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57화 (57/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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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으로 보여준다 (1)

「8.15특집드라마 촬영 첫날, 2000년 8월 2일 수요일」

“알았어. 신경 쓸게. 아 진짜, 그만 좀 해!”

강 실장이 오만상을 찌푸리고 전화를 끊는다. 그러더니 날이 선 시선으로 나를 잡아먹을 듯이 본다.

“야, 네 매니저 왜 이러냐? 아침부터 전화를 몇 통을 하는 거야?”

“걱정되니까 그러겠죠.”

“에잇!”

뒷머리를 북북 긁는 강 실장의 모습에 나는 씁쓸함을 감추고 최재환이 보낸 문자를 눈에 담았다.

[아무 걱정하지 마. 까짓것 별거 아니잖아?]

딱 최재환이 보낼만한 문자 내용이다. 후훗, 차창에 내 미소가 비친다.

고맙기는 한데, 별거 아닌 일은 아니지. 이미 8.15특집드라마 촬영장은 나로 인해 개판이라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으니까.

[성지훈 의문의 하차]

[KIS 8.15특집드라마, 촬영 전부터 난항]

[KIS 측, 일정 촉박하지만 15일 방영에 문제없어]

[무리한 촬영 일정에 배우들 얼굴에는 수심 가득]

오는 길에 사 온 스포츠 신문에는 대문짝만한 성지훈 사진과 자극적인 문구가 1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신문만 유별난 게 아니다. 예상한 일이었고, 가판대에 채워져 있던 다른 신문들도 하나같이 8.15특집드라마 얘기가 메인이었으니까.

“하··· 이런 일은 또 처음이네.”

강 실장이 비 맞은 중마냥 또 중얼거린다. 그 중얼거림이 신경 쓰이지만 사실 이해는 간다.

강 실장 입장에서는 지금 온갖 역풍을 앞두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촬영장에서의 시선이 따가울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인데, 그 조바심이 오죽할까.

현재 윤 부장을 대신해서 매니지먼트 사업부를 끌고 있는 김 팀장과 조 팀장은 나한테 매니저를 더 붙이려고 했었다.

안전 문제도 있어 내린 대책이었지만, 차 대표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어차피 부딪쳐야 할 거 차라리 두들겨 맞고 오라는 것인데··· 아마 나라도 그렇게 결정했을 것이다.

“넌 대표님이 얘기하는데 그냥 예 그랬냐?”

강 실장이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다시 운전에 집중한다. 어휴, 저놈의 가자미눈을 그냥 콕 찔러버릴라.

“대표님이 결정하신 거니까요.”

“아니, 바이바이 행사 하나 가지고도 그렇게 튕기더니만, 이건 또 그냥 예 했어? 허!”

“좋은 기회니까요.”

“기회도 가리면서 해야지 임마. 아무거나 주워 먹다가 체하는 거야! 너 하나 때문에 지금 방송국 완전 뒤집어 진 거 알아?”

“강 실장님.”

내가 나직이 부르자 그가 입술을 툭 벌린다.

“왜?”

“그렇게 싫으시면 대표님한테 얘기할게요. 제 매니저 다시 원위치시켜달라고.”

내 말에 강 실장이 움찔한다.

“그게, 무슨 말이야?”

“되게 싫어하시는 것 같아서요. 대표님 결정가지고도 이래저래 하시는데, 앞으로 제 말은 들리시겠어요?”

사실 오는 내내 빈정이 상했다. 구박을 해도 정도껏 해야지. 내가 드라마 한다고 떼를 썼냐? 그래, 이왕 말 나온 거 나도 그냥 삐딱선이나 타야겠다.

“대표님 지금 출근하셨으려나······.”

“야야, 걱정이 돼서 그런 거지. 싫기는 누가.”

강 실장이 입맛을 쩝 다신다. 찔끔 놀란 얼굴이다. 어휴 이놈아.

‘하긴, 강 실장 이놈도 마음이 뒤숭숭하겠지.’

녀석에게는 자기 일이 있고 스타일이 있다. 아무리 회사 사정이라지만 원치 않은 상황을 맡은 것이 좋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런 점을 생각하면 이해는 간다.

“조금만 고생해주세요. 저도 긴장되는데, 그래도 실장님이라도 있으니 이렇게 고개 들고 갈 수 있는 거예요.”

