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성왕국이여 안녕
계획은 차근차근 진행됐다.
“신이시여, 정의로운 도둑이 되는 걸 허락해 주세요!”
대륙급 괴도 ‘세인트’가 움직였다. 물론, 진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도둑이 어떻게 정의로워? 애초에 정의로운 도둑이 뭔데? 이게 허락을 구하는 거냐? 통보지.’
진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신의 관대함을 느꼈다.
‘어휴. 나까지 없어 봐. 내가 괜히 성자가 아니라니까? 신님들 챙겨 드리는 건 나밖에 없어요.’
[뭐, 틀린 건…… 푸흡…… 없지. 와. 저걸 자기 입으로 말할 거라곤 생각도 못했네.]
로메른은 재밌다는 듯 낄낄거렸고.
[……신이시여. 진 세인트를 용서해주세요. 악의는 없나이다.]
어째서인지 루나가 옆에서 계속해서 기도했다.
뭐, 성녀라 그런 모양이었다.
아무튼 아기를 바꿔치기하는 건 성공적이었다.
“……살면서 아기를 훔칠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요.”
괴도 메이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아니, 선생님. 애초에 죄책감을 가질 거면 도둑을 하시면 안 되죠.’
진이 보기엔 프로 의식이 부족했지만, 그렇다고 그걸 그대로 말할 순 없었다.
그녀는 정보팀의 최고 현장 요원이었다. 그러니, 그녀의 행동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려 줘야 했다.
“이 일은 작게는 왕국. 크게는 세상을 위한 것이지만, 아이를 위해서기도 합니다.”
“부모와 떨어진 게 아이를 위해서라구요?”
진은 서류 꾸러미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아이들의 부모라고 할 수 있는 귀족들의 행적이 적인 서류였다.
그 안의 내용은 참혹했고, 끔찍했다. 그들은 악인이었고, 악당이었다.
“부모는 아이에게 많은 영향을 끼칩니다. 세인트 괴도님께선 아이들을 구원하신 겁니다.”
“…….”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죄책감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반대로 진의 말이 맞다는 것도 깨달았다.
“아이들은 교단으로 보낼 생각입니다. 누구보다 더 빛나고, 순수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잘 부탁드려요.”
여전히 혼란이 남아 있지만, 그녀는 나름대로 납득한 것 같았다.
왜냐?
틀린 말은 하나도 없으니까.
‘아니지. 이거 잘하면…….’
이대로 그녀를 그냥 보내는 건 좀 아쉬웠다. 게다가 죄책감을 가지게 한 채로 보내는 건 불안하기도 했고.
그럼, 방법을 달리 써야 한다.
그녀도 행복하고, 진도 행복한 그런 방법!
“조금 걱정이 되신다면 괴도님께서 지내시는 지역으로 보내겠습니다.”
“저, 정말요?”
“오히려 제가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괴도님께서 이 아이들을 돌봐 주신다면 저도 걱정을 덜 것 같습니다.”
“감사해요. 아이들은 제가 챙길게요!”
이렇게 진은 아이들의 관리까지 성공리에 짬 때렸다.
육아는 지옥이다.
이를 모르는 귀족가 아가씨는 이제부터 지옥을 맛보겠지만, 이제 그 일은 진의 손을 떠나 버렸다.
‘뭐, 정 힘들면 유모 구하겠지.’
이제 아이들의 책임 소재는 괴도 ‘세인트’에게 있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환한 얼굴로 아이들을 데리고 귀환했다.
그녀도 만족했고, 진도 만족했으니.
모두가 해피 엔딩이었다.
[……와. 이걸 해피 엔딩이라고 하네. 아니지. 맞나? 와. 나도 헷갈리네.]
[허어. 화를 내고 싶지만, 틀린 말이 없어서 뭐라 말도 못 하겠구먼.]
정령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긴 했지만 말이다.
‘아니. 다들 일 안 할 거야? 구경났어? 시간은 금이라고, 친구들!’
이놈들이 왜 금을 낭비하지?
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해먹에 몸을 뉘었다.
‘아. 역시 집에 있는 것만 못하네.’
그래도 적당히 편했다.
[저, 저! 낭비는 그대가 제일 많이……!]
[아, 검성! 쫌 조용해! 저 녀석이 낭비 안 하면 뭐 이상한 아이디어 가져온다고!]
[……알겠네.]
늦었다 이놈들아.
진의 머릿속에 재미난 생각이 번뜩였다.
‘로메른. 혹시 이런 거 가능해?’
[아, 또 뭐! 아직 연구 정리도 안 됐다니까!]
