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ssion in Tokyo (1) >
[2000년 9월 3일 일요일]
누가 그랬더라. 이 바닥에 휴일 따위는 없다고.
최재환은 홍보부서 직원들과 함께 맥주 한 모금을 마시며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3W가 출연한 번개콘서트 모니터링을 위해서인데, MNC 간판예능 ‘일요인은 즐겁다’의 새 코너 ‘번개콘서트’는 방영 전부터 인터넷에서 화재를 모았다.
가수와 가수의 대결, 당일 홍보로 관객을 모아야 하며, 그 결과 한 팀은 집으로 가고 남은 한 팀은 콘서트를 연다는 자극적인 설정까지.
더구나 이미 녹화 촬영을 하면서 출연 게스트들이 동대문 일대를 들쑤셔 났으니 입소문이 날 수 밖에 없었다.
“하여간 이 바닥은 내일을 알 수가 없어.”
홍보부 권 팀장이 턱을 쓸어내리며 혼잣말을 속삭였다.
지금 TV화면에는 이시현을 보려고 구름떼같이 몰려든 인파가 보이는데, 누가 저 모습을 보고 얼마 전까지 계약 만료에 퇴출 위기의 배우였다는 사실을 믿을까.
“아, 내가 얘기했나?”
“뭐가요?”
“나도 어제 연락받은 건데, NHK에서 심야방송으로 8.15특집드라마를 방영한다네?”
대충 귀담아듣던 최재환이 고개를 돌려 권 팀장을 바라봤다. NHK면 일본의 공영방송 아닌가.
“그래요?”
“응. 그래서 솔직히 좀 기대하고 있어. 재일교포 사회에서 이슈가 될 것 같기도 해서.”
“일본이라······.”
“그러고 보면 요즘 2팀이 박한영 때보다 더 바쁜 것 같아?”
“바쁘죠. 송이경도 강 실장이 부지런히 푸시하고 있고, 오소리도 이제 드라마 촬영 꽤 진행됐고. 더구나 한승연까지 연기자 라인에 합류할 것 같고··· 뭐, 다른 배우들이야 알아서 잘하고 있지만.”
최재환은 맥주 하나를 손에 집었다. 그러자 권 팀장이 화제를 바꿔 다시 물었다.
“바이바이 CF 2탄 잘 나왔던데?”
“이번에 마케팅비만 20억을 넘게 쓸 거라는 얘기가 있더라고요.”
최재환이 캔맥주를 칙! 따며 얘기하자, 권 팀장도 맥주를 손에 집었다.
“아마 그거 미니멈일 거야. 일본 시장에 론칭하는 건데, 20억 갖고 되겠어? 뭐, 덕분에 우리야 꿩 먹고 알 먹고지만··· 참내, 그러고 보면 운명이란 게 있나봐. 어떻게 보면 기적이잖아? 바이바이 CF를 시작으로 가경 작가 영화에, 특집드라마에, 정규편성까지.”
“저 그래서 종교 하나 가져볼까 하고요.”
최재환이 실없이 농담을 뱉었다. 가볍게 웃음을 흘리며 맥주를 손에 들고는, 목 넘김 직전 잠시 멈칫하고 속삭인다.
“근데 생각해보면··· 바이바이 쪽은 이시현을 제대로 알아본 거고, 우리는 그동안 이시현을 제대로 모르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죠.”
그 말에 동의하듯 권 팀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두 사람은 맥주를 꿀꺽꿀꺽 삼키고 TV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연습생 생활이 힘들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미래도 불확실하고,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솔직히 데뷔한다고 해도 잘된다는 보장이 없으니까요.
홍보 도중에 게스트들의 사연이 녹아든다. 레니가 연습생 시절을 담담히 얘기하면서 사람들에게 콘서트에 와달라고 외치는 모습이 짠하다.
이후에도 극적인 편집과 자막 등의 연출은 안대를 벗는 순간까지 이어졌다.
-2만 8천 8백 2십 3명!
마침내 MC의 외침이 터진 순간에 권 팀장을 비롯한 홍보부 팀원들이 요란하게 박수를 쳤다.
-여러분, 번개콘서트 1회 콘서트의 주인공은 3W입니다.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함성과 박수. 애써 담담한 얼굴의 성지훈이 3W에게 축하인사를 건네고 팬들에게 손을 흔들며 무대를 내려간다.
-그런데 여러분, 3W의 콘서트를 진행하기에 앞서, 오늘 여기 두 분에게 응원을 보내신 분들이 있어요. 레니 씨··· 누구일 것 같아요?
