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
53. 마기의 씨앗 (3)
“따라갈 것인가…….”
잠시 여러 가지 가능성을 타진하다 보니, 어느새 바알의 전투는 끝나 있는 상황이었다.
바알은 무엇인가 급한 일이 생겼는지, 상대의 숨통을 완전히 끊지 않고 성채에서 몸을 날렸다.
하긴, 대충 느껴도 숨이 끊어진 상태이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기도 한 상황이다.
“다른 방법은 없군.”
아몬은 바알을 따라 몸을 날렸다.
바로 옆의 성채, 그곳으로 이어진 농후한 마기가 느껴졌다.
“으음…….”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문에 아몬의 입에서 절로 신음이 나왔다.
불길한 기운이 안에서 몽글몽글 피어오르고 있었다.
덜컹.
아몬의 손에 두터운 문이 열리고, 바알이 입장한 내부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핏빛 휘장이 가장 먼저 보인다.
그리고 휘장 안쪽으로 넓게 자리 잡은 것은 기다란 레드 카펫, 그리고 그 위에 놓인 것은 바알의 권좌였다.
“이거, 손님이 오셨군.”
불청객의 난입에 놀랄 만도 한데, 바알은 여유만만하게 아몬을 맞이했다.
마치 방금 전까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한 태도다.
담담한 바알의 응대에 아몬이 다시 한 번 긴장했다.
“그렇군. 아몬이었나.”
“…….”
특별한 기색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바알의 말을 듣자하니, 방금 전에 아몬이 그의 전투를 지켜본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담담한 태도.
도저히 파악이 불가능한 바알의 내심이 아몬의 경각심을 일으켰다.
“다른 이도 아니고 아몬이 직접 왔는데 이러고 앉아만 있을 수가 없겠지.”스윽-
자신의 권좌에 오연하게 앉아있던 바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턱.
몸을 일으키고, 권좌 아래의 땅을 밟는 바알이다.
몸을 일으키는 속도가 느릿느릿했다.
‘이상해. 너무 태연하다.’
그런 바알의 행동에 아몬의 얼굴이 굳었다.
바알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천천히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방금 전에 바알이 했던 행동을 지켜봤던 아몬에게는, 그 모습이 마치 속내를 숨긴 뱀과 같이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노리고 있던 먹잇감을 낚아챌 것만 같은 팽팽한 긴장이 느껴졌다.
“다른 이도 아니고 아몬의 표정이 이렇게 굳어있는 것을 볼 줄이야. 하하하.”
바알이 그런 아몬의 얼굴을 보며 호탕한 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지금 바알의 성채 전체가 전투로 인해 난리도 아닌 상황이다.
아무리 온화한 마왕이라도, 이런 상황이라면 아몬을 맞이하기보다 밖의 소란을 정리하는 것이 먼저다.
하지만 바알은 그렇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마치 밖의 소란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듯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더욱 수상했다.
“내가 초대를 했지만, 여기까지 부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대저 무슨 일인가?”
바알이 서서히 아몬에게로 다가가면서 물었다.
“…….”
태연하지만 날카로운 눈빛으로 아몬의 얼굴을 살피는 바알이다.
바알이 이내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볼일이 있을 것이 아닌가? 왜 말이 없지?”
“…….”
계속해서 말이 없는 아몬에게 하는 말이다.
바알이 슬쩍 미소를 지으며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꺼내기 힘든 말이라도 하려고 하는 건가? 아니면 별다른 용무 없이 여기로 온 것인가.”
“물어볼 것이 있다.”
“물어볼 것이라…….”
고개를 끄덕이는 바알이다.
바알이 혼잣말처럼 입술을 움직였다.
“오랜 시간 동안 칩거하던 아몬이 내게 물어볼 것이 있을까?”
턱.
아몬과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한 바알이 걸음을 멈췄다.
“다른 이도 아니고 아몬이 이렇게까지 발걸음을 할 정도라니 나로서도 호기심이 생기는군.”
“…….”
그러나 아몬은 섣불리 본론을 꺼내지 않았다.
