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
40. 함정(4)
전장으로 지정된 장소로 왔지만, 유럽의 병력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심지어 세은의 감각에도 걸리는 사람이 없었다.
‘이상한데?’
당연히 전장에서는 먼저 와서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는 곳이 유리하다.
이 사실은 전쟁에 대해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은 사람이라도 누구 아는 상식.
그런데 유럽에서 이런 기초적인 실수를 할 리가 없었다.
세은이 조금 더 집중해서 주변을 살펴보았다.
“흐음?”
그의 감각에 무엇인가 이질적인 것이 잡혔다.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조금 더 감각을 집중하는 순간.
아무것도 없던 사방에서 공격이 무차별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슈우우우우!
쾅― 콰앙―!
“공격해라! 이미 전쟁은 시작됐다!”
“머뭇거리지 마라! 적들은 강력하다!”
“초반에 큰 타격을 줘야 해! 준비한 공격을 한 번에 퍼부어!”
“오러 사용자들은 마법 세례가 끝나면 바로 돌진한다!”
공격과 동시에 지평선을 가득 채운 인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법사들이 공중에서, 그리고 높은 지대에서 마법을 쏟아붓고 있던 상황.
그리고 그 아래에는 오러 유저들이 마법이 끝날 때를 기다려 언제든지 돌격을 할 수 있게 준비하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
세은 역시 발견하지 못한 대인원이 갑자기 나타났으니, 다들 당황하는 것은 당연했다.
상대 병력의 규모를 파악할 시간도 없었다.
당장 사방을 가득 채운 마법들이 시야까지 방해할 정도.
“홀리 웨이브!”
세은이 급하게 방어막을 전개했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전체를 방어할 수는 없었다.
“크악!”
“아아악!”
결국 세은이 막지 못한 곳의 인원들은 쏟아지는 마법에 피해를 입고 말았다.
“도대체 이게…….”
후방에 있던 케인이 날아오던 마법들을 막아내며 중얼거렸다.
“무슨 수를 쓴 것 같은데.”
세은은 더 힘을 내 마법들을 방어하며 말했다.
자신의 감각까지 완전히 속이는 이런 마법진을 만들 마법사가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그 말은 상대 중에 마왕이 끼어 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마법이 사그라지면 반격에 나선다! 우선은 방어에 치중해!”
“급소를 우선적으로 보호해라! 우리에게는 힐러들이 있다!”
지휘관들이 다급한 지시가 전장을 날아다녔다.
이대로 당할 수는 없었다.
쏟아지는 마법을 막아내던 이들의 눈에 독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반격해라!”
“우리의 힘을 보여줄 시간이다!”
“우아아악!”
한 차례 폭격이 그치고, 지휘관들의 독려 아래 오러 유저들이 앞으로 돌진했다.
유럽의 오러 유저들도 마법이 끝난 것을 확인하고 마주 달려오고 있었다.
“헤이런!”
“예! 성하!”
사제들과 함께 교단의 피해를 막고 있던 헤이런이 대답했다.
“아무래도 여기 마왕이 있는 것 같으니까, 이곳을 부탁한다.”
“아, 알겠습니다!”
세은의 말에 헤이런이 바로 대답했다.
마왕이 있다면 세은은 여기에 있을 수가 없다.
헤이런의 대답을 들은 세은이 빠르게 몸을 날렸다.
이동에 방해가 되는 최소한의 인원만 쳐 내며 주변을 탐색하던 세은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렇게 대 인원을 숨길 정도면 자신의 몸 하나를 숨기는 정도는 일도 아닐 터.
최대한 정신을 집중해서 마왕을 잡아내야 했다.
‘자신 있다 이거지.’
지금의 상황으로 미루어 보건데, 선전포고도 마왕이 뒤에서 공작을 부렸을 확률이 높았다.
한 마디로 유럽이 마왕의 손에 놀아나고 있다는 말.
자신이 유럽 본부에 갔을 때 그들의 수장인 마르키시오가 없던 것이 가장 의심이 갔다.
‘아마 그놈이 마왕일 수도 있지.’
