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작가의 정령 천재-132화 (132/210)

132. 세느 백작가

기선 제압은 완벽했다.

성벽에 있는 그 누구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곧장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

진은 손가락을 올려 입에 가져다 댄 뒤, 힘차게 불었다.

휘---익!

그 휘파람 소리에 직계로 보이던 이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 그것을 어찌!?”

진이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허허. 아직도 이걸 쓰는 모양이구나.”

“……아직?”

“가문이 이리도 개판인데, 내가 만든 것들이 남아 있긴 하구나.”

더 놀랄 수 있나 싶었는데, 진의 말이 이어질수록 직계는 소스라치게 놀라 진을 바라봤다.

“그건…… 초대 가주님께서 만드신…….”

여태까지의 경험을 비추어 보면, 여기선 대답하지 말아야 했다.

“…….”

아무런 말도 빤히 바라보기만 하면.

“……초대 가주님?”

알아서 이렇게 오해해 주기 마련이다. 진은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성안 쪽을 향해 소리쳤다.

“비상 신호가 오갔는데! 어찌하여 가주란 놈은 나오지도 않는 것이냐!”

마나가 가득 담긴 목소리가 가문 내부에만 쩌렁쩌렁 울렸다.

밖으로 한 치도 새어 나가지 않는 신기에 가까운 마나 컨트롤을 본 기사들은 아연실색했다.

곧이어, 진이 있는 곳으로 무언가 날아왔다.

진은 토검을 들어 그것을 자연스럽게 흘려냈다.

“조잡하다!”

날아온 것은 다름 아닌 ‘검기’였다. 검기를 발출할 정도의 고수가 진을 공격한 것이다.

진이 자연스럽게 막아 내자, 마치 시험하듯 진을 향해 검기가 쏟아졌다.

“기운만 엉망이 아니라, 연계마저 조잡해!”

검기를 하나씩 걷어 낼 때마다.

“이게 검기라니 통탄할 노릇이구나!”

잔소리가 쏟아졌다.

“마나 덩어리를 쏘아 낸다고 그게 검기엔 게냐!”

“검에 ‘념’이 담기지 않으니. 그저 마나일 뿐이지!”

“부족하구나!”

“모자라!”

“검술을 남겨 주석까지 달아 줬건만 어찌 이따위밖에 익히지 못한 것이냐!”

어느 순간 날아오던 검기가 끊겼다.

“그래도 주제 파악은 하는구나. 당장 오지 못할까!”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저 목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세느 백작가에 들어와 그따위 모욕을 쏟아 내다니! 그대는 대가를 치를 것이다!”

“허허.”

그 말에 진은 헛웃음을 흘렸다.

“가문보다 중요한 것이 검이라고, 내가 누누이 말했거늘!”

진은 토검을 들어, 검기가 날아온 방향으로 천천히 휘둘렀다.

검끝에서 완벽한 ‘검기’가 발출되어 날아갔다.

소리마저 베어 내고, 공기마저 베어 내고, 가주가 몸을 숨긴 벽마저 베어 냈다.

놀랍게도 그 검기는 가주의 몸에 닿기 바로 직전에 사라졌다.

“빨리 오거라. 시간이 없으니.”

진의 말에 가주는 반응도 하지 못했다.

완벽한 검기 컨트롤.

어째서 자신에게 부족하다고 했는지 이해가 되는 실력.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못할 드높은 경지에 넋이라도 나간 듯했다.

“어서!”

진이 소리를 치고 나서야, 그는 정신을 차리고 진에게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못난 후손이 선조님을 뵙습니다. 불손하게 확인하여 정말 죄송합니다.”

완벽한 태세 전환.

고작해야 검기를 보여 줬다고 이런 결과가 나온 걸까?

전혀 아니었다.

확인이 끝난 것이다.

“폼멜. 고 아이들이 확인을 끝마친 모양이구나.”

폼멜.

가주를 비롯한 직계 몇몇만 알고 있는 세느 백작가의 비밀 조직이다.

“……그렇습니다.”

“체계마저 무너진 줄 알았더니 다행히 그건 무사한 모양이구나.”

“……죄송합니다.”

이걸로 진이 초대 가주라고 백작이 믿었을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애초에 믿고 안 믿고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새파랗게 젊은 진이 혀를 차며 말하고,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백작이 고개를 숙이는 기묘한 상황.

이 상황이 유지되는 게 중요했다.

적어도, 가주는 진의 말을 들어볼 생각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니까.

그럼, 이쪽도 움직여줘야 했다.

“어떤 멍청한 놈이 가문 폐쇄라는 개짓거리를 한 것이냐?”

누구긴 누구야.

“……접니다.”