두 눈을 깜빡이던 슬기와 레니는 잠시 뒤 무대에 부모님들의 인터뷰 영상이 나오자 눈물을 펑펑 쏟기 시작했다.
“독한 놈들.”
권 팀장이 혀를 내두르면서 괜스레 눈가를 매만진다.
아마 누구라도 저 장면에 눈물을 훔칠 것이다.
-여러분. 이제 3W의 무대를 이어가기 위해서 잠시 준비를 해야 하는데, 근데 우리가 이 얘기를 안 할 수가 없죠?
MC의 멘트에 이어서 화면에 무대 뒤의 모습이 나왔다. 인터컴을 손에 든 스태프가 휠체어를 탄 권혜선 옆에서 대기하고 있다.
-여러분, 우리가 아는 3W는 몇 명이 한 팀인가요?
잠실운동장에 모인 팬들이 한목소리로 ‘세 사람!’을 외쳤다.
-지금 병상에 있는 3W의 권혜선 씨에게, 레니 씨 하고 싶은 말 있으신가요?
-언니 빨리 와. 언니 없으니까··· 힘들어.
재치있는 멘트를 기대했는데, 레니가 눈물을 주르륵 흘린다. 어떻게 보면 딱 부러진 성격의 그녀가 권혜선이 없는 자리를 채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근데 듣자 하니까, 회복기간이 길어질 것 같다는데. 그래서 3W가 아예 2명으로 갈 거라는 얘기가 있던데··· 슬기 씨, 사실이에요?
-절대, 절대 아녜요! 3W는 무조건 우리 셋! 혜선이 언니가 없으면 우리는 3W 아니에요!
펄쩍 뛰는 슬기의 모습에 MC가 미소와 함께 다시 묻는다.
-그럼 오늘 두 분만 있으니까, 3W 콘서트가 아니네?
-에에? 그건··· 아닌데.
당황하는 슬기 때문에 울고 웃는 관객들.
그리고 마침내 스태프가 권혜선에게 신호를 줬다.
욱이 매니저가 천천히 휠체어를 밀고 무대로 나가고.
-그래서, 저희 제작진이 오늘 콘서트를 위해서 3W를 완전체로 만들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순간 잠시 가라앉았던 잠실운동장이 다시금 들썩였다.
천천히 뒤를 돌아본 그녀들의 눈에 휠체어를 타고 들어오는 권혜선의 모습이 비치고, 감동의 장면이 이어지는 찰나, 최재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권 팀장의 질문에 최재환이 미소와 함께 말했다.
“소리 스케줄 있어요.”
“오소리는 조 부장이 맡고 있지 않아?”
“부장님 오늘 선 본데요. 훗. 저 갈게요.”
최재환은 바로 사무실을 나왔다. 하지만 문을 닫기 전, 한 번 더 TV화면을 눈에 담았다.
**
[같은 날, 이시현 스케줄]
09시 ? 압구정, B 스튜디오 광고 촬영
11시 ? 김포공항 (일본 스케줄)
16시 ? 도쿄, 페이 프로덕션 미팅 (이후 스케줄 현지 조율)
2박 3일의 짧은 일정으로 도쿄에 도착한 우리는 짐을 풀고 바로 페이 프로덕션을 찾았다.
가경 작가의 차기작 반추의 캐스팅을 확정 짓는 일정이기에 느긋하게 움직일 여유가 없었다.
할리우드 자본으로 한·중·일 3개국을 배경으로 촬영되는 3부작 시리즈물 반추. 처음 캐스팅 얘기를 들었을 때는 얼떨떨하기만 했는데··· 지금은 다르다.
그동안은 되면 좋고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면, 이제는 가까이에 온 게 느껴진다. 뭐랄까. 마치 하염없이 바라만 보던 낚싯대가 출렁이는 느낌이랄까.
그 느낌은 마침내 강 실장이 웃는 얼굴로 회의실 문을 열고 나왔을 때, 비로소 명확히 깨달을 수 있었다.
“축하한다, 시현아.”
“그럼 된 거예요?”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나보다 더 초조하게 뱅뱅 돌고 있던 한송이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이견 없는 확정이래. 시현이 이제 할리우드 가는 거야.”
“와아!”
한송이가 방방 뜨면서 연신 강 실장과 주먹을 부딪친다. 그 모습에 정신은 없지만, 그래도 나 역시 들뜬 얼굴을 감추지 않고 물었다.
“가경 작가님은요?”
“그건······.”
