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작가의 정령 천재-40화 (40/210)

040. ‘예비’의 위대함

교황청 대회의실.

이곳은 열띤 토론이 이뤄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성자로 인정할 수 없다는 말입니까?!”

“추기경님,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면 무슨 뜻입니까!”

진과 대화할 땐 흐뭇한 미소만 짓던 영감님이 이곳에선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추기경님의 눈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성자라는 직책이 그만큼 큰 자리란 뜻입니다.”

“허어. 어찌 이리 꽉 막혔단 말입니까.”

“진 플린트. 그의 행동은 숭고하고 정의로운 게 맞습니다. 하지만 그가 성자로 인정을 받을 만큼 엄청난 업적을 세운 건 아닙니다. 만약 그를 성자로 선출한다면 여러 가지 의혹들이 나올 겁니다.”

“의혹이 나올 게 뭐가 있습니까.”

“없던 의혹도 만들어질 만한 자리가 바로 성자라는 자리입니다. 그렇기에 누구도 반박하지 못할 자격이 필요한 겁니다.”

이 사제의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자작령의 대도시 ‘카베마스’.

남작령 전체의 역병.

이렇게 들으면 엄청난 일을 한 것 같지만, 왕국까지 시야를 넓혀서 보면 작디작은 소도시에서 일어난 일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대륙까지 시야를 넓힌다면?

그다지 큰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미 발견한 성자를 기다리겠단 말입니까? 그 얼마나 멍청한 일입니까!”

“추기경님. 다른 자리도 아니고 성자의 자리입니다. 모두가 인정할 만한 자격이 필요한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자격? 성자의 자격을 우리가 정하는 겁니까?”

“성자는 단순한 자리가 아님을 추기경님께서 더 잘 아실 겁니다. 심지어 사제가 아닌, 부제가 성자에 오르는 일이기에 더욱더 필요합니다.”

대화는 좁혀지지 못하고, 평행선을 이뤘다.

차라리 어느 한쪽이 틀렸다면 더 빠르게 결론이 낫겠지만, 두 이야기 모두 나름의 확고한 이유가 있었다.

이 격렬한 토론을 멈출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그만.”

교황의 말에 회의장이 조용해졌다.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지만, 서로의 이야기도 일리가 있음을 알고 있을 겁니다.”

영감님은 물론이고, 절대 안 된다던 사제마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는 평행선을 달렸지만, 서로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고 있던 것이다.

“그러니 절충안을 내놓겠습니다.”

교황이 내놓은 해결책은 간단했다.

“진 플린트를 예비 성자로 임명하겠습니다.”

예비 성자.

그냥 성자도 아니고 예비 성자 자리 같은 게 존재할 리 없었다. 이건 오직 진을 위해 만든 직책이었다.

회의장이 일순 술렁였다.

“교황님, 예비 성자라 하심은?”

영감님 말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던 사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대의 말대로 성자의 자리는 자격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예비 성자라면 우리 교단에서만 통용될 테니, 아까 말했던 문제들은 없을 겁니다.”

교황의 말에 그는 잠시 고민한 뒤 입을 열었다.

“예비 성자로서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걱정한 건 성자가 선정된 후 대륙에 미칠 파급력이었다. 결코 진의 업적이 가볍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추기경님께서 추천하신 아이가 부족할 리 없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평생 열병 지대를 떠돌던 추기경의 눈이었다.

그보다 신성력이 강한 사람은 교단 전체를 뒤져도 셋이 넘지 못한다.

“추기경은 어떻습니까? 교단은 예비 성자를 최대한 보호할 것이며, 그의 방패가 되어 줄 겁니다.”

교황이 이렇게까지 나왔는데, 영감님도 더는 밀어붙일 수 없었다.

“현명한 결정이십니다.”

영감님이 성자가 되지 못한다는 걸 몰랐을까? 그럴 리 없다.

그는 이미 목표로 한 ‘교단의 보호’를 손에 넣었다.

“예비 성자라는 특수한 지위는 우리 교단에서만 통용될 것입니다.”

세상에 파급력을 미치지 않고, 진을 보호해 줄 완벽한 방법.

‘허허. 보호만 약속됐어도 충분했건만.’

영감님은 기대 이상의 성과에 미소를 지었다.

* * *

며칠 전 진은 로메른에게 묘한 이야기를 하나 들었다.

[노바랑 애들, 사실은 대륙어 유창한 거 알아?]

“뭐?”

[애들끼리 있을 땐 되게 유창하게 말하던데?]