눈앞의 가주지.

* * *

진은 하나의 스토리를 만들었다.

“내가 이 아이의 몸에 들어오게 된 건 이 아이의 요청도 있었지만, 개인적인 욕심도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 ‘스토리’는 거짓말이다. 이곳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급조한 이야기였으니까.

하지만, 스토리에 무엇을 섞느냐에 따라 거짓이 진짜로 변하기도 한다.

“세상이 어지러워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여, 검산에 있는 칼잡이들의 검을 좀 봐주었다. 내가 이 요청을 수락한 건 겸사겸사 우리 가문 녀석들도 도와줄 수 있으니 수락해 준 것이었지.”

과거의 ‘사건’에 새로 만든 스토리를 섞으면 그럴싸한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가문을 폐쇄했다더구나?”

검산의 검신이 나타난 이유.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는 이유.

그 두 가지가 합쳐졌다.

“대체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짓거리냐!”

그 꾸중에도 가주는 흔들리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건 하루 이틀 만에 결정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가문의 명예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 명예를 되찾기 위해선 특별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문의 미래를 위해.

과거가 되어 버린 명예를 위해.

가주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러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명예?”

“그렇습니다.”

“무슨 명예? 우리가 진짜 귀족이냐, 이놈아!”

“……귀족입니다.”

그것도 그냥 귀족도 아니었다.

50년 전만 해도 ‘명문’으로 불리던 가문이었다.

드높은 명예와 최고의 검사를 배출하는 명문 중의 명문!

“뭔 개풀 뜯어먹는 소리냐! 똥지게 지던 놈들이 비싼 옷 입으니까 진짜 귀족인 줄 아는 게냐?”

“……선조님.”

가문의 치부이며, 악착같이 지워 낸 역사.

귀족이 되기 전 가문의 ‘업’이 튀어나왔다.

“똥지게 대신 검을 들고 이 자리까지 올라온 것이다. 우리에겐 핏줄이니, 명예니 이딴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

그 직설적인 이야기에 가주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검이다. 이놈아! 우리에겐 검이 명예고, 핏줄이다!”

검이 곧 가문이었다.

“그러니, 우리가 가주 선발을 직계만이 아닌 방계까지 합쳐서 진행하는 것이다.”

한데, 가주의 표정이 이상했다.

뭔가 허를 찔린 듯한 표정.

“설마, 가주를 직계에서 선발하는 게냐?”

“세상이 많이 변했…….”

“이노오옴! 재능을 봐야지 핏줄을 보면 무엇하느냐! 애초에 대단치도 않았던 핏줄을!”

“선조님의 핏줄입니다.”

“허! 내가 재능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게냐? 아니지. 그러니 가문을 폐쇄해 수련한다는 오만한 생각을 한 것이겠지. 내 부덕이구나! 부덕이야!”

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널 두드려 패서라도 그 정신머리를 고쳐 주고 싶지만…… 그렇게 쓸 시간이 없다.”

“다른 볼일이 있으신 겁니까?”

진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이렇게 이 아이의 몸으로 움직일 수 있는 건, 이 아이의 생명을 태운 덕분이다.”

“……생명 말입니까?”

“성자가 괜히 단명하는 줄 아느냐? 큰 힘을 사용하는 데 큰 대가가 필요하니 그런 법이지.”

가주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성자의 희생 정신이 아니었다.

‘성자는 어째서 몸을 빌려줬을까?’

단순히 성자라서?

그럴 리 없다.

이 혼란한 시기에 자신의 생명을 태우며, 도와주는 건 이유가 있다.

그때, 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오만하되, 멍청하진 않구나.”

“…….”

가주는 마치 속마음을 들킨 기분이었다.

“하지만 틀렸다. 착해 빠져서 못이기는 척 날 도와줬을 뿐이다.”

“아무런 대가 없이 말입니까?”

“너희가 가진 것 중에 성자한테 필요한 게 있기는 하고?”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 녀석의 물렁함이 너희에겐 복이니. 때때로 챙겨 주거라. 뭐, 챙겨줄 일이 있을까 싶긴 하지만 말이다.”

진의 말대로였다.

성자에게 그들이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이미 감찰의 힘을 얻었고, 왕의 신임을 등에 업고 있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여까지 하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꾸나.”

진은 바닥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그러자, 손에서 마나가 흘러나오더니 땅에 무언가 적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고 있던 가주는 깜짝 놀랐다.

그곳엔 가문의 검술이되 가문의 검술이 아닌, 무언가가 적혀 있었다.

“인간의 몸을 벗어 던진 후에, 작게나마 잡은 깨달음이다.”

진이 작다고 말했지만, 가주는 정반대의 감정을 느꼈다.