나는 차창을 열어 한숨을 내보내며 말했다.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려온 드라마 첫 촬영인데, 시작부터 난관의 연속이다.

“그래··· 너라고 편하겠냐.”

강 실장이 입맛을 쩝쩝 다시는 소리가 들린다.

톡톡.

조심히 느껴진 손길에 고개를 돌리니 한송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어깨를 두드리고 있다.

“오빠.”

“왜?”

“오빠 팬클럽 숫자 5천 넘었어요.”

“팬클럽?”

“예. 요즘에는 하루에 백 명 이백 명씩 가입해요.”

“그래?”

나는 온라인 팬클럽은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그저 밖에서 보이는 친구들에게만 잘해주고 친근하게 다가가려 했을 뿐인데, 아무래도 지금 시기가 스마트폰이 등장할 때가 아니라서 등한시한 게 사실이다.

‘5천 명이라.’

TLON의 팬클럽 숫자가 20만 명이 넘었었지 아마. 그에 비하면 현저히 부족하지만 지금의 내게 5천 명이라는 숫자는 천군만마보다 더 듬직하고 고마운 존재다.

‘조만간에 한번 봐야겠네.’

열린 차창으로 바람이 불어온다. 나부끼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다시 한송이를 돌아봤다.

“팬클럽에도 회장이 있지?”

“예. 당연히 있죠.”

한송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누구일까?”

나는 혼잣말을 속삭이며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차는 부지런히 달리고 있고, 바람은 여전히 내 머리카락을 펄럭인다.

‘궁금하네.’

팬클럽 회장이라고 하면 이시현을 무명시절부터 좋아해 준 친구라는 소리인데, 분명 진정한 팬일 테지. 궁금하네. 그녀가 누구인지.

설마··· 남자는 아니겠지?

**

“엣치!”

사무실을 갑자기 흔든 재채기 소리에 성 팀장이 고개를 들었다. 백유진이 코를 훌쩍이고 있다.

“삐삐.”

“예?”

“감기 옮기면 죽는다.”

“에이.”

입술을 빼죽 내민 그 모습에 성 팀장은 피식 웃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백유진의 손이 빨라진다. 타타타! 인터넷 창을 끄고, 서둘러 블랙보이 4분기 기획안을 띄워놓는다.

“나갔다 올 테니까, 나 찾는 전화 오면 내 개인번호 알려줘.”

“예!”

직원들의 대답을 들은 성 팀장이 못 미더운 얼굴로 나가자 다들 동시에 기지개를 켠다. 목을 한 바퀴 돌리고, 어깨를 툭툭 두들기면서 늘어진 숨을 토한다. 그 사이 백유진은 서둘러 인터넷 창을 열었다.

-속보, 지금 성지훈 애들 8.15특집드라마 촬영장에 난입했다는 소식입니다.

-미친것들!!

-우리 회장은 뭐하는 거야? 우리도 가서 막아야 되는 거 아니야?

-근데, 솔까말 우리 가봤자 화력이 낮아서 머리만 뜯길 텐데······.

-그래서 우리도 친위대 만들어야 한다니까!! 쌈 좀 하는 친구들로!!

-지금 출발해요? 확 붙어?

요즘은 무슨 글만 올라오면 댓글이 실시간으로 올라온다. 그만큼 이시현이 이름을 알리고 있다는 얘기인데.

‘성지훈 이 양x치 자식! 감히 우리 시현님을!’

백유진이 바싹 탄 입술을 적시려 머그잔을 손에 쥐었다. 손이 바르르 떨린다. 벽시계를 힐끗 보고는 고민에 빠진다. 급히 연차를 쓰고 내려가 봐야 하는 건가.

일단은 게시판을 진정시켜야 하니까, 손가락 열 개를 쫙 펼치고 자판을 두드리려는데, 갑자기 댓글이 하나 추가됐다.

-우리 천사들 진정해. 나도 걱정이 되는데, 그래도 지금은 냉정해야 할 때야. 우리가 가서 충돌하면 오히려 시현에게 불리해. 안타깝지만 지금은 자중해야 할 때야.

······

-하긴, 틀린 말 아니지. 차라리 우리 시현이 걔들한테 조금 당하는 게 모양새가 좋을 수도 있지.

