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검성의 이유
최후의 승자는 다름 아닌 ‘검성’이었다.
[이거 사기야! 결정적일 땐 검성이 맨날 이기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았어?]
[허허. 그저 운일세. 아니면, 자네는 내가 수작 부리는 것도 모를 정도로 멍청한 겐가?]
[투정은 거기까지 해요. 로메른. 추해요.]
[뭐!? 추해?! 아니. 이건 정식 항의란 말이야!]
[허허. 그럼 인정하게. 그대가 부족한 것을.]
[너 검성!]
나이를 먹는다고 어른이 되는 게 아니다. 회귀까지 한 정령들의 말싸움 수준은 정말이지 처참했다.
게다가, 진이 보기엔 검성이 승리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한평생 검을 연마하며 몸을 써온 검성이 상대방이 뭘 낼지 알아보지 못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으니까.
‘저 녀석들이 이걸 모를 리도 없을 텐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대충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양보해 준 건가?’
검성이 제일 급하다는 걸 알고, 자연스럽게 양보해 줬다는 게 가장 그럴싸한 해답이었다.
[이 음흉한 영감탱아! 다음에 수작 부리다 걸리면 손목 날아갈 줄 알아!]
[허허. 그건 그대의 실력이 늘어났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겠지. 그대는 게임 센스가 절망적일세.]
[뭐? 내가 개못한다고!? 진짜 이 영감탱이가!]
물론, 저 말다툼을 보고 있자니 동료를 위해 아름답게 양보한 건가 싶긴 했지만.
‘뭐, 중요한 건 아니지.’
어쨌든 검성의 문제부터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게 중요했다.
‘그럼, 목적지 정해진 거지?’
진은 투덕거리고 있는 정령들 사이에 끼어들며 말했다.
그러자 검성과 로메른은 자연스럽게 하늘로 올라가 투덕거리기 시작했고, 대답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젓고 있던 루나가 했다.
[예. 가장 먼저 검성의 문제부터 해결하면 될 거 같아요.]
‘저건 언제 끝나는데?’
진이 로메른과 검성을 가리키며 말하자, 루나가 곧장 입을 열었다.
[매번 있던 일이에요. 금방 끝나요.]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자주 있던 모양이었다.
저 둘을 당장 불러 출발할 수도 있었지만,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것 중 하나가 싸움 구경이다.
진은 자리를 잡고 누웠다.
그렇게 둘의 유치한 싸움을 구경하며, 육포를 뜯기 시작했다.
‘팝콘이 없는 게 아쉽네.’
다음 목적지가 정해졌다.
물론, 싸움 구경이 끝나면 출발할 거지만.
-이렇게 개판인데, 성과가 더 좋다고? 대체 어떻게…….
현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 * *
왕국에서 검으로 유명한 가문을 뽑으라면 대표적인 가문이 여럿 있다.
‘검성’은 검으로 유명한 가문 소속일 거라 예상했는데, 그 예상은 반만 맞았다.
‘그 세느 백작가?!’
세느 백작가는 검으로 유명한 가문이 맞지만, 최근엔 다른 이유로 더 유명한 가문이었다.
[허허. 그렇다네.]
세느 백작가.
이곳은 왕국 최고의 검을 수도 없이 배출했었다. 검술 하면 세느 백작가란 말이 있을 정도였는데, 그 말은 옛말이 되어 버렸다.
[과거엔 그랬지…….]
이미 지나간 영광일 뿐이었다.
지금은 다른 의미로 유명한 가문이었다.
‘가문, 폐쇄했다고 들었는데?’
영지 관리는 도시에 따로 설치된 행정청을 통해 관리하고, 가문 직계들은 영주성에서 나오지 않았다.
폐쇄한 이유가 진짜 걸작이었다.
가문의 직계를 비롯한 모두가 폐관 수련에 들어간 것이다.
[과거의 영광이 가문 전체를 짓누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네.]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서?’
[……단순히 그 영광을 되찾자고 벌인 일은 아닐세. 복잡한 사정이 포함되어 있지.]
‘뭐, 그렇겠지. 가문 하나를 폐쇄하는 일인데.’
그들의 마지막 발버둥이 바로 ‘가문 폐쇄’였다.
‘아무튼, 세느 백작가를 어떻게 하고 싶은데?’
물론, 진에게 그런 뒷이야기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해 줘야 하냐?