강 실장이 묘한 얼굴로 입을 여는데, 마침 페이 프로덕션 관계자들이 뒤이어 회의실을 나왔다.
“가경 작가님이 널 밖에서 보자고 했대.”
통역과 얘기를 나눈 강 실장이 그들의 말을 전했고, 우리는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거리로 나와야했다.
가경 작가가 근처 거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고개가 갸웃해지는 소리지만, 페이 프로덕션 관계자들은 말없이 우리를 이끌고 갔다.
“스고이······.”
길에서 눈이 마주친 여자가 자연스레 입을 벌린다.
나를 바라보는 거리의 사람들. 일본인이라고 보는 눈은 다르지 않으니까. 웬만한 이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니 그들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와 닿는다.
“가경 작가가 어디 있대요?”
궁금증을 참지 못한 한송이가 강 실장에게 물었다.
“몰라. 가보면 알겠지.”
강 실장도 궁금한 듯 중얼거리자, 한송이가 머뭇거리다가 다시 물었다.
“이따가 시부야 들려서 옷 좀 구경하면 안 돼요? 오빠 옷 좀 사려고······.”
“송이야. 나중에.”
나는 한송이에게 조용히 할 것을 부탁했다.
도쿄에 오기 전, 이미 오늘 만남에서 가경 작가가 즉석에서 오디션을 요청할 수 있으며, 테스트 무비를 촬영할 수도 있다는 얘기를 전달받았다.
그러니 지금 가경 작가를 만나러 가는 길이 마냥 편하거나 들뜰 리가 없다.
하지만 그보다 궁금한 것은··· 가경 작가는 대체 어떤 사람이냐는 거다.
“시현아. 이제 확정이나 다름없어. 긴장 풀어.”
옆에서 강 실장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낮게 말했다.
그런다고 편해질까.
최재환의 얘기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데··· 정말 어떤 사람일까. 어떤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날까. 미치도록 궁금해서, 심장이 두근거린다.
**
얼마 걷지 않아 우리는 도쿄 긴자 거리에 들어섰다.
사람들, 또 사람들 사이를 지나던 페이 프로덕션 관계자들이 걸음을 멈췄다.
그곳은 원형의 공간에 요란한 화장을 한 남자가 서 있었는데, 구경꾼들이 제법 많이 몰려 있었다.
‘가부키?’
도쿄 긴자에 위치한 가부키자 공연장은 유명하다. 나도 두어본 본적이 있으니까.
북소리, 피리소리, 샤미센이라 불리는 악기연주와 갖가지 드라마 요소가 펼쳐지는 이곳. 그러고 보니 여기는 그 가부키자 근처의 거리.
페이 프로덕션 관계자들은 조용히 군중들 틈에 섞였다.
뭘까. 가경 작가를 만나러 온다고 하고는 가부키 거리 공연 구경이라니.
두둥!
강렬한 북소리와 함께 가부키 배우가 크게 뛰어오른 순간, 내 머릿속 잡생각도 일시에 물러났다.
타타타타!
가부키 배우가 관중들에게 빠르게 다가오더니 멈칫!
천천히 손을 들고··· 옷자락을 흔드는 손짓. 기품 있는 자세, 걷는 동작은 사뿐사뿐, 언뜻 고양이 같지만 힘이 느껴진다.
그러더니 휙!
마치 뭔가를 베는 듯, 아니 베었다. 아무도 없는 공간이지만 분명 누군가 베여서 쓰러졌다. 그것이 상념이든 환상이든 관객의 의사와는 상관없다는 듯이 배우는 의기양양한 얼굴인데, 묘하게 가슴을 울리는 무엇이 거기에 있었다.
이번에는 하늘을 본다.
나풀나풀 흔들리는 손,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바닥에 풀썩, 물에 둥둥 떠다니듯 고개를 흔들며 뭔가를 속삭이는데.
“오빠 뭐 이상하지 않아요? 소리 같은 게 들리는 느낌이······.”
“쉿.”
그래, 음악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느껴진다. 보통의 연기가 아니다. 차원이 다른 무엇이 거기 있었다. 지금 나는 그에게서 색과 소리의 향연을 보고 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저 배우는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시선, 감정을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강제적으로. 그래서 보면서 숨이 막히고, 심장이 두근거린다.
저 배우는 내게 뭘 얘기하고 싶은 거지?
다음 순간, 숨이 턱 막힌다.
그 배우가 내 눈앞에 서서 나를 노려보고 있다.
호랑이가 먹잇감을 노려보는 것 같은 위압감. 질식할 것 같은 침묵.
“거기!”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옷자락이 펄럭!
