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11화 (1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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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이시현

“허······. 허허.”

적막이 내려앉았던 회의실은 누군가 토해낸 헛숨과 함께 분위기가 다시 들썩거렸다.

“배우는 배우구만. 우와, 이거 되게 실감나네.”

“와이프와 갈등이 큰 장면인가 본데, 이거 남일 같지가 않은데?”

서로가 한마디씩을 주고받으며 좀 전의 내 연기를 평하고 있다. 반면 내게 연기를 시켰던 블루와이셔츠는 이제야 눈썹을 긁적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 과장.”

“예!”

블루와이셔츠의 시선에 나를 회의실까지 이끌고 온 김 과장이 냉큼 대답을 했다.

“이 친구 데리고 대표님에게 가봐.”

“예.”

김 과장이 서둘러 회의실 문고리를 잡자, 나는 그 뒤를 따르기 앞서 큰 목소리와 함께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허허, 젊은 친구가 아주 인상적이야.”

다들 내게 좋은 평을 내린다. 그래서 마치 1차 관문을 통과한 느낌이었다. 이제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훔치고, 짧은 한숨을 내쉬며 다음 관문에 도전한다.

바이바이 대표의 사무실은 건물 상층인 7층에 있었다.

김 과장은 나를 대표실 비서에게 맡겨두고 홀로 다시 내려갔다. 재깍재깍··· 시간이 흐른다. 기다리는 사이 나는 아까의 상황을 떠올렸다.

‘연기라······.’

어쩔 수는 없다고 쳐도 개운하지는 않다.

‘내가 정말 연기를 해도 되는 걸까.’

이시현의 몸으로, 청년 최재환이 포기했던 꿈을 다시 도전해 봐도 되는 것일까.

생각만으로도 가슴 안에 답답한 무언가가 고이는 것 같았다. 불편하기도 하고, 벅차오르기도 한 이상한 감정들의 조합이다.

‘그럼, 뭐부터 다시 배워야 하나.’

잠시 고민이 이어졌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또 뭘 생각을 하려니 지치네······. 훗.’

세계적인 대배우가 되겠다는 건 황당한 꿈일 테고, 연기력으로 관객을 압도하는 연기끝판왕이 되고 싶은 거창한 생각 또한 없다. 이 몸은 그저 인간 이시현일 뿐. 내 한때의 꿈은 그저 욕심이었고 나만의 만족을 위해서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언젠가 연습생들 중 한명이 진지한 얼굴로 나를 찾아와 물은 적이 있다.

[대표님, 왜 사람은 꿈을 꾸나요?]

그때 녀석이 그런 말을 했고, 그래서 나는 말했다.

[이럴 시간에 가서 연습이나 더 해.]

그리고 그 친구는 그날로 꿈을 포기했다.

‘그때, 조금 다르게 얘기해줄걸.’

무심코 뱉은 말이 그 친구의 인생을 바꿔버렸다. 지금이라면 좀 다르게 얘기해 줄 텐데.

“후······.”

나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왠지 눈이 시큰거려서 눈을 깜빡인다. 그 친구가 만약 내 앞에 있고, 내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지금이라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행복해지고 싶어서.’

그래서 꿈을 꾼다. 내 앞에 커튼이 쳐져 있어 캄캄해도, 그 너머에는 푸른 초원이, 아름다운 호수가 있을 거라는 걸 기대하면서.

‘그게··· 행복인데.’

내가 제대로 못 누려본 그것.

그 친구가 회사를 떠나 찾으려 했던 것.

알고 보면 별거 없는 건데.

‘그래, 이것저것 재는 삶은 한번이면 족하다.’

해보자. 해본다. 오래전 일이라서 가물가물하긴 해도 바닥부터 배우는 신인들에 비하면 이런 나로서도 충분히 이 바닥에서 통할 수 있을 것이란 계산이 든다.

‘최소한 아카데미 출신들 보다는 낫겠지.’

그들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연기선생님들 중에는 책에 나온 걸 그대로 읊는 한심한 선생도 있는데다가, 정형화된 수업 방식으로 인해 배우가 아카데미 출신이라고 말하면 색안경을 끼고 보는 감독과 작가도 있을 정도다.

‘어떻게든 되겠지.’

복잡하게 생각하면 복잡하고, 심플하게 생각하면 심플하다.

‘일단 시작은··· 발성하고 호흡부터일까······.’

어지럽게 늘어진 생각이 얼추 정리될 찰나.

“들어가셔도 됩니다.”

뾰족한 구두코를 내세워 다가온 비서의 말에 나는 생각을 멈췄다. 이어 호흡을 가다듬고 비서가 문을 열어준 대표실로 발을 들였다. 그곳에는 어제 사진촬영을 하는 사이 스쳐봤던 대표라는 여자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검은색 테 안경에 귀가 들어날 정도의 짧은 머리, 옅은 화장을 한 50대 초반의 여성.

“처음 뵙겠습니다. 이시현입니다.”