이게 가장 중요했다.
[폐쇄조치를 풀어줬으면 하네.]
‘……그걸 외부인이 풀 수 있어?’
왕국에 이 난리가 났는데도, 세느 백작가는 폐쇄를 풀지 않았다.
아니. 풀 필요가 없었다.
지식의 해방은 세느 백작가를 자극하지 않겠다는 듯 그쪽은 아예 건드리지 않았다.
[그게 내 요청일세. 쉽지 않겠지만 풀어 주었으면 좋겠군.]
검성의 ‘이유’나 다름없는 일이니, 이건 무조건 해야 한다.
물론 몇 가지 확인은 필요했다.
‘폐관 수련을 강제로 깬다고 해서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지?’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적으로 세느 백작가는 검성을 배출해 냈다. 그건 폐관 수련이 효과가 있었단 뜻이었다.
[허허. 가장 어처구니없는 게 무엇인지 아나? 가문의 검술은 폐관 수련 때가 아닌 폐관 수련이 끝나고 완성됐다는 것이라네.]
‘뭐?’
[우리 가문의 검술은 수련으로 완성되는 게 아닐세. 오히려 폐관 수련으로 가문의 검술은 빠르게 퇴보하고 있다네.]
‘고심 끝에 악수를 뒀다 이거야?’
[딱 맞는 말이군. 그렇다네. 게다가…… 아무튼, 최대한 빨리 부탁하네.]
검성은 뭔가 할 말이 더 남은 것 같았는데 말하지 않고 삼켰다.
‘찝찝하게 말을 하다 말어.’
[아닐세. 그저 폐쇄만 풀어 주면, 나머지는 알아서 해결될 터이니.]
뭐, 그렇다면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어쨌든 폐쇄만 풀어 주면 된다는 거지?’
[그렇다네.]
‘방법은 상관없고?’
[……여러 가지 조건을 붙이고 싶지만, 그건 너무 염치없겠지. 그대를 믿겠네.]
그 대화를 듣고 있던 현자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할 거야? 가주와 면담을 요청할 생각이야?
‘어? 그게 무슨 소리야?’
-가문 폐쇄를 푸는 건, 가주의 권한이니까.
[현자의 말대로 그건 가주의 권한일세. 내가 생각한 방법도 현자의 방법과 같다네.]
아니. 이 양반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그래서 어느 세월에 폐쇄를 풀어?’
-다른 방법이 있어?
‘당연히 있지! 이럴 땐 쉽게 쉽게 가는 거야.’
-이게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야?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는데?
[……슬슬 불안해지는구먼.]
아주 쉬운 방법이 있었다.
* * *
세느 백작가로 도착하는 건 공간 이동을 할 수 있는 진에게는 일도 아니었다.
-워프를 한 거야? 이렇게 쉽게!?
현자의 경악을 배경 삼아, 진은 천천히 세느 백작가 정문으로 다가갔다.
근처까지 다가가자 성벽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지! 정지! 세느 백작가는 폐쇄된 상태입니다!”
경비병이 아니었다.
고급스러운 갑옷을 입고 있는 걸 보니, 직계 쪽 사람인 거 같았다.
진은 감찰부의 표식과 교단의 표식을 성벽 위로 던졌다.
“어어!?”
그는 깜짝 놀라 뒷걸음치다가 자신 앞에 떨어진 걸 보고 한 번 더 놀랐다.
“가, 감찰부!? 교단?!”
진은 곧장 그가 내려올 거라 생각했는데, 그에게선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 나왔다.
“누구시길래 이걸 둘 다 가지고 다니시는 겁니까?”
정중하지만, 경계하는 듯한 목소리.
진이 마차에 깃발을 처음 꽂고 다녔을 때와 똑같은 반응이었다.
‘아. 이걸 생각 못했네.’
이쪽은 가문을 폐쇄하고 있어서, 아직 소식을 못 들은 모양이었다.
진의 신형이 사라지더니, 이내 성벽 위 그의 앞에 나타났다.
“불법 침입하셨습니다. 움직이지 마십쇼.”
그의 대응은 나쁘지 않았다.
어느샌가 검을 꺼내 들고, 진을 겨누고 있었다. 과연 세느 백작가라 할 만한 대응이었다.
“폐하께 특별 감찰 권한을 받은 성자 진 세인트라 합니다.”