-그러다가 금쪽같은 시현 얼굴에 상처라도 나면 어떻게 할 건데?

-그때는 결사항쟁이지.

댓글을 읽어 내려가는 백유진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마우스를 클릭해 관리자 메뉴로 들어갔다. 회장의 권한으로 좀 전에 댓글을 남긴 이의 아이디와 이름을 본다.

[bora, 강보라]

‘응?’

어디서 들은 이름인데··· 아무튼 틀린 얘기는 아니다. 지금은 이시현이 악역이나 다름없으니 여기서 팬들이 나선다는 것은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 그리고 솔직히 성지훈 팬덤에 밀리는 게 사실이고.

‘얘 괜찮네. 스탭으로 스카우트할까.’

사소한 고민이 이어지는데, 사무실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왕년에 껌 좀 씹어봤을 것 같은 노란 머리의 여자. 3W 스타일리스트 강보라.

‘강보라? 이름이 똑같네? 윽, 냄새!’

백유진은 짙은 향수 냄새를 걸친 강보라의 등장에 눈썹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젓는다.

‘설마.’

피식 웃는 그녀에게 강보라가 다가와 손을 내민다.

“저기 보이스레이드 뮤직비디오 편집본 나왔다고 해서요. 복사본 하나만 주세요. 홍보부에 가니까 여기서 받으라네.”

“아, 잠시만요.”

백유진이 서둘러 시디 한 장을 건넸다. 받아든 강보라. 서로의 손이 시디 한 장을 사이에 두고 닿을 듯 말 듯 한다. 그리고 마주친 시선.

째려보는 듯한 강보라의 시선에 백유진은 서둘러 손을 뗐다.

**

“우리 오빠 책임져요!”

“KIS는 각성하라! 각성하라!”

“계약서대로 해라! 공영방송 개나 줘라!”

경상남도 함양의 백암산.

815특집드라마 촬영 현장인 이곳은 말 그대로 개판이었다. 성지훈의 팬클럽 회원 백여 명이 입구부터 진을 쳤다. 피켓에, 확성기까지 들고 난리다.

“서울 12 가 62XX, 그놈 아니야!”

선두에 있는 여자가 망원경을 들고 출입하는 차들의 번호판을 확인하고 있다. 그들이 찾는 건 이시현의 차.

탁월한 정보력과 행동력으로 이미 다른 배우들의 차량번호를 획득한 그녀들이다. 이시현이라는 어디 듣보잡 배우의 차번호까지는 알 수 없지만, 명단에 없는 게 그놈 차라는 건 단순한 이치.

“각성하라! 각성하라!”

“우리 오빠 돌려줘라!”

반면 그 모습을 지켜보는 현장 스태프들은 죽을 맛이었다.

당장 이달 15일에 방송이 나가는데, 오늘까지 하면 촬영 일자가 열흘밖에 남지 않는다. 실시간 편집이 예고된 상황인데, 더 큰 문제는 때늦은 장마에 비까지 올 거라는 사실이다.

“아 미치겠네. 대체 무슨 생각들이야?”

조연출이 뒷머리를 북북 긁는다. 촬영도 뜬금없이 시작되고, 일자도 촉박하고, 그런데 주연 배우까지 교체?

이건 아주 개판 중에 상 개판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다들 이미 대본리딩에서 성지훈의 딕션을 듣고 기겁을 했었기에 주연 배우 교체에 대해서는 일정 부분 납득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도 전화위복이 될지 어떻게 알아요? 그때 성지훈 대사 흘리는 거 봤잖아요? 내가 해도 걔보다는 낫겠더만.”

“야, 쟤들 듣는다. 살인나 임마, 성지훈 스캔들 났을 때 고양이 사체 보낸 애들이야.”

“윽!”

스태프들은 저 인원들을 해산해야 한다는 생각에 고개부터 내저었다.

촬영이 시작되면 잡소리 하나도 신경이 곤두선다. 뿐만 아니라 내일부터 비가 쏟아진다고 해서 오늘 대규모 폭발 씬을 몰아넣었기에 현장 주변에는 개미 한 마리도 얼씬거리면 안 된다.

“야, 움직여!”