‘아니. 그냥 아이디어야. 아이디어.’
[검성-!]
[허허. 난 일이 있으니, 가 보겠네.]
역시 쉬어야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법이다.
* * *
로메른이 연구를 진척하며 진의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동안, 추기경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제국의 회의장.
“……성역까지 선포됐습니다. 이건 하늘의 교단과 빛의 교단. 신앙과 관련된 일입니다. 그대들이 개입할 일이 아닙니다.”
추기경은 각 왕국의 대표들과 제국의 대표 앞에서 마치 선언하듯 말했다.
“그대들이 성역에 개입한다는 건, 신성의 영역에 개입하겠다는 뜻입니다.”
정치의 영역에 있는 문제를 신성의 영역으로 끌고 가는 것.
진이 생각한 대로…… 아니. 생각 이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앞서 설명한 대로 이곳은 교단이 관리하겠습니다. 그것이 신의 뜻입니다.”
물론, 왕국이나 제국 쪽 인사들도 만만치 않았다.
고작 도시 하나긴 해도, 성왕국은 여러 왕국의 완충 지대 역할을 맡은 곳이다. 그곳에 교단이 들어온다는 건, 확실히 껄끄럽다.
반격이 시작됐다.
“좀 이상하군요. 왕국에 메뚜기 떼들이 발발했을 때, 빛의 교단의 성자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귀족이 보고서를 보며 읽기 시작했다.
“신은 인간을 벌하지 않으신다. 이 땅에 사제를 보내 죄를 짓지 않게 가르침을 전파하신다. 사제들이여, 그것이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다.”
“그들은 우리를 부정했다. 신의 선한 의도를 뒤틀었고, 사람들에게 신은 천벌을 내리는 분이란 인식을 심어 줬다.”
“그렇다면, 그들이 모시는 신은 무엇인가! 죄를 짓는다고 천벌을 내리는 그들의 신은 대체 누구인가!”
“사교도들이다. 사특한 것을 신으로 모시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대체 누가 이런 끔찍한 벌을 내린단 말인가.”
놀라운 정보력이었다. 마치 그때 있었던 일을 모두 수기로 적어 놓은 것만 같았다.
“전부 성자님이 하신 이야기입니다. 지금 추기경님께선 성자님이 하신 이야기를 부정하고 계십니다.”
그야말로 완벽한 외통수였지만, 추기경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진이 했던 말을 곱씹으며 뿌듯한 표정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허허. 성자님의 말씀을 다시 들으니 신앙이 충만해지는 기분입니다. 맞습니다. 그건 성자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추기경이 그 이야기를 받아들였다.
“그럼, 성왕국에 있던 건 천벌입니까? 아닙니까?”
반대 측 인사들은 계획대로 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데, 추기경의 입에선 상상도 하지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천벌입니다.”
“……그게 무슨. 조금 전에 맞다고 하셨잖습니까!”
“그것도 맞습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들은 불같이 화를 내며 입을 열었지만, 추기경은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다.
“사실 그대로를 말씀드린 겁니다. 빛의 신께선 천벌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그게 무슨……!”
그들이 반박하기 전에, 추기경의 입이 먼저 열렸다.
“하늘의 신께선 다르신 모양입니다.”
“……예?”
추기경의 말은 간단했다.
응. 우리 빛의 신께선 안 그러셔.
근데, 하늘의 신은 아닌가 보네?
“교단마다 교리가 왜 다르신 줄 아십니까? 신께서 추구하시는 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하늘의 신과 빛의 신은 같은 신이 아니다.
서로 교리도 다르며, 추구하는 방향 또한 다르다.
한쪽은 성왕국이 됐고, 한쪽은 여전히 교단으로 남아 있으니까.
“게다가, 마충이 창궐했을 때와는 전혀 다릅니다. 신벌은 오직 사제만을 향했습니다. 일반 피해가 있었습니까?”
“…….”
“없었을 겁니다. 신께선 전능하시기에, 절대 실수가 없으시니까요.”
“…….”
“만약 이게 천벌이 아니라면, 이야기는 더 복잡해집니다. 이런 힘을 개인이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그게 가능합니까?”
이곳에 모인 대표들은 바보가 아니다.
성왕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미 보고서를 전부 받았다.
마력적 흔적은 없으며, 그나마 남아 있는 건 찬란할 정도로 밝은 신성력뿐.
애초에 번개를 다루는 성법이 존재하지도 않는다. 성법과 마법은 그 체계부터가 완전히 다르니까.