성자와 특별 감찰. 마냥 무시하기엔 무게감이 넘치는 두 직책. 그는 빠르게 판단하고 결정을 내렸다.
“……죄송합니다만, 확인이 필요합니다.”
“예. 여기서 조용히 기다리겠습니다.”
함께 간다고 해 봐야 괜한 경계만 살 게 분명했다. 그가 신분을 확인한다는 선택을 했듯, 진도 한 발 양보해 주기로 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도 진의 의도를 이해한 듯 감사를 표한 뒤, 작은 호루라기를 꺼내 불었다.
삐이이익-!
소리가 나자마자 성벽 아래서 기사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들이 진의 주위를 에워쌌고, 진에게 표식을 받은 이는 곧장 성벽 아래로 내려갔다.
-이렇게 무작정 쳐들어와도 되는 거야? 일이 커지는 거 같은데?
‘네 말대로 원래는 엄청난 무례겠지. 근데, 난 돼.’
오만한 말이지만, 사실이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
[맞아요. 진은 그만큼 존중을 받을 만한 지위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하하. 이게 된다고?
현자는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애들과 잠깐 대화하고 있는 사이, 진에게 표식을 받은 이가 성벽 위로 올라오며 소리쳤다.
“모두 물러서라!”
그 잠깐 사이에 진의 신분을 확인하고 온 거 같았다. 그는 진에게 다가와 깍듯하게 인사했다.
“성자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불청객인 절 이리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간단한 인사가 오가고, 이내 그는 본론을 꺼냈다.
“한데,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감찰부의 일이십니까?”
“아닙니다. 일종의 개인적인 방문입니다. 당연히 저의 방문은 비공식적입니다.”
개인적이고, 비공식적인 방문.
“개인적인 방문이란 말씀이십니까?”
진과 세느 백작가는 전혀 접점이 없다. 저런 의문을 떠올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물론, 이때를 위해 준비해 둔 것이 있었다.
“혹시 제 신분만 확인하셨습니까?”
“예. 교단에 연락해 확인하였습니다.”
“아, 그러면 이걸 어떻게 설명해 드려야 할지 조금 고민입니다.”
그의 얼굴엔 한층 더 강한 의문이 떠올랐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이야기가 조금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참고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예……말씀해 주십시오.”
“성자는 쉽게 표현하면 일종의 그릇에 가깝습니다. 제 몸이 그릇이 되어, 드높은 신을 담는 겁니다.”
진의 뜬금없는 설명에 그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설마하니 성자의 존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던 거 같았다.
“예?”
“뜬금없게 느껴지시겠지만,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아. 예. 경청하겠습니다.”
“전 과분하게도 드높은 분들을 몇 번이나 담는 고귀한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쓸데없는 설명을 한 건, 모두 지금을 위해서였다.
“제가 검산에 갔을 때, 전 여태까지와는 조금 다른 분을 몸에 담았습니다. 덕분에 ‘검신’이란 과분한 칭호를 얻게 되었습니다.”
“……검신 말입니까?”
검의 신이 나오자 떨떠름해 하던 그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전 검산을 내려오고 나서야, 그분이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어떤 존재셨습니까?”
“그분은 인간이셨으나, 검의 극에 도달해 인간의 틀을 벗어난 분이셨습니다.”
“예? 인간이 신이 됐다는 말씀이십니까?”
“조금 다릅니다. 신이 되진 못하였으나, 인간을 초월한…… 중간쯤에 위치하신 분입니다.”
“허어. 그런 게 가능할 줄이야…….”
그는 물론이고, 주위에 있던 기사들까지 진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분께서, 세느 백작가에 가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예?”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듯 성자는 그릇일 뿐 뜻을 행하는 분은 따로 있으십니다.”
그렇게 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진의 분위기가 변했다.
진 주위에 있던 이들이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제일 뿐이었는데, 지금은 완숙한 검사가 눈앞에 있었다.
“시대는 전진하는데, 너희의 검술은 왜 후퇴하고 있느냐.”
그 말과 함께, 진의 손에 흙으로 된 검이 나타났다.
고작해야 손에 검을 쥐었을 뿐인데, 주위에 그 누구도 움직이지 못했다.
곧이어.
“꾸짖을 갈-!”
진의 입에선 엄청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내가 남겨 준 검술을 이따위로 퇴보시켜!? 이노오옴!”
이번 테마는 돌아온 ‘조상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