분명한 위화감이, 바알에게서 느껴지고 있었다.
화악.
“그래서, 언제까지 그렇게 서 있을 건가?”
“……!”
아몬의 말을 기다리다가 지친 바알이 순간적으로 기도를 내뿜었다.
바알의 기도를 느낀 아몬의 얼굴이 굳었다.
방금 전, 신의 개를 상대하던 때와는 전혀 다른 기도.
‘마기를 정제하기 위해 제약을 두고 있었나?’
턱.
“이래서 똑똑한 놈들은 문제야, 생각이 너무 많다니까.”
여전히 대답을 하지 않는 아몬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며 바알이 입을 열었다.
‘으음…….’
신의 개들의 마계 침공 이후, 바알이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었었다?
웃기는 말들이다.
바알은 더 무섭게 성장해 있었다.
마신의 그림자를 자처하는 아몬마저 불길한 느낌을 여과 없이 받을 만큼의 강자다.
약자들의 수군거림을 들으면서도 자신을 숨길 줄 아는 진정한 강자였다.
“여전히 대답을 하지 않을 생각인가?”
자신의 압박에도 여전히 입을 열지 않는 아몬의 모습에 바알이 먼저 질문을 던졌다.
“그럼 내가 물어보지, 밖의 전투와 관련이 있나?”
삽시간에 줄어드는 기도.
아몬을 압박하는 기운을 자유자재로 다룬다.
마치 방금 전 마기가 공간을 압박한 것이 착각이기라도 한 것 같은 상황.
다시 여유가 넘치는 모습으로 돌아온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런 바알의 질문에 아몬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다른 것이 아니라 밖의 전투에 대해 묻는다고?’
처음의 대화로 봐서는, 방금 전 마기를 정제하는 것을 지켜본 것이 아몬 자신이라고 짐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뜬금없이 밖의 전투에 대해서 물어보다니.
잠시 생각에 잠겼던 아몬이 결국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밖의 전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바알 그대의 권좌에 도전하는 자들이겠지. 내게는 그 이상도, 그 이하의 의도 없을뿐더러 아무런 관련도 있지 않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아몬의 말에 바알이 싱긋 웃음을 지었다.
분명히 웃음을 짓고 있지만 어딘가 섬뜩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럼 대체 무슨 용무로 나를 찾아 온 건가?”
또다시 던져진 질문이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바알과 아몬.
바알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이거 참. 이야기를 들으려면 한참을 기다려야겠군. 마치 내가 그대에게 질문을 하러 방문한 것 같은 상황이야.”
바알이 빙글 몸을 돌렸다.
움직임 하나, 말투 하나가 상황을 자기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도록 만드는 절묘한 힘이 있다.
아몬이 섣불리 말을 꺼낼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빈틈이 널린 것 같지만, 어디에도 틈이 보이지 않았다.
“하긴, 그대 정도라면 내가 먼저 말을 꺼내도 되겠지.”
바알이 걸음을 옮겼다.
“뭐하나? 따라오지 않고?”
‘무슨……?’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바알의 행동에 또다시 당황하는 아몬이다.
그러나 당황도 잠시, 바알이 자신의 권좌를 옆으로 밀어 지하로 통하는 통로를 공개했다.
“……!”
이런 비밀 통로를 공개하는 이유는 둘 중 하나다.
정말로 믿을 수 있는 동료라던가, 아니면 꼭 죽일 생각인 적.
아몬은 더욱 거세게 불안감이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따라오게.”
바알이 먼저 아래로 내려갔다.
잠시 고민하던 아몬이지만, 바알을 따라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이건…….”
바알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자마자 아몬은 놀라움을 금치 못할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변하는 주변의 공기.
지하에서는 방금 전에 바알이 만들고 있던 끈적한 마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확실하다…….’
바알이 이런 공간까지 만들어서 이런 짓을 하는 이유는 뻔했다.
아몬의 손은 언제라도 자신의 무기로 향할 수 있게 움직였다.
“내 비밀 공간이지. 이곳에 초대를 받아서 들어온 생명은 그대가 두 번째야.”