“그게 뭔 소리야. 오늘 아침만 해도 ‘주인 나 다녀온다!’ 하고 갔는데.”

[아니. 진짜 유창하다니까?]

“아이고, 그러시겠죠.”

[뭐, 믿기 싫으면 말든가.]

아이들이 대륙어가 유창하단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아니지. 생각해 보면 이상해.’

한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로메른의 말은 진짜인 것 같았다.

아무리 언어가 다르다고 해도 이건 교육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한국인 중에서도 영어 유창하게 하는 사람 많잖아?’

특유의 이질감은 지우지는 못해도, 학습하면 개선되는 게 당연한 일이다.

‘그러고 보면 내가 아이들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더라?’

당연한 말이지만, 잘 몰랐다.

매일같이 누워서 빈둥거리고 있으니, 아이들에 관해 잘 모르는 게 당연했다.

그날 저녁.

진은 노바와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노바.”

진의 말에 노바가 대답했다.

“주인.”

“요즘 수업받는 건 어때?”

“좋다!”

투박하고 어눌한 대륙어.

저 말투야말로 야만인이라 불리게 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였다.

“대륙어 수업은?”

거침없이 대답하던 녀석이 입을 다물었다. 진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너희들이 얼마나 똑똑한진 내가 잘 알고 있어. 그런데 이쪽은 효과가 너무 없는데?”

노바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설마 진짜야!?’

노바는 뭔가를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주인, 속이려고 한 건 아니었다. 대륙어 교육도 잘 받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말투가 어색한 건 사라지지 않았지만, 유창한 대륙어가 노바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잘하네?”

“최선을 다해 배우고 있다.”

그 유창한 모습에 진의 머릿속에 의문이 하나 떠올랐다.

“잘하는 걸 왜 감추고 있었어?”

여태 왜 감추고 있었는지, 그게 제일 궁금했다.

“노예가 너무 똑똑하면 안 된다. 사람들은 그걸 위험하게 생각한다.”

노바의 말은 맞았다.

똑똑한 노예가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고 살아갈까? 전혀 아니었다.

어떻게든 그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그 발버둥이 좋은 쪽이면 문제가 없겠지만, 때때로 위험한 상황이 펼쳐진다.

“주인이 우리 때문에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듣는 게 싫었다. 그래서 주인이 그런 이야기를 듣지 않게 숨겼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진은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녀석들 귀엽네.’

덩치는 산만 한 녀석들이지만, 그 마음만큼은 섬세했다. 결국, 자신을 위해 어눌한 척한 것이다.

“앞으론 편하게 말해. 너희한테 붙어 있는 노예 딱지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라질 거야.”

진의 말에 노바는 깜짝 놀랐다.

“뭘 놀라? 말했잖아 노예랑 주인이 아니라, 식구라고.”

“알겠다, 주인.”

녀석은 감동한 얼굴로 진을 바라봤다.

이제 두 번째로 궁금한 걸 물어볼 차례였다.

“근데, 대륙어가 유창한데 왜 반말해?”

어딜 한참 형한테 반말하냐 이거야!

대한민국 유교맨이 출동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감동하고 있던 노바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때 조용히 있던 용수바람이 끼어들었다.

“지금까지 숨기고 있어 갑자기 존댓말로 바꾸는 게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주인님.”

용수바람의 입에선 노바의 대륙어보다 훨씬 유창한 대륙어가 흘러나왔다.

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이젠 더는 능력을 숨기지 마. 너희들의 모든 걸 세상에 보여 주는 거야. 대신, 기왕 보여 줄 거 완벽하게 보여 줘.”

왜 존댓말 안 하냐고 한 건 반쯤 장난이었지만, 이건 중요한 일이었다.

“너희들은 세상의 주목을 받을 거야. 그러니까 너희들의 모습이 모든 사막부족을 대표한다고 생각하고 행동해.”

이 아이들이 세상에 보여 주는 모습에 따라, 사막부족은 ‘야만인’이란 굴레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너희들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부족 전부를 구할 수도 있어.”

녀석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진의 말 속에 숨은 뜻을 읽은 것이다.

결연한 눈빛을 하고 있던 노바가 입을 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노바의 입에서 정중한 존댓말이 흘러나왔다. 진은 말없이 녀석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최근 로메른과 루나는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진. 골드 좀 쓴다?]

“골드만 있으면 돼?”

[어. 너 움직일 일은 없을 테니깐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건 골드로 되는 일이야.]

