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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이시현
“잘해라.”
최재환은 차에서 내리는 내 등을 손바닥으로 찰싹! 때리며 말했다. 어제에 이어 또 바이바이 회사에 찾아오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오늘 새벽, 술집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오피스텔에 돌아온 나는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그런데 아침부터 최재환이 들이닥쳤다. 비몽사몽의 나를 대충 씻기고, 옷을 입히고, 소파에 앉히더니, 눈을 비비고 있는 내게 바이바이에 가야 한다는 얘길 한 것이다. 얼마나 황당했던지.
‘부서 회의를 거치기에도 빠듯했을 시간인데······.’
솔직히 말해서 잘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확실히 될 거라고는 자신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렇듯 직접 오라는 걸 보니 아무래도 고위급 간부들이 한번 보겠다는 뜻 같았다.
다만 걸리는 것이 하나 있다면.
‘왜 나 혼자 보자고 했을까.’
최재환은 여전히 차에서 내리지 않고 있었다. 그를 돌아보니, 그는 내게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입술 모양은 퐈. 이. 팅! 을 외치고 있다.
바이바이에서 배우 혼자 오라고 했기 때문이다. 아주 없는 일은 아니지만 배우 혼자서 광고주를 찾는 경우는 이례적이다. 거의 없는 일이라고 봐야 한다.
“어, 왔어?”
입구에는 어제처럼 김 과장이라는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걸음을 재촉했고, 나 역시도 괜스레 조급해져서 서둘러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혹시··· 시현 씨, 우리 대표님하고 알아?”
김 과장이 이마 가득히 주름을 만들고 물었다.
“예?”
“아니 그게, 대표님이 직접 지시를 했단 말이야.”
김 과장은 별일이 다 있네, 라는 혼잣말을 했다. 그 사이 3층 사무실에 도착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어제 본 여직원들이 반갑게 알은 척을 했다.
“어머, 이시현 씨!”
“안녕하세요.”
나는 미소와 함께 그녀들을 눈에 담았다. 끼를 부린 어제의 행동은 조금 과했던 듯싶어서 오늘은 자중할 생각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의 호감어린 시선이 내 몸에 달라붙는다.
안다 알아, 이시현의 몸이기에 가능한 일인 거.
일단 잘생긴 사람의 행동은 호감으로 받아들여지며, 거기에 더해서 이시현은 배우다.
어제 기획부서 팀장과 단 둘이 대화를 나눴던 최재환은 그 점을 피력했다고 한다. 이제 곧 단막극을 시작으로 승승장구할 친구라며 팀장을 설득했다는 것이다.
“이시현 씨.”
“예.”
김 과장이 회의실 앞에서 멈추더니 나를 돌아봤다. 그가 옅은 눈썹을 찌푸린다.
“시현 씨, 우리 대표님은 여자가 아니야.”
“예?”
무슨 소리인가 싶어 가만히 있으니 김 과장이 다시 말했다.
“태도 조심하라는 거야. 오늘은 혼자잖아?”
“···알겠습니다.”
비즈니스라 이거지. 오케이, 알았다고.
김 과장을 선두로 회의실에 들어가자 회의실 안에 어제와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대부분이 중년의 남성들이었다. 여성도 있지만 웃고 대화를 나눌 분위기는 아니었다.
“이시현 씨?”
“예.”
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내가 여기서 왕이야, 하는 분위기를 가진 남자다. 넥타이 없는 블루와이셔츠, 적당히 넘긴 가르마가 중후한 분위기를 풍긴다.
“그 자리에서 한번 천천히 돌아보겠어요?”
“예.”
나는 그가 시킨 대로 행동했다.
지금의 나는 Merchandise. 즉, 상품이다.
다행이라면 천장에 실내등이 켜져 있었고, 이시현의 얼굴은 조명의 흡수와 반사를 적절히 받아들일 줄 안다는 점이었다.
“나쁘진 않네.”