세은의 이동경로를 모두 예지했던 마왕이라면, 그가 본부에 올 것을 예지하고 미리 몸을 피했을 수도 있다.
심증이 확신으로 변해갔다.
자잘한 놈들은 제치고, 가장 중심부를 친다.
전투를 빠르게 종결할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적이다!”
“죽여!”
그러나 워낙 많은 사람들이 동원된 전쟁이다 보니,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도 곤욕이었다.
끈질기게 달라붙는 적들의 공세에 세은은 마음만큼 속도를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 적의 수장이 있다!”
“이곳이다!”
“으아아아!”
세은은 자신을 알아본 유럽의 병력이 몰리는 것을 지켜보다가 작전을 변경했다.
‘전부 무시하고 치고 나간다.’
달려드는 이들을 전부 처리하고 지나가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나 잠깐이라도 공격을 하다가 멈칫하게 되면, 다시 수많은 인원에게 둘러싸이게 되는 악순환의 반복.
아예 전부 무시하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미 주변은 인의 장막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어설프게 해서는 죽도 밥도 안 될 텐데.’
세은이 치명상만 입히고 자신들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챈 적들이, 더욱 기가 살아 세은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 많은 인원을 한 번에 죽이기도 께름칙한 상황.
‘그야말로 사면초가네.’
자신이 이러는 동안에도 본진에서는 사상자가 나오고 있을 게 분명했다.
“비켜라!”
“모두 비켜!”
그때, 갑자기 적들의 한쪽 방향이 시끄러워졌다.
그러나 너무 많은 인원이 몰려 있던 탓에 신속하게 자리를 만들지 못했다.
“빨리 비켜! 이 얼간이들아!”
콰콰콰콰!
마지막 외침과 동시에 강력한 마법이 다시 세은에게로 쏟아졌다.
“으악!”
“아아악!”
사람들에 밀려 미처 피하지 못한 각성자들이 마법에 적중당해 즉사하거나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우웅―
그러나 오히려 마법의 목표였던 세은은 신성력을 이용해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
“끄으윽…….”
강력한 마법이 지나간 길 위에 피로 물든 길이 만들어졌다.
‘후우. 이렇게라도 길이 생겼으니 다행인가.’
세은이 손을 쓰기 망설이던 차에, 알아서 길을 만들어 준 적들.
천운으로 생긴 그 길로 세은이 재빨리 몸을 날렸다.
바닥에 쓰러져 신음을 흘리고 있던 적들의 위를 빠르게 지나쳤다.
파앙― 파아앙―!
그러나 그런 세은을 쫓아 이번에는 석궁이 날아왔다.
검푸른 마나를 둘러싸고 있는 화살들은 허공을 찢어버리는 것 같은 파공성을 내며 세은을 공격했다.
“흐읍!”
세은이 속도를 줄이지 않으며 방어막을 전개에 화살을 막아냈다.
크게 위협이 될 만한 위력은 아니었으나, 조금이라도 멈칫하게 되면 방금 전처럼 사람들 사이에 갇히게 된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만큼은 사양하고 싶은 세은이었다.
지금도 주변에서는 세은을 목표로 수많은 병력이 달려들고 있었다.
학살자도 아니고, 이 많은 사람들을 전부 죽이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거기에 마왕이 있다면 오히려 그것을 노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사람의 피는 힘을 되찾는 데 중요한 매개체 중 하나로 사용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더욱 전투가 길어지기 전에 마왕을 찾아내서 처단해야 했다.
‘결국 시간과의 싸움이네.’
세은의 시선이 전장을 한 바퀴 쓱 훑었다.
‘역시 최대한 머리부터 치는 방법이 제일 좋겠어.’
끊임없이 날아오는 마법과 화살을 쳐내며 세은이 속도를 더욱 올렸다.
적들이 달라붙을 틈을 주지 않고, 세은은 더욱 빠르게 다리를 움직였다.
* * *
바싸고와 마르바스는 높은 곳에서 전장을 한눈에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기 시렌이 보이는군.”
“나도 보고 있다.”
바싸고의 말에 마르바스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둘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인의 장막으로 둘러싸인 세은이 있었다.