나는 인사를 했고, 그녀가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한발 가까이가 그녀와 악수를 했다. 작은 그녀의 손에서 단단한 힘이 전해진다. 후··· 보통 여자가 아닌데?

“앉아요.”

나보다 앞서 앉은 그녀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저 눈이 지금 나를, 이시현을 스캔한다.

“사실, 우리는 이시현 씨보다 오소리 씨가 더 적임자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겠지. 이는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오소리는 인생이 망가진다는 것을 당신들은 알 수 있을까?

“더구나 이시현 씨보다는 오소리 씨가 더··· 훨씬 인지도가 높고. 이렇게 말하면 기분 나쁘겠지만.”

“아닙니다. 맞는 얘기인걸요.”

기분이 나쁠 건 없다. 사실이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향해 그녀가 이번에는 다리를 꼬며 물었다.

“그럼 왜 우리가 이시현 씨를 택해야 할까요? 이유가 있을까?”

나는 잠시 그녀를 마주봤다. 그녀의 작은 코 위에 걸친 안경 속에 이시현의 얼굴이 비친다.

“가장 큰 이유는, 오소리 씨는 계약을 하지 않을 거고, 이시현은 할 거라는 사실이죠.”

“훗. 그건 맞네.”

그녀가 피식 웃었다. 화를 내지 않고 가볍게 받아들이며 싱겁다는 반응이다.

“커피?”

“예, 감사합니다.”

잠시 뒤에 대표실 비서가 커피 두 잔을 가져왔다. 대표가 먼저 컵을 들고서야 나도 하얀색 머그컵을 손에 쥔다.

“후······.”

머그컵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증기 사이로 그녀가 얘기를 이었다.

“근데, 우리는 그쪽하고 계약 안 하면 그만인데? 다른 배우나 모델도 많고.”

그녀의 말도 일리가 있다. 아니, 그녀가 하는 말은 모두 맞는 얘기다. 널리고 널린 게 배우이고 모델이니까. 그리고 광고주의 입장에서는 이시현이나 오소리만을 선택지로 둘 필요는 없다. 그건 매우 불필요하고 무능한 일처리다.

“가장 큰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다시 입을 열자 그녀가 호기심 어린 시선을 비스듬히 기울인다.

“이유? 그게 뭐죠?”

“제가, 바이바이 음료를 진짜 좋아하거든요.”

“뭐? 풋··· 하하.”

그녀가 웃음을 터트렸다. 허리를 활처럼 휘고 입술을 가릴 정도의 웃음소리를 냈다.

“이 친구 아주 능청스럽네.”

“칭찬으로 알겠습니다.”

“흠······.”

그녀가 컵을 내려놓는다.

“근데, 나는 이 CF 보다 다른 제안을 하고 싶은데.”

“다른······. 제안이요?”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입가에서도 웃음이 사라졌다.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는 것을 느끼는 사이, 그녀의 시선이 앉아 있는 나를 아래서부터 위로 천천히 훑었다.

“실례되는 제안인거 아는데, 양해해줄 거라 믿고 제안할게요.”

그녀가 꼬고 있던 다리를 내려놓았다. 소파에서 뽀드득 소리가 난다. 그녀의 회색 스타킹 올이 나가 있는 것이 문득 내 눈에 들어왔을 때, 그녀가 말했다.

“나하고 친구를 했으면 하는데.”

“친구요?”

잠시의 이해 끝에 나는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경험이 많은 나도 이런 맥락 없는 전개에는 맥을 못 출 수밖에 없다.

“나하고 친구가 되면, 내가 어느 정도 생활비는.”

“싫습니다.”

나는 바로 대답했다. 생각이고 자시고도 없었다. 나의 이시현이다. 내 배우는 절대 그런 제안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자 그녀가 컵을 다시 손에 쥐고 입에 댔다. 한 모금을 삼키고서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오해를 했나보네요. 나는 순수한 대화 상대를 원할 뿐인데. 정확히는, 젊은 친구와 얘기를 나누고 싶다는······.”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돈을 준다는 것 때문에 오해한 것 같네.”

그녀가 한숨을 뱉는다. 컵을 내려놓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책상에 다가가 손끝을 얹고 나를 돌아봤다.

“돈을 준다는 것은 선을 의미한 거예요. 친구는 되도, 돈이 허락하는 선에서, 또 돈을 주지 않으면 우리의 우정은 끝인 거죠. 그래서 돈을 언급할 수밖에 없었고.”

“그건··· 친구가 아닙니다. 그리고 돈이 오가면 그건 동등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고, 또 그런 관계를 친구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죠.”

“틀리진 않네. 하지만 그쪽으로서도 나쁠 것 없지 않나?”

나는 대답을 멈췄다. 이 여자가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제안을 했는지를 알 수 없었다. 아니다. 지금 이 상황이 너무 매끄럽지가 않다.

바이바이 CF 계약을 기대하고 왔는데, 이 여자는 대체 무슨 생각이야?

