하는데, 문을 열고 들어온 스태프가 긴장된 미소로 말했다.
“승진 씨, 이제 준비하셔야 합니다.”
“예!”
하승진은 마지막으로 거울 속 자신을 체크하며 웃어 보였다. 보라색 수트가, 말쑥한 머리가, 잘생긴 얼굴을 더욱 완벽하게 하고 있었다.
“가자.”
대기실을 나온 그는 진행요원을 따라서 무대로 향했다.
그리고 수많은 팬이, 그가 나타나자 환호하기 시작했다.
“여러분, 배우 하승진 씨를 모십니다!”
장내 아나운서의 안내에 기자들의 박수와 팬들의 환호성이 들끓었다. 쏟아지는 플래시 속에서 보라색 수트 차림의 그가 포즈를 취했다.
여기저기 쏟아지는 포즈 요구에 맞춰, 아나운서가 지정된 포즈를 안내할 때마다 하승진은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팔짱을 켜기도 하고, 브이자를 그리기도 하고, 만개한 미소를 보이기도 했다.
“이번에는 좌측 끝을 한번 바라보시겠습니다.”
“오빠 사랑해요!”
불시에 들린 팬의 목소리에 장내가 웃음으로 들썩거린다.
포토타임이 끝나고, 겨우 마이크를 손에 쥔 그가 아까의 팬을 가리키며 환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나도 사랑해.”
그런데 이때, 갑자기 귀를 때리는 출력음이 퍼졌다.
삐!
불시의 소음에 모두가 얼굴을 찌푸린 순간, 하승진이 이마를 찌푸리고 아나운서를 노려봤다. 그러자 당황한 아나운서가 손에든 마이크를 껐다켰고, 서둘러 말했다.
“죄송합니다. 오늘 하승진 씨를 응원하러 몰래 오신 손님이 있어서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손님이라니.
하승진은 무대 아래의 매니저와 홍보팀 관계자들을 바라봤다. 담담한 얼굴들.
‘누구지? 혹시 오소리?’
뭔지 싶은데.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여러분, 배우 이시현 씨를 소개합니다.”
하승진은 순간 잘못 들었나 싶었다. 하지만 그 착각이 무색하리만큼 환한 미소와 함께 이시현이 들어왔다.
관객석의 팬들과 기자들이 난리가 났는데, 이시현은 태연하게 무대에 올라와서 얼떨떨해 있는 하승진을 와락 껴안았다.
‘선배 얼굴 펴요. 카메라가 다 찍는다.’
이시현은 속삭임 뒤에 하승진이 손에 쥔 마이크를 조심스럽게 감싸 가져가더니, 허리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배우 이시현입니다.”
환호, 플래시, 그리고 아나운서의 질문.
“이시현 씨, 여긴 어떻게 오시게 됐나요?”
“글쎄요.”
짧은 웃음에도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시현이 하승진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말했다.
“하승진 선배님은, 제가 너무 사랑하는 선배님이니까요.”
< 거칠거나, 아니면 부드럽거나 (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