그리고 세은을 잡기 위해 유럽의 각성자들이 공격을 쏟아내는 모습도 보였다.
“하하. 멍청한 인간 놈들, 자기들 손으로 자신들의 희망을 짓밟는 꼴이라니.”
바싸고가 그 모습을 보면서 낄낄거리는 웃음을 지었다.
너무나 기뻐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냥 함정을 파는 것 보다, 이렇게 인간들 손으로 멍청한 짓을 하게 하는 것이 너무나 즐거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 바싸고의 모습을 지켜보던 마르바스가 그에게 물었다.
“정말로 시렌이 이곳으로 온다고?”
“그럼,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니까 이리로 오지 않을 리가 없지.”
“흐음…….”
마르바스가 미심쩍다는 듯이 신음을 흘렸다.
“여기까지 와서 또 그런 식으로 반응하면 섭섭하지.”
마르바스의 태도에 바싸고가 웃음을 담아 장난 식으로 말했다.
“자자, 그러지 말고 모락스에게 가서 준비가 다 되었는지 확인해 주게나.”
“그러지.”
바싸고의 말에 마르바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도 이제 와서 의심을 하기는 했지만, 결국 바싸고의 말대로 될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계에서도 그랬고, 지구에서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바싸고의 예지는 틀리는 법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차피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예지를 이해하려고 해도 불가능한 일.
차라리 모락스의 곁으로 가서 시렌과의 대결을 위해 정신을 가다듬는 것이 나으리라.
“모락스. 준비는 다 되었나?”
“물론이지.”
마왕 21위 모락스.
수소의 몸에 인간의 머리를 하고 있는 모락스는, 특히 산제물을 마력으로 변환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바싸고의 말대로 때를 맞춰서 지구로 넘어온 모락스는, 바싸고의 계획을 듣자마자 바로 합류했다.
세은이 마계를 정벌할 때 그에게 붙잡혀 뿔을 잘리는 수모를 겪은 모락스였다.
세은은 잡는 일에 참여를 하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바싸고는 대단하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는지 기발해.”
“대단하긴 하지.”
모락스의 말에 마르바스가 동의했다.
“그 누구도 단 한 명의 적 때문에 마왕 셋이 연합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테니까.”
“그 정도로 재앙이지. 시렌 그 개자식은 말이야.”
“그렇긴 하지만 말이야…….”
“하하. 마르바스. 자네의 생각은 다 알고 있어. 자존심이 상하는 것 아닌가?”
“…….”
모락스의 말에 마르바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알고 있는 모락스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물론 나도 자존심이 상하지, 말은 안 하지만 바싸고도 마찬가지일 거야. 우리가 언제 한 놈 때문에 이렇게 힘을 합칠 일이 있겠나.”
모락스는 시선을 돌려 자신이 만든 마법진의 열쇠를 바라보았다.
이걸 이용해 전장 전체에 그려진 마법진을 발동하면, 이제 희생자들의 피와 생명력을 바탕으로 순식간에 마력이 집중된다.
그럼 마왕 세 명이 본래의 힘을 찾을 만한 힘이 충분히 모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시작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한 번 겪지 않았나? 저 개자식은 인정하기 싫지만, 개가 아니라 맹수야. 맹수를 잡기 위해서는 함정도 필요한 법이지.”
“끄응…….”
모락스의 말에 마르바스가 또다시 신음을 내뱉었다.
모두 맞는 말이다.
그러나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된 이상 확실히 놈을 죽인다.”
“하하. 당연한 걸 말하고 그러나. 자, 나는 마법진을 한 번 더 확인 할 테니 잠시 쉬고 있게나.”
말을 마친 모락스는 마법진의 중심을 다시 한 번 살펴보러 이동했다.
그런 모락스를 보며 마르바스는 전장에 감각을 기울였다.
사람들이 쓰러지며 내뱉은 고통에 찬 신음소리.
바람에 담겨 사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비릿한 피 냄새.
모든 것이 마르바스의 컨디션을 끌어 올리고 있었다.
“좋아.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마르바스는 가만히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면 있을, 그의 대적을 상대하기 위해서.