그가 다가오자 사람들이 내 주위에서 물러나고, 그는 내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사람들에게 더 멀리가라는 듯 큰 보폭, 큰 몸짓으로, 먹이를 앞에 둔 맹수처럼.
“시나리오는 봤습니까?”
뜬금없이 그가 묻는다.
시나리오?
뭐야, 설마 이 배우가 가경 작가란 말인가? 짙은 화장으로 얼굴조차 알아볼 수 없는 이 사람이?
설마······.
내 의문은 뒤에 있던 페이 프로덕션 관계자가 해결해줬다.
“그가, 가경 작가 입니다.”
“······.”
그렇게 기대하고 고대하던 만남 앞에서 입이 열리지 않는다. 설마하니 이런 만남이라니. 내게 시나리오를 봤냐고?
“봤습니다.”
겨우 뱉은 목소리는 탁했지만, 그는 만족한 듯 크게 점프를 했다.
지난번 페이 프로덕션 관계자들이 지에스를 방문했을 때, 그날 받은 시나리오는 3부작 중 1부 초고였다. 하지만 대사나 분위기는 어느 정도 완성된 시나리오. 나는 그 시나리오를 보고 또 봤으며, 외우고 또 외웠다.
“가부키에 대해서 압니까?”
눈앞의 춤은 계속되고, 여전히 옷깃의 나풀거림과 함께 질문은 이어졌다.
“일본의 전통연극이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연극을 해 본 적이 있습니까?”
물론 이시현은 연극을 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나는.
“있습니다.”
“연극은 거짓을 사실처럼 꾸미는 행동이죠.”
순간 내 눈앞에 섬광이 번뜩인다. 그는 내게 칼을 겨누듯, 그래 칼을 겨누고 있다. 살기가 나를 옭아매기 시작하고, 등줄기에 오싹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당신에게 필요한 게 뭔지 압니까?”
가경 작가가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거짓을 사실처럼 꾸미는 게 아니라··· 거짓을 지우는 것, 그 자체를 없애고 당신을 보여주는 것.”
나한테 깨달음을 주려는 건가? 아니면 내 연기에서 부족함을 본 걸까.
“괜찮으면, 한 장면 보여줄 수 있습니까?”
지금, 여기서 연기를 하라고?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는 계속 춤을 추고 있다.
그리고 물론··· 나는 상관없다. 촬영장도 스태프들로 득실거리니까. 배우가 연기를 하는데 있어 주변에 사람이 많고 적음은 문제가 없다.
“보고 싶은 씬이 있으십니까?”
나는 그를 도발하는 질문을 했고, 가경 작가가 사뿐사뿐 걷던 걸음을 멈추고 뒷짐을 진다. 짙은 화장 속 호기심의 시선으로 콧잔등과 미간까지 찌푸려가면서 나를 본다. 저 화장을 지운다면, 어쩌면 그 얼굴은 사악하게 웃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스친 순간.
“비가 오면 딱 좋겠는데··· 김은재가 연인 유민서의 죽음에 슬퍼하는 장면이 좋겠네요. 장례식장에서 비를 맞으며 슬픔을 견디는 장면인데. 아십니까?”
가쁜 호흡이 나를 잡아먹을 듯이 압박한다.
“92번 씬을 얘기하시는 거군요.”
“맞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경 작가가 나를 잡아끌었다.
휙!
광장의 한 가운데에 던져놓는다.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고, 그는 춤을 멈췄다.
92# 공원묘지 / 낮 / 비
탁 트인 공동묘지에서 유민서의 장례식이 열린다. 검은 옷을 입은 하객들, 어두운 하늘에서 내리는 비, 생전 유민서가 좋아했던 팝송이 흐른다.
그리고 그녀의 장례식을 보는 또 한사람.
멀리 떨어진 앙상한 나무 아래서 우산도 없이 비를 맞고 있는 김은재. 초점 잃은 그의 곁에는 아무도 다가오지 않는다.
씬을 떠올리며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 심호흡을 했다.
이런 장소, 이런 상황에서 연기를 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지난 특집드라마 촬영으로 나는 좀 더 단련이 됐다.
그리고 나는 배우. 이제부터는 카메라가 켜지길 기다리지만은 않겠다.
‘거짓을 지운다··· 나를 보여준다.’
연기에 앞서 김은재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서는 그의 과거와 그의 주변 인물들, 특히 그가 사랑하는 이들을 돌아봐야했다.
유민서는 J라 불리는 킬러 집단의 일원이다.