그렇다면야 얼마든지 써도 상관없었다.

이쪽은 골드를 마법처럼 만들어 낼 수 있는 전설의 도박꾼이 함께하고 있었다.

‘좋다, 좋아.’

진은 굉장히 가볍게 생각했는데, 로메른은 상상 이상으로 스케일 크게 움직였다.

녀석이 골드를 쓴다고 한 다음부터, 집으로 짐마차가 끊임없이 들어왔다.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과일 좀 샀어.]

“왜? 가격 폭등이라도 해?”

반쯤 농담으로 던진 질문이었는데.

[뭐, 몇몇 지역에선 없어서 못 구하게 되긴 하지.]

진짜인 모양이었다.

“대체 뭔 과일이길래?”

진은 잔뜩 쌓여 있는 과일을 확인하기 위해 다가갔다.

“어?”

지구의 수박과 비슷한 과일이었다.

“이게 가격이 폭등한다고?”

이건 그리 특별한 과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과일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을 때, 진의 눈에 뭔가 보였다.

“……설마, 과일에 마법까지 건 거야?”

과일에서 마력이 느껴졌다.

[어. 상하면 안 되니까.]

“이거 앞으로 얼마나 더 와?”

[한참 남았어. 우리가 하도 구매해서 가격이 올랐을 정도니까.]

“세상에…….”

가격을 변동시킬 정도로 많이 구매했다는 소리였다.

“이걸 어따 써먹는데!?”

[가뭄이 와.]

“가뭄?”

솔직히 지금 시기에는 와도 상관없었다. 이미 추수는 끝났고, 슬슬 겨울이 다가오는 중이었다.

[뭐, 이쪽에는 그다지 영향이 없는 가뭄이야.]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말릭이 갔던 카이얀 대요새 기억해?]

“응. 거기 뭔 난리 난다고 하지 않았어?”

[요새도 가뭄의 영향을 받긴 하는데, 진짜 문제는 요새 너머에 있는 곳이야.]

카이얀 요새 너머엔 척박한 땅과 몬스터들이 가득했다.

그곳에 난리가 난다면?

“카이얀 요새로 몬스터들이 몰려드는 거야? 기왕이면 말릭만 죽었으면 좋겠는데.”

카이얀 대요새엔 말릭이 있었다.

기왕 죽는 거 다른 병사들 대신 몬스터와 싸우다 죽으면 딱이었다.

녀석은 우린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했지만, 어림도 없지. 딱 보니깐 거기서 죽을 팔자였다.

[뭐, 요새가 무너질 리는 없지만, 적어도 물 부족으로 병사들이 죽는 일이 없어야지.]

그게 해결책이 바로 이 과일이었다.

“어느 정도의 가뭄이 오길래 이 과일을 보내는 거야?”

수박처럼 이 과일은 수분이 가득했다. 물 대신 먹을 수 있는 과일이었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가뭄. 재앙이라고 할 정도로 큰 가뭄이 일어나. 뭐, 인간들이 사는 곳까지 가뭄에 영향 받으려면 아직 1~2년은 남았지만.]

1~2년이면 준비할 시간으론 충분했다. 게다가 녀석이 말하는 투를 보니, 해결책을 생각해 둔 모양이었다.

“해결책이 있나 보네?”

[당연히 있지. 현자 녀석이 있었으면 훨씬 쉬워졌겠지만, 그래도 성녀가 피의 정령이라서 차선책은 가능할 거 같아. 지금 연구 중이니까 완성되면 말해 줄게.]

준비는 차근차근 되고 있는 거 같았다.

“그래? 그럼 그쪽은 천천히 가 봐도 되겠…….”

그때, 생각지도 못한 손님이 방문했다.

“형제님, 그동안 잘 지내고 계셨습니까?”

한동안 보지 못했던 교구장님의 방문이었다.

“복귀하신 겁니까?”

“예. 잘 끝나고 복귀했습니다.”

진은 교구장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다. 한데, 그에게 질문을 하기도 전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예비 성자로 뽑히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예?”

예비 성자가 갑자기 튀어나왔다.

[이야. 그 영감탱이 장난 아니잖아? 설마 했는데.]

로메른이 깜짝 놀라서 감탄을 터트릴 정도의 일이었다.

교구장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는 보따리 하나를 진에게 내밀었다.

“스승님께서 보내신 축하 선물입니다.”

그 스승님이 누군진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영감님.’

감동은 선물을 받아 든 후, 2배가 되었다.

선물이 ‘묵직’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