조연출의 지시에 현장 스태프들이 팔을 걷어붙이는 순간이었다.

“뭐야?”

갑자기 성지훈의 팬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스태프들의 시선이 망원경을 든 친구에게 자연스럽게 향했다. 그러자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이 오른손을 치켜들고 외친다.

“왔다! 그놈 왔다!”

그 소리에 스태프들이 바싹 긴장한다. 이제 성지훈 팬들이 벌떼처럼 달려들게 분명했다. 자칫하면 인명사고가 날 수 있는 만큼 긴장된 순간이었다.

“야, 바로 들여보내!”

조연출이 외친다. 출입 차들은 입구에서 탑승자를 확인하고 들어가야 하는데, 그걸 생략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소리를 들은 성지훈의 팬들이 우르르 나와서 입구에서 팔을 벌리고 섰다.

“야 뭐하냐! 쟤들 치워!”

건장한 체격의 스태프들이 달라붙어도 막무가내다. 급기야 몇몇은 그냥 바닥에 드러눕는다. 특히 이 인파를 진두지휘하고 있는 성지훈의 팬클럽 회장 조별아는 지금 필사적이었다. 이를 악문 채 괴성을 지르고 있다.

결국 카니발 차량이 멈췄다. 올라가기는 글렀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오냐, 너 오늘 죽었어!”

팔을 걷어붙이는 조별아. 이때 카니발 차 문이 드르륵 열린다.

“자, 준비됐지?”

조별아의 외침. 눈을 부릅뜬 성지훈의 소녀들. 그리고 차에서 내리는 저 나쁜 놈!

“도둑놈은 물러나··· 라······.”

“성지훈을 돌려··· 줘··· 라······.”

그토록 기다린 순간인데, 다들 어째 목소리가 시원찮다. 말꼬리를 흐리고, 피켓이 힘없이 오르내리고, 그녀들이 눈을 깜빡거린다.

지금 보고 있는 게 뭐지. 뭐야? 저거 사람이야?

찰랑거리는 앞 머리카락 사이로 비친 하얀 얼굴, 사슴 같은 눈망울이 그녀들을 바라본다. 회장인 조별아도 일순 멈칫했는데.

“회장.”

“어? 어!”

무리에서 들려온 소리에 그제야 조별아가 정신을 차리고 피켓을 다시 들었다. 잠시 멈췄던 소란은 다시금 이어졌다.

“물러나라! 물러나라!”

좀 전보다 한층 격렬하다. 이때, 누군가 계란을 던졌다.

조연출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계란들이 이시현에게 쏟아진다. 그걸 또 이시현은 묵묵히 맞고 있다. 매니저가 두 팔을 뻗어 막아도 역부족이다.

“당장 우리 오빠 돌려줘! 우리 오빠 내놔!”

“어디서 듣보잡이 온 거야!”

“오빠아!!”

계속되는 시위에 조연출이 안 되겠다 싶어 무전기를 붙잡았다. 촬영 현장에 머무르고 있는 스태프들을 몽땅 부를 참이다.

“여기 입구입니다, 지금 사람들 좀 내려주세요. 여기 지금 개판······.”

그런데 조연출이 멈칫하고 시선을 움직인다. 이시현이 그녀들에게 가고 있었다.

“뭐, 뭐야······.”

선두에 선 조별아가 당황하는 사이 가까이 다가온 이시현이 곧바로 그녀들에게 허리를 숙였다. 깊이, 또 깊이 숙인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더니 고개를 들었는데, 투명한 눈동자에 조별아가 비친다.

“여러분의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 어떤 질책도 달게 받겠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저에게 배역을 양보해주신 성지훈 선배님에게 부끄럽지 않은 모습 보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녀들은 계란 쥔 손을 주저했다. 그러자 이시현이 또 성큼 다가왔다. 피켓을 든 조별아에게 오더니 손을 뻗어 피켓 쥔 손을 감싼다.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아······.”

입술을 머뭇거리는 조별아. 볼은 붉게 달아올랐고, 가슴의 이 느낌은.

‘모. 성. 본. 능.’

이번에는 다른 팬의 손을 잡는 이시현.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그러자 성지훈 팬이 시선을 피하고 속삭인다.

“그, 그렇게까지··· 죄송할··· 일은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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