J는 목적을 위해서 누군가의 가족이 되고, 누군가의 연인이 되며, 누군가의 동료가 된다. 유민서 자신도 J였기에 그녀가 김은재를 사랑한 건 기억의 조작이 만들어낸 착각의 산물.
하지만 김은재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부모를 죽인 J를 증오하면서도 유민서를 사랑했다. 오히려 그 사랑이 있었기에 그는 악마가 되지 않을 수 있었다. 유민서의 눈은 그를 믿어줬고, 유민서의 손은 그를 위로해줬으니까.
‘유민서.’
이제는 그녀에 대한 이미지가 분명히 잡힌다. 처음 시나리오를 봤을 때는 그녀가 단발머리일지 긴머리일지 궁금했다. 가경 작가의 지문은 불친절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선명히 보인다. 그녀의 어깻죽지를 가린 흑발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까지.
지금 순간 전혀 다른 세계가 나를 덮쳤다.
비
흐린 하늘에서 내린 비가 어깨를 누른다. 머리카락에 닿아 뚝뚝 떨어지고, 입술 틈을 비집고, 옷을 무겁게 한다.
관
민서가 들어있을 관이 서서히 땅으로 묻힌다. 어둠밖에 없을 저 땅 밑은 차가울 것이다. 그 차가움도 안타까운데, 이 비가 민서를 더 얼어붙게 하고 있다.
음악
장례식장에는 민서가 좋아하는 팝송이 흐른다. 그녀는 ‘매리 미’의 노래를 좋아했다. 은은한 선율의 블루스. 비가 오는 날이면, 그녀의 오피스텔에서 그 선율을 따라 블루스를 췄는데.
사람들
민서를 위해 모인 동료, 친구, 가족, 성심그룹의 직원들까지. 다정했던 그리고 좋은 사람이었던 그녀를 보내주며 모두가 슬퍼하고 있다.
분노
민서가 죽었다. 세상 모두의 책임이다. 내 책임이고, J의 책임이다. 그녀를 살릴 수는 없다. 그렇다면 모두다 같이 묻겠다. 심지어 나 자신까지도.
비가 나를 무겁게 하고, 관이 나를 차갑게 가두고, 음악이 나를 슬프게 하고, 분노가 나를 깨워주는 지금.
‘유민서.’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지금 긴자의 거리가 아닌 장례식장에 있었다. 깊은 절망이 내게서 넘치기 시작했고, 유민서에 대한 지독한 사랑이 나를 슬프게 했다. 그래서 눈물이 흘렀고, 비와 함께 뚝뚝 타고 흘러내렸다.
이대로 언제까지라도 그녀의 가까이에 있고 싶었다.
**
갑자기 무대에 등장한 남자. 그저 서있기만 할 뿐인데··· 얼굴에 표정이 없다.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굳이 말하자면 죽은 얼굴 같았다.
그런데 보고 있으니 추위가 느껴지고, 아픔이 느껴진다. 소름끼치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리고 하늘.
“마마?”
어린 아이가 엄마를 부른다. 하늘을 보고 있던 그녀가 남편을 돌아봤다.
“비가 오나?”
“당신도 느꼈어? 빗방울?”
남편도 고개를 갸웃하지만, 하늘은 맑고 창창하다. 이상한 일이다.
근데 저 남자는 누구지? 배우인가? 처음 보는데?
호기심에 빠진 여자의 귀에, 또 다른 관중의 속삭임이 들렸다.
“진짜라니까. 음악소리 들리는 것 같았다니까.”
“소리가 어디서 들려?”
“저 남자. 보고 있었는데··· 음악소리가 들렸다니까.”
고개를 갸웃하는 그 모습.
**
“오케이.”
딱딱!
가경 작가가 내 눈 앞에서 손가락을 부딪친다.
몰입된 역에서 빠져나오는 건 괴로운 일이다. 특집드라마 촬영에서 나는 그것을 몇 번이고 느꼈다.
박춘삼이 괴로운 것은 당연하다. 그 장면에서의 개연성이 그것을 뒷받침하니까.
하지만 타인은 다르다. 박춘삼이 이시현으로 돌아올 때, 이시현은 난데없이 쏟아진 괴로운 감정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스윽.
가경 작가가 손을 들어 내 얼굴에 가져왔다. 두툼한 그의 손바닥이 뜨겁다. 불구덩이에 대인 것 같은데.
“당신은······.”
가경 작가가 한마디를 속삭이고, 자신을 비치는 내 눈을 보며, 아주 은밀하게 속삭인다.
“미쳤군요.”
< Mission in Tokyo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