이 힘은 ‘개인’이 가질 수 있는 힘이 아니다.
물론, 이런 반박이 나올 수 있다.
귀족 중 하나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추기경에게 물었다.
“집단이라면 어떻습니까? 교단의 전력을 투자하면 불가능하지 않잖습니까?”
개인이 아닌 집단이라면?
그럴싸한 가정이지만, 그건 실수였다.
허허롭게 웃고 있던 추기경의 분위기가 변했다.
한평생 역병 지대를 떠돌며, 절망과 마주한 사제의 ‘본신’이 드러났다.
“지금 우리 교단이 사적 제제를 위해 움직였단 말이십니까? 우리 교단이?”
공기가 무겁다.
숨이 막힌다.
이건 신성력이 아니었다.
그저, 오랜 세월 쌓인 ‘업’.
위엄 혹은 아우라, 분위기라 불리는 무언가가 추기경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제야, 이곳에 모인 이들이 다시 한번 깨달았다.
눈앞에 있는 노인이 빛의 교단의 추기경이란 것을.
사과한 것은 제국 측 대표였다.
“경솔했습니다. 사과드립니다. 이곳에 있는 모두는 빛의 교단의 신앙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며 추기경을 바라봤다.
빛의 교단을 자극할 필요 없다.
이미 충분한 족쇄로 그들을 묶어 두었다.
사람들은 신실하고 자애로운 사제의 표본이라 말하지만, 이곳에 모인 이들은 알고 있다.
미치광이 집단.
사욕이 생기면 채찍으로 등을 후려치고, 오직 신을 위해 살아가는 광신도들이란 것을.
그 사과에 회의실을 가득 채운 무거운 공기가 사라졌다.
추기경은 원래의 모습인 자애로운 노인으로 돌아왔다.
“허허. 괜찮습니다. 왕국 밖이니 빛의 교단을 잘 모르시는 분도 계실 테니까요.”
모를 리 없다.
빛의 교단의 봉사는 왕국에 국한되지 않는다. 대륙 전체에 퍼져 있으며, 사람을 돕고 봉사한다.
왕국의 그 난리가 났을 때도, 봉사를 멈추지 않았으니까.
교단의 최고 무력인 첫 번째의 검이 왕국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으니까.
귀족들이 입을 다물고,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고 있을 때.
제국의 대표이며, ‘지식의 해방’의 일원인 그는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교단도 아니라면…….
남은 것은 하나뿐이었다.
‘성자의 개인 힘이라면?’
성자는 교단의 순혈이 아니다.
그저 귀족가 삼남에서 성자가 된 인물이었다. 심지어 용을 소환하는 성법을 받았으니 가능할 거 같기도 했다.
‘그렇다 해도…….’
여전히 설명되지 않는 것이 많다.
드래곤이 움직였어도 마법적 흔적은 남아야 했다.
만약 어떻게 숨겼다고 해도, 대체 대성법진은 어떻게 뚫었단 말인가.
애초에 인간이 성역을 선포하는 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그것을 개인 맘대로 활용할 수 있다?’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었다.
오히려, 추기경의 설명이 더 그럴싸했다.
‘성자가 신의 그릇이 되어 움직인다.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
그렇다면 그를 막기 위해선 어떻게 움직여야 할까?
그 해답은 이미 추기경이 주었다.
‘계속해서 신이 강림할 상황을 만들어 생명을 깎아 나간다.’
왕국과 빛의 교단을 하나로 만든 것도 성자였으며, 모든 계획의 변수가 되는 것도 성자였다.
심지어, 왕국을 담당하던 ‘지부장님’을 죽인 것 또한 성자였다.
그러니 성자를 죽여야 했다.
성자를 죽여야 어긋나고 있는 톱니바퀴를 제대로 돌릴 수 있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국 측은 성왕국 지역을 교단에 할애하는 걸 동의합니다. 그 누구의 땅도 아닌, 성지로서.”
그에게 계속해서 강림할 상황을 던져줄 것이다.
신은 계속해서 그에게 강림할 테고, 인간의 생명은 유한하니 성자는 천천히 죽어 갈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목표는 달성될 것이다.
“다른 왕국분들께서도 제국의 뜻을 따라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지금과 달라질 건 없습니다. 성왕국 대신 교단이 자리할 뿐입니다.”
그의 요청에 다른 왕국들 대표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이 모임은 제국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허허. 제국의 배려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성역이 선포된 이상 신성의 영역이니 애초에 그곳은 교단의 땅이 맞습니다.”
그렇게 성왕국이었던 도시는 교단의 손에 ‘공식적’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