너무나 거대했다.

그건 작은 깨달음이 아니었다.

그들에겐 혁명이었으며, 검술의 진일보나 마찬가지였다.

“보이느냐? 우리의 검은 수련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싸워라. 투쟁해라. 그러다 보면 가슴에 ‘뜻’이 설 것이다.”

싸우고 투쟁하려면?

“그러니, 가문을 폐쇄하는 멍청한 짓 하지 말고 나가거라. 지금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 우리의 검술이 발전하기 좋은 세상이니.”

당연히 나가서 싸워야 한다.

그런 그들의 싸움이 진의 귀찮음을 덜어줄 건 ‘덤’ 같은 거였다.

“그리고, 영약 하나 챙겨놓거라. 내가 가고 나면 이 녀석이 피를 토하며 쓰러질 터이니.”

“예……?”

그는 되물을 수 없었다.

“커헉!”

진이 피를 토하면서 쓰러졌으니까.

* * *

아름다운 바닷가.

진은 선베드에 누워 모히또를 한잔 마셨다.

-……이래도 되는 거야?

현자가 옆에서 물었다.

“안 될 이유가 있어?”

-아니. 그래도…… 이거 사실상 사기나 마찬가지 아니야?

“어허. 사기가 뭐야 사기가. 로메른!”

진이 로메른을 부르자, 녀석이 웃으며 대답했다.

[진실을 모르면 성자의 기적이고, 진실을 알아도 세상을 구하기 위한 성자의 선한 거짓말이지. 선한 거짓말로 선한 영향력을 만드는 숭고한 행위. 성자에게 딱 맞지 않아?]

-……넌 루나가 있는데 잘도 그런 소리를 한다?

[전 괜찮아요. 사실 의도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결과적으로 어떤 결과를 냈냐가 중요하지.]

-세상에.

성녀마저 나쁘지 않다고 평하는 말에, 현자는 혼란을 느끼며 검성을 바라봤다.

[허허. 기분 좋더군. 이게 자네가 말한 사이다인가? 꾸짖을 갈이라니. 이건 내가 적어 놨다가 나중에 써먹을 생각이네.]

-……거, 검성?!

마치 배신당한 것처럼 현자가 검성을 불렀다.

그러자, 검성은 헛기침을 한 뒤 원래의 근엄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나도 만족일세. 과정이야 어떻든, 모두에게 좋은 영향을 끼쳤으니.]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매일 강조하던 건 검성 아니었어?

[아. 그거? 바뀌었다네. 좀 더 유연성을 두기로 했지. 과정 때문에 결과가 실패인 건 이미 경험해 봤으니.]

-그건……! 그렇지.

현자가 고민에 빠졌을 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나도 이 방식이 정답이라곤 생각하지 않아. 그래도 최선에 가까운 방법이라곤 생각해.”

[나도 동의하네. 쪼잔하고, 옹졸할 때도 있지만 적어도 그는 세상을 구한다는 목표를 착실히 진행 중이니.]

[저도요. 성자로서 그는 최고는 아니지만, 최선을 행하고 있어요.]

[나도야. 진을 처음 만났을 때 처음으로 현자, 네 방법이 맞았다고 생각했으니까.]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괜찮다고 말한다.

물론, 현자가 보기엔 전혀 괜찮지 않았다.

그래도.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나 보네.

자신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랜덤 설정하고 뽀록 터진 거지 뭐.]

[맞아요. 사실 현자는 너무 꽉 막혔어요. 진이 이런 줄 알았으면, 선택했을 리 없죠.]

[허허. 그래도 그렇기에 우리가 현자를 믿은 거 아닌가. 그대들은 평가가 너무 짜구먼.]

엉망진창이지만 나쁘지 않았다.

“그럼, 다음은 루나인가?”

-어? 이대로 끝이야? 바로 돌아가게?

“당연하지. 나머진 지들이 알아서 하겠지.”

-그래도 괜찮아?

“가문 폐쇄가 목표였고, 우린 달성했잖아. 이 양반들 나서면 혼란도 정리될 테고, 세상에 도움이 될 테니 완벽하지 않아? 약간 짬때린 거긴 하지만.”

-……짬이라니.

진짜 나쁘지 않은가?

[맞아요! 이제 제 차례에요!]

“좋다. 성녀여. 그대의 소원은 무엇이지? 크큭. 내가 모두 이뤄주겠다!”

아니. 다시 보니까 나쁜 거 같기도 했다.

-이게 세상을 구하는 거라고?

놀랍게도, 세상을 구해지긴 했다.

-이젠 모르겠다.

자신이 했을 때보다 훨씬 더.

“성녀여, 소원을 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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