바알의 말에 아몬이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탁.
이내 바알의 걸음이 견고하게 설치된 철문 앞에 멈췄다.
바알은 철문 한쪽을 부드럽게 눌러 밀었다.
끼이이익.
철문이 열리자 농축된 마기가 더욱 강하게 쏟아져 나왔다.
아몬으로서도 순간적으로 버티기 힘들 정도로 정순한 마기.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많은 고민을 했지.”
그러나 익숙하다는 듯이 바알은 그런 마기를 헤치며 안으로 나아갔다.
“이게 지금 대체 무슨 상황인가? 바알.”
어느새 신형을 수습한 아몬이 노기 띤 목소리로 바알을 추궁했다.
“그리고 나는 더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네.”
하지만 바알은 그런 아몬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 자신의 말만을 이어나갔다.
“상대가 신의 피조물 중에서 가장 강하다면 말이야. 이기려면 어찌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아몬?”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물었다. 바알.”
“아몬.”
어느새 철문 안의 깊숙한 곳에서 몸을 돌린 바알이다.
그의 앞으로 아몬이 성큼 발길을 옮겼다.
“나는 오랜 시간을 고민했다. 그리고 방법을 찾았지.”
바알은 여전히 자신이 할 말을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정해진 이상은 올라갈 수 없는 벽이라는 것이 있다.”
바알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그렇다면 나를 도울 수 있는 내 수족들을 내가 직접 창조한다면 어떨까?”
“지금 마신님의 뜻에 반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는 것인가!”
“글쎄? 과연 마신께서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아몬의 노호성에 바알이 여전히 웃음을 지우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분의 자식들이 선신의 사제에게 당하는 걸 원하실까? 아니면 반대로 그분의 뜻을 더 널리 퍼트리는 것을 원하실까.”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아몬을 바라보는 바알이다.
마신의 그림자 아몬.
마신을 섬기는 가장 신실한 마족 중 하나로, 어디 마신의 뜻을 퍼트리는 데 욕심이 없을까.
그러나 그 방법에는 제한이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몬은 좌우로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인가?”
“아니, 이미 답은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지 않나?”
바알의 한마디.
그 말에 아몬의 눈이 번뜩였다.
마음을 굳혔다.
바알은 더 이상 마신의 뜻을 받드는 자가 아니었다.
“하하하. 대답을 하지 않는군. 아몬, 그대가 마신의 숨겨진 검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
바알이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움찔.
직설적인 바알의 말에 아몬의 몸이 민감하게 곤두섰다.
바알의 행동을 예측하기 힘든 상황, 대체 어떤 행동을 취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 자네가 내 대의를 이해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사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했어.”
팽팽하게 긴장되는 공기.
오가는 대화와 무관하게 실내의 마기가 사나워지고 있었다.
탁!
“그럼, 어디 한번 그대를 대상으로 실험을 해볼까?”
철컹.
바알의 신호와 함께 벽면에서 숨겨진 장치가 나타났다.
그 장치 안에는 각양각색의 종족들이 초점 없는 눈으로 시립해 있었다.
“이게 무슨?”
터벅, 터벅.
예상치 못한 상황에 아몬이 당황하는 동안 바알은 더욱 뒤로 물러났다.
쿵.
벽에서 나타난 놈들이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아 이상하게 느끼던 차다.
바알이 자신의 곤봉 중 하나인 아이무르를 땅에 박았다.
아까 전에 세은을 상대하면서도 어지간하면 땅에서 뽑아들지 않던, 바로 그 곤봉이다.
키이잉-
그리고 주변의 끈적이고 순수한 마기들이 여러 생명들에게 흡수되기 시작했다.
“크어어억.”
“꺼어억?”
동시에 마물도, 마족도 아닌 종족들의 심장에서 거대한 마기의 발아가 시작되었다.
“이건 대체?”
난생 처음 보는 광경에 아몬의 눈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하하하하! 완벽한 성공이군!”
오직 바알만이 자신의 계획이 성공한 것에 대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