‘참내, 어쩐지 너무 쉽다 했다. 근데······.’

이상한 것은 그녀가 이렇게 직접적인 제안을 했다는 것이다. 차라리 브로커를 통하는 것이 깔끔했을 터인데.

‘혹시, 정말 이야기 상대를 원하는 것일까.’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그러나 어찌됐든, 내 답은 거절이다.

“저, 회사에서 휴대폰비용 내줍니다. 매니저가 가끔 라면 한 박스 씩 사다주기도 하고요. 생활비는··· 술집 식당에서 접시 닦은 돈으로 충당합니다.”

“그래요? 그럼 더 잘 알거 아니야, 돈은······.”

“아니요. 저 그래도 행복합니다. 돈 오백 원 있으면 바이바이 음료수 마실 수 있고요. 돈 천원 있으면 집근처 학교 앞에서 떡볶이도 먹을 수 있습니다. 저, 많은 돈 필요 없습니다.”

“···돈이 있다는 건 좋은 거예요.”

그녀의 얼굴이 검은빛으로 물든다. 무슨 오래된 기억이라도 떠올리는 걸까.

“전, 돈보다 더 좋은 게 있습니다.”

“좋은 거?”

“지금이요.”

“뭐?”

그녀가 눈을 찌푸린다.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하긴 나도 지금 횡설수설하는 기분이니까.

“지금 순간이 있습니다. 조금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지금 저는 배우로서 도전할 수 있는 지금 순간이 있고, 그런 저를 믿어주는 매니저와 함께 할 수 있는 지금 순간이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얘기는 못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파를 돌아서 문 앞에 멈춰 섰다. 허리 숙여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인사를 한다. 서로가 바라는 것이 삐걱대면 조율을 할 수는 있지만, 그 방향이 시작부터 다르다면 빨리 틀어지는 것이 좋다.

“내가 실수 했나 보네요. 오늘 만남, 즐거웠어요.”

**

주차장에 내려오니 최재환이 나를 동그란 눈으로 쳐다봤다. 괜스레 죄인이 된 기분이라서 애써 미소와 함께 그를 마주했다.

“미안··· 안 되겠네. 뭐, 다른 일도 찾아보면 있겠지.”

그런데 최재환이 여전히 나를 뚫어지게 본다.

“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야, 대표님이 너하고 나 오라는데.”

“뭐? 아, 그 여자 안 되겠네. 싫다니까.”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 대표님 말이야.”

“뭐?”

지에스엔터테인먼트 대표 차현성.

우리는 곧장 회사로 향했다. 그 사이 최재환과 나는 침묵의 바다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대표가 현장에서 뛰는 매니저를 왜 부를까, 그 위의 팀장을 나두고. 하물며 이시현까지 불렀다. 왜지.

‘왜일까?’

답이 나오지 않는다. 최재환도 딱히 아는 것이 없고.

“형, 뭐 알아?”

“글쎄, 밥이나 한 끼 하자는 건가? 예전에 한번 그런 말 했었는데.”

최재환의 속삭임에 하마터면 나는 코웃음을 칠 뻔했다.

퍽이나.

내가 아는 차현성 대표는 냉정한 사람이다. 그렇다고 바늘로 찔러도 피한방울 안 나오는 정도는 아니지만 분명 꽤 차가운 남자다. 그런 남자가 이유 없이 밥이나 먹자고 부를 리는 없을 터.

정신없이 회사에 도착해 매니지먼트 사업부 2팀 사무실에 들어가니 곧바로 2팀장이 나하고 최재환에게 달려들었다.

“너 이 새끼들, 무슨 짓 저지른 거야?”

“예?”

최재환의 얼굴에 파도처럼 불안이 밀려온다. 나도 영문을 모르는 것은 매한가지니 좋은 표정을 지을 수가 없고.

“따라와 새끼들아.”

2팀장 조진수는 우리를 끌고 대표실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최재환의 얼굴이 검게 물든다. 나는 일부러 그의 옆구리를 툭 쳤다.

씨익.

내가 입꼬리를 끌어 올리자, 그제야 최재환이 픽 웃는다. 그런 우리를 본 조진수가 혀를 찬다.

“이 자식들이··· 지금 니들 놀이동산 롤러코스트 타러 가는 지 알아?”

“아닙니다.”

“이놈들이 사태 파악 못하고.”

조진수가 한소리를 뱉고 나서 우리에게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더니 대표실에 홀로 들어간 그는, 잠시 뒤에 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들어와.”

들릴락 말락 낮은 소리였다. 바로 대표실 안으로 들어간 우리는 순간 흡! 소리를 삼켜야 했다.

대표 차현성

부대표이사 정훈 (경영지원부서 관리)

상무 박창수

부장 윤석규 (매니지먼트 사업부서 관리)

지에스엔터테인먼트에서 이정도의 인물들이면 대통령 휘하의 청와대 인선들이 다 모인 것과 다름없다. 대체 이곳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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