누군가 한마디 감상을 뱉었다. 반면 좀 전에 내게 돌아보라고 지시한 블루와이셔츠는 눈을 한번 깜빡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미간을 좁힌다. 그러길 잠시, 그가 다시 말했다.
“좋아요. 배우라고 했나요?”
“예, 아직 부족하지만 노력하고 있습니다.”
“흠, 뭐 대사라던가 한마디 할 수 있나? 목소리 톤 좀 듣게.”
이들은 지금 내게 즉흥연기를 요구하고 있었다. 나를 보는 수많은 눈동자들이 기대를 갖는다. 혹은 그저 신기한 듯이 보는 지도 모른다.
‘젖소 옷 입고 뛰는데··· 연기력이 필요해?’
황당하다. 분명히 내가 알고 있는 바이바이 CF에는 연기력이 필요한 부분이 없다.
하지만 이들은 내게 그걸 시킬 권리가 있다. 그러니 어찌됐든 이들 앞에서 나는 연기를 선보여야 하며, 상품으로서의 만족도를 채워 줘야 한다.
‘하지만 또 연기라니.’
어제만 해도 나는 이시현이 배우를 지향했다고 그것에 집착할 생각은 없었다. 젊다는 것은 다른 수많은 발전 방향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렇게 된 거.
‘까라면 까야지.’
내가 입이 닳도록 연습생들에게 했던 말이다. 카메라가 돌면 빼는 건 있을 수가 없다고, 아주 닦달을 했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최재환이라는 남자는 배우의 꿈을 접고 매니저가, 그리고 연예기획사의 대표가 됐다. 그러니 이제와 연기를 한다는 얘기는 지금 있는 것으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지금 가진 제대로 된 무기, 그것은 경험.
“후······. 후!”
심호흡 뒤에 나는 눈을 부릅떴다. 지금 순간 지난날의 한 페이지를 떠올린다.
언제부터인가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 외국에 머물던 아내와 연락이 잘 되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물어봐도 별 볼일 없는 대답만 들어야 했고.
그래서 한번 날 잡고 아이들과 아내가 있는 필리핀에 간 적이 있는데··· 그날, 나는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게 됐다.
그때의 기억을 상기하며 천천히 입을 연다.
“나는 그게 당신만의 잘못이라고 하고 싶지는 않아. 그래, 당신도 힘들었겠지. 타국에서 아이들 뒷바라지 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어.”
대사가 잠시 멈췄다. 나는 지금 아내의 변명을 듣고 있다. 여기 이들에게는 아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내 얼굴을 보면서, 내가 지금 어떤 변명을 듣고, 어떤 기분인지를 알았으면 좋겠다.
“나 지금··· 당신 탓하자는 거 아니잖아. 그런 말을 뭐하러해? 내가 이혼하재?”
때로는 대화에 있어서 단어 하나가 기폭제 역할을 할 때가 있다.
어떻게 보면 ‘폭’이라고 할 수 있는데, 금지된 단어를 꺼내는 순간 대화의 폭, 혹은 갈등의 폭이 넓어지는 것이다.
이혼이라는 단어를 꺼낸 순간 아내가 그러했다. 그녀는 극렬하게 반응했다. 급기야 나도 화를 쏟고 만다.
“내가 이혼하자는 말이 아니잖아!”
그러고 보면 아내는 늘 극단적이었다. 뭐든지.
“나라고 혼자 사는 게 좋은 지 알아? 마누라와 애들 내버려두고 기러기 생활하는 게 즐거운지 알아? 혼자라서 자유? 누가 그래! 나 이번 생일에 편의점에서 인스턴트 미역국 사서 밥 말아먹었어, 혼자서 말이야!”
아내가 다음에는 뭐라고 했더라. 기억은 잘 안 나는데, 가슴이 아프다.
“내가 잘났다는 거 아니잖아. 그저, 나도 최선을 다했다는······. 그 말을 하고 있잖아.”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른다.
나 최재환은 미련했던 걸까. 아니면 그냥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걸까. 그런 쓸데없는 잡념을 털어내며 내 짧